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마음의 병’이라 부르는 정신 질환은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쓰이는 치료제에는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뇌의 비밀을 풀어 정신 질환의 새로운 치료법을 찾고 싶습니다.”
과학과 의학은 우리를 많은 질병에서 구해냈다. 하지만 정신 질환 등 뇌질환은 예외다. 미지의 영역이라 불릴 만큼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많다. 오용석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인지과학전공 교수가 정신 질환 극복을 위한 연구에 앞장서고 있는 이유다. 오 교수를 8월 6일 DGIST 분자정신의학연구실에서 만났다.
항우울제 효과 지연되는 이유 밝혀내
지난해 10월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가 발표한 ‘국가 정신건강현황보고서 2019’에 따르면 국내 성인남녀의 11.2%가 우울감을 경험한 적이 있고, 25.4%는 평생에 한 번 이상 정신 질환을 앓은 적이 있다. 현대인들 사이에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중독 같은 정신 질환을 겪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여타 뇌질환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을 비롯한 스트레스성 정신 질환의 발병 기전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치료에 쓸 수 있는 약도 마땅치 않다. 세로토닌과 노르아드레날린, 도파민 분비에 작용하는 약물 정도가 있다.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세로토닌계 항우울제는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해 우울증을 치료한다. 세로토닌계 항우울제를 복약하면 1시간 이내에 세로토닌이 증가한다. 하지만 우울감 개선 효과는 1개월가량 지연돼 나타난다. 이는 조기 치료가 중요한 정신 질환 환자에게 치명적인 문제다. 하지만 이들 약물이 어떻게 세포에 작용하는지, 왜 치료 효과가 지연되는지는 모른다.
오 교수는 “세로토닌계 항우울제는 병의 원인을 파악해 정확한 표적 물질을 찾은 뒤 이를 겨냥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결핵치료제 임상시험 중 우연히 항우울 효과가 발견된 것”이라며 “그렇기에 부작용과 약물저항, 효과 지연 등 단점을 개선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오 교수는 세로토닌계 항우울제의 치료 효과가 지연돼 나타나는 이유를 찾고 이를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기초단서는 이미 찾았다. 오 교수가 미국 록펠러대 분자 및 세포신경과학연구소에 재직하던 시절 세로토닌계 항우울제가 p11 단백질의 발현을 조절해 세로토닌의 분비를 높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doi: 10.1038/nrn3564 이후 DGIST에 부임하고는 세로토닌계 항우울제를 장기투여하면 p11 단백질과 함께 작용하는 복합체가 해마 모시 세포의 활성을 높이고 우울증을 완화한다는 후속 연구도 진행했다. doi: 10.1038/s41380-019-0384-6
오 교수는 “그간의 연구결과를 살펴봤을 때, 세로토닌계 항우울제에 치료지연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약물의 작용을 받는 p11 단백질이 우울증 발병 기전 중 초기 단계에 작용하기 때문”이라며 “기초 약물 기전 연구를 통해 기존 의약품이 가진 한계를 개선할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첨단 과학·공학 기술로 밝히는 뇌과학
생명체 내에서 일어나는 분자생물학적 현상들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약물에 의해 첫 번째 유전자가 조절되면 이에 영향받는 다음, 그 다음 유전자가 차례로 발현되거나 발현이 저해된다. 이런 변화가 누적되면 세포의 활성이나 연결성 등이 변하고 이것이 질병 같은 생물학적 현상으로 보인다. 만약 이 전체과정을 모두 밝히고 마지막 단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한다면 지연 없이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해서는 첨단 염기서열 분석 기술을 통한 유전체학과 더불어 분자생물학, 행동학 등의 연구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오 교수는 “현재는 DGIST의 다른 연구자, 한국뇌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과 함께 치료 효과를 빠르게 낼 수 있는 약물 표적 후보군을 추려 우울증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확인하고 있다”며 “지금은 영장류를 대상으로 전임상시험을 하고 있고, 추후 임상시험을 거쳐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약물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뇌공학자들과 공동연구도 하고 있다. 뇌공학은 뇌 활성도를 실시간 분석하도록 돕는 등 뇌 연구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이크로 로봇을 이용한 약물전달 기술이나 신경전달물질을 실시간으로 조절하는 기술은 정신 질환을 개선하거나 치료하고, 관련 기초연구를 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 오 교수는 “최근 정신 질환에 대한 탄탄한 기초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정신 질환 치료 기술 분야의 혁신을 이끌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