편집자 주
경찰은 올해 5월 ‘제주 보육교사 살인 사건’의 유력한 살해 용의자를 체포했다. 끈질긴 과학수사 덕분이었다. 하지만 제주지방법원은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용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범인을 특정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과학수사팀의 수사 과정을 공개한다.
2009년 2월 1일 제주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던 한 여성이 실종됐다. 그는 일주일이 지난 2월 8일 오후 2시경 배수로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황을 봤을 때 여성의 사망은 명백히 범죄와 관련돼 보였다.
다행히 현장 조사와 변사자 검시 과정에서 몇 가지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됐고, 수집된 증거와 정황 증거를 통해 용의자가 좁혀졌다. 사건은 쉽게 전개되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자의 사망시각이었다. 피해자의 사망시각은 곧 범행 시각,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무력화하고 범죄를 단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당시 부검을 통해 밝혀진 사망시각은 발견일로부터 24시간 이내였다. 다른 모든 증거가 용의자를 특정 인물로 지목한다고 해도 피해자 사망시각 당시의 알리바이가 입증되면 그 용의자를 범인으로 보기 어렵다.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압축해 범죄를 입증하려던 수사팀은 난관에 빠졌다. 더욱이 10여 년 전의 과학수사로는 배수로나 기상 조건 등 사건 현장의 특수성까지 고려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 사건은 결국 10년 가까이 해결되지 못했다.
동물실험 전담 사후변성학팀이 찾아낸 실마리
하지만 최근 수사팀은 동물실험을 통해 새로운 실마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는 2009년부터 동물을 이용한 실험으로 기존 수사 기법을 검증하고,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수사 방법을 연구 중이다. 미국은 테네시대 인류학연구소, 텍사스주립대 법인류학연구소 등 6개 연구기관에서 시체를 기증받아 법의학이나 법과학에 필요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동물실험에 머물러 있다.
동물실험에는 주로 돼지를 쓴다. 돼지는 체지방 비율이 9~27%로, 사람의 평균 체지방 비율(성인 여성은 28%, 성인 남성은 18%)과 가장 비슷하다. 또 부패의 진행과 부패하는 동안 접근하는 곤충의 종이 검정파리, 금파리, 송장벌레 등으로 가장 유사하다.
현재 동물실험은 주로 경찰청 과학수사대 중에서 ‘사후변성학(forensic taphonomy)’팀이 전담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총 5명이 사후변성학팀 소속이다. 필자는 초기시체의 사후 경과시간 추정, 법곤충학을 담당한다.
심경양 경기남구경찰청 검시관은 부패시체의 사후 경과시간과 부패 관련 연구를, 송태화 경찰수사연구원 과학수사학과 교수가 뼈 손상과 법고고학을, 그리고 김나진 부산지방경찰청 과학수사 주임이 법인류학과 기상학을 담당하고 있다. 관련 데이터 처리와 통계 분석은 정수진 고려대 통계학과연구원이 맡고 있다.
사후변성학팀은 그간 실험을 통해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수사 방법을 연구해왔다. 여기서 나온 결과는 과학수사 요원들의 현장 지침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후변성학팀은 2014년 전남 순천에서 발생한 유병언 세모그룹 회장 변사사건에서도 국내 최초로 곤충을 이용해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한 바 있다.
배수로 내외부 기온 재구성
사후변성학팀은 올해 1~3월 제주도 보육교사 살인 사건의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하는 동물실험에 파견됐다. 수사팀은 우선 사건이 발생한 2009년 2월 초의 현장 온도와 기상 조건을 추정하기 위해 이동용 관측 장비를 설치하고 열흘 동안 온도, 습도, 풍속 등 모든 기상 조건을 수집했다. 이는 사후 경과시간을 정확히 추정하기 위함이다.
정확한 실험을 위해서는 사건 당시의 환경을 최대한 똑같이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신의 온도 변화는 그날의 기상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장 온도를 파악한 뒤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기상관측소의 기온 데이터를 이용하면 통계분석과 보정을 거쳐 과거의 현장 온도를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과거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기상정보를 추정하는 과정을 법기상학(forensic meteorology)이라고 한다. 실험 결과, 현장의 평균 기온은 8.332도, 배수로 내부 온도는 8.690도, 습도 72.899%, 에 초속 1.133m의 바람이 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아마도 시체는 이 환경에서 물리적인 변화를
거쳤을 것이다.
수사팀이 다음으로 집중한 건 배수로라는 특수 환경에 대한 해석이었다. 깊이 50cm의 콘크리트 구조물인 배수로 내부의 기상 조건은 어떻게 다를까? 만약 피해자가 2월 1일 실종 당시 사망해 배수로 안으로 유기됐다면, 일주일간 건조나 부패 없이 초기 시체변화만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사팀은 온도, 습도, 풍속, 풍향, 이슬점 등 배수로 내부의 기상 상황을 기록하고 시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 결과, 낮에는 배수로 내부가 바깥보다 1.77~3.13도 더 따뜻하며, 최대 12.7도 까지 온도가 높을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는 배수로의 콘크리트가 햇빛의 열을 흡수해 복사열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바깥 기온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밤에는 낮보다 내부 습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배수로는 낮에는 보온이, 밤에는 냉장이 확실한 곳이었다.
무스탕 입혔더니 직장 온도 하강 느려져
2018년 1월 29일, 현장 조사를 마친 뒤 첫 동물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의 주된 목적은 정확한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하기 위함이다. 수사팀은 직장 내부의 온도와 기온 사이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판단하고, 사후강직이 얼마나 일어나는지와 장기가 얼마나 부패하는지 실험을 통해 관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수사팀은 동물실험에 필요한 교육을 이수하고, 동물실험윤리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승인번호: KPIA-18-01).
실험은 사건 당시 상황을 재현한 뒤 온도에 따라 총 4회에 걸쳐 실시했다. 매 실험에서 2, 3일 째에는 돼지가 놓인 곳과 그 주변에 살수차를 이용해 10분간 물을 뿌렸다. 비가 내렸던 당시 기상 상황을 최대한 재현하기 위해서다.
또한, 피해자가 착용했던 의류와 유사한 니트와 무스탕 점퍼를 돼지에게 입혔다. 이후 장비를 이용해 현장의 기상 상황과 사체의 온도 변화를 관찰했다. 사체의 경우 직장과 무스탕 안 피부, 사체가 놓인 바닥 온도를 관찰했다. 실험에는 65~70kg의 집돼지(porker) 3마리와 55kg 집돼지 1마리, 그리고 10~12kg의 개(비글) 3마리를 사용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모든 동물의 직장 온도가 예상보다 느리게 하강한 것이다. 관찰을 시작한 지 24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직장 온도가 외부 기온과 같아졌다. 의복의 상태나 사망시 자세,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사후 하루가 지나면 시체의 체온은 주위 온도와 같아진다.
피부 온도는 혈액 공급이 정지되면서 사망 직후부터 감소 하지만, 직장 온도는 근육과 간에서 일어나는 여분의 대사로 인해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보통 하루 정도 걸린다. 하지만 실험 결과, 돼지의 체온 하강은 이보다 더 느렸다.
2009년 2월 8일 오후 8시 15분경(검안 당시) 피해자의 직장 온도 13도였다. 이는 천막 안 온도인 9.2도 보다 현저히 높았다. 수사팀은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했다. 첫 번째는 사체가 착용한 의류다. 피부가 태양광에 직접 노출되는 시간을 제외하면, 무스탕 안쪽 피부 온도는 노출된 피부보다 항상 높다. 두꺼운 의류 때문에 체온이 오래 유지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배수로의 콘크리트가 있다. 콘크리트는 태양광을 흡수해 복사열을 일정 시간 방출한다. 이때는 배수로 온도가 대기보다 더 높아서 직장 온도의 하강도 상대적으로 느려진 것이다. 배수로 내부 온도가 높아질 때, 무스탕 안피부 온도는 1~3시간, 직장 온도는 4~6시간 뒤 온도가 가장 증가했다. 반면 배수로 온도가 낮아지면 피부는 1~7시간, 직장은 4~6시간 뒤 온도가 감소했다.
검안 당시는 한창 햇빛을 받는 낮이 지난 지 오래되지 않은 시각, 실험 결과대로라면 사후 24시간 이후여도 직장 온도와 기온은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사후 하루가 지나면 시체의 체온이 주변과 같아진다는 기존의 기준은 의미가 없어졌다.
8일 뒤에도 시체강직 유지, 기온 낮아야 가능
이제 더 어려운 숙제가 주어졌다. 피해자의 사망시각을 더 정확하게 추정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사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동물실험에서 저녁 8시경 측정한 직장 온도가 기온보다 3.8도 이상 높게 측정된 날은 모두 5회였다. 사체를 발견한 시점이 사망 이후 며칠이 경과한 뒤였는지 분석해야했다.
수사팀은 사건 현장의 특수성과 기상 조건에 따라 사체 온도가 사후 어떻게 변화하는지 객관적이고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사체를 제주대 수의학과 동물해부실로 옮겨 직접 해부도 진행했다.
해부 전, 모든 실험동물에서 시체강직이 일어났음을 확인했다. 실험 종료 8일 뒤에도 여전히 모든 동물에서 시체강직이 유지됐다는 뜻은 실험 기간 낮은 기온 환경이 강직 시작 시기와 강직 유지 기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시체강직이 발생하는 이유는 근육 때문이다. 근육은 사망 직후에는 풀어지지만, 그 이후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굳어졌다가 부패가 시작될 때 다시 이완된다. 평균 20도 정도에서는 사후 30분 전후로 시체강직이 발생하며, 약 2~3일이면 사라진다. 그래서 시체강직은 일반적으로 부패의 시점을 확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시체강직은 온도가 낮으면 그 과정이 느리게 진행되고, 온도가 높을 때는 빠르게 나타난다. 심지어 냉동상태에서는 이 현상이 거의 무기한 지연될 수 있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겨울 철 실외에서 사망한 지 일주일 된 시체가 발견 당시에는 시체 강직이 없었다가 따뜻한 영안실로 옮긴 이후에야 시체강직이 빠르게 진행된 일도 있었다.
시체강직의 형성 및 유지 시간과 기온 간 정량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검증이 부족하다. 따라서 시체강직을 사망시각의 지표로 삼기에는 부적합했다.
남은 것은 해부팀의 몫이었다. 조심스럽게 절개해 장기를 수습했다. 모든 장기는 그 부패 정도를 관찰하고, 사진 촬영 후 현미경 검사를 위해 포르말린으로 고정했다. 일부 동물에서 가스로 인한 장 팽창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장기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패를 관찰하지는 못했다.
실종 직후 사망, 첫 확인
이렇게 모든 실험이 마무리됐다. 수사팀은 피해자의 정확한 사망시각을 찾기 위해 40일 이상 매달렸다. 배수로 안의 기상상태와 동물 사체의 변화를 집중적으로 관찰했고,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분석을 거쳤다. 수사팀이 그린 그래프와 표만 수백 개가 넘는다. 그 결과, 수사팀은 2009년 2월 1일 새벽, 피해자가 실종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2018년 4월 25일, 피해자가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된 지 9년 2개월 만에 배수로에서 꺼낸 진실이다. 동물실험을 통해 숨겨져 있던 진실을 파헤치는 이 과정은 하나의 혁신이었다. 또한 변화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금부터는 피해자의 사망시각에 맞춰 용의자를 압축하고 알리바이를 확인하며, 범행을 입증하는 수사절차가 남아있다. 수사팀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제 겨우 범죄에 희생된 억울한 죽음을 배수로 안에서 수습한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철호
전북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현재 전북지방경찰청에서 검시사무관을 맡고 있는 법곤충학 전문가다. 유병언 세모그룹 회장 변사 사건 수사에 참여해 국내 최초로 곤충을 통해 사후 경과시간을 추정했다. 순천향대, 충남대 법과학대학원, 경찰수사연수원 외래교수를 역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