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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한국 과학자들이 기억하는 호킹

 

스티븐 호킹 박사는 연구뿐만 아니라 용기와 끈기,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다. 학회에서, 또는 책과 강연 등을 통해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와 만났던 기억을 마음속에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2000년 여름 그의 방한을 기획한 한국 과학자의 기억을 통해 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고 했던 그의 모습을 되살려봤다.

 

 

“우주의 시작은 무경계(No-boundary)의 경계다.”


그가 말문을 열자 서울대 문화관에 모인 900명의 청중들은 숨을 죽인 채 집중했다. 2000년 여름, 1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호킹 박사는 1990년 가을과 2000년 여름 두 차례 한국을 찾았다. 2000년에는 9월 4~8일 개최되는 ‘COSMO 2000’ 학회에 참석하는 것이 목적 이었다. COSMO 학회의 정식 명칭은 ‘입자물리와 초기우주에 관한 국제학술대회(International Workshop on Particle Physics and Early Universe)’로, 1997년부터 매년 전 세계 회원국에서 차례로 열리고 있었다. 2000년 학회는 서울대와 고등과학원이 주관했다. 유명한 호킹 박사를 한국에도 소개하기 위해 호킹의 지인까지 동원해 그를 섭외했다.

 

 

답변까지 10분, 느리지만 성실히 답해


호킹 박사는 청와대 본관 응접실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30분 이상 환담을 한 뒤 학회 장소로 가기 전, 서울대 문화관에서 대중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무경계’. 쉽게 말해 우주의 시작이 기하학적으로 구의 표면과 같다는 것이다. ‘2500년 지구의 인구가 얼마나 될까’ 하는 대중적인 내용도 있었다. 그는 지구가 사람으로 꽉 차서 육지 1m2 당 사람 한 명이 서 있는 그림을 보여줬다. 산술적인 계산을 한 것이었지만 재치 넘치는 그림이었다.

 

그는 이후 서울 홍릉 소재 고등과학원에서 열리는 콜로키움에 참석했고, 삼성전자에서 대중 강연도 열었다. 가는 곳마다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렸다. 그 인기는 웬만한 노벨물리학상수상자도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건강한 사람도 물리학 이론을 발견하기 힘든데, 생존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불치병 환자가 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호킹 박사의 말을 알아듣거나 그와 의사소통하기가 매우 어렵다. 루게릭병 증상이 점점 악화돼, 말년 20여 년은 휠체어의 컴퓨터를 작동시켜 대화해야했기 때문이다. 그의 휠체어에는 컴퓨터와 음성 합성기가 설치돼 있었다. 그가 손가락 한두 개를 아주 느리게 움직여 말하고자 하는 단어를 선택하면 음성 합성기가 목소리로 변환했다(그는 이후 뺨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센서로 단어를 선택하는 업그레이드 버전을 썼다).

 

 

2000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그와의 대화는 상당한 인내를 요했다. 기계의 도움을 받더라도 질문을 하면 대답이 오기까지 10분이 걸렸다. 그것도 긴 문장이 아니라 “네가 졌다(You lose)” 같은 아주 간결한 단어였다. 아마도 호킹의 지도를 받는 학생들만 경험이 쌓여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킹의 답변은 대부분 ‘예(Yes)’나 ‘아니오(No)’ 였지만, 그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려고 했다.

 

‘COSMO 2000’ 학회는 제주도에서 열렸다. 그를 초대한 입장에서 가장 큰 고민은 ‘휠체어를 타는 그와 함께 어떻게 제주도까지 이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일단 비행기 선택부터 쉽지 않았다. 대한항공의 일부 기종, 그것도 1등석만 가능했다. 학회장까지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다. 당시에 출시돼 있던 승합차에는 그의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현대자동차의 2000년 신형 모델이 내부 공간이 크게 제작됐다는 얘기를 듣고 협찬을 받았다. 비록 호킹이 많이 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제주대병원 응급실에 있는 구급차를 더 유용하게 썼다.

 

빡빡한 일정에 따라 서울과 제주를 오가면서도 그는 에너지를 잃지 않았다. 영국대사관에 방문하기도 하고, 각종 만찬에도 참석했다. 나는 그에게 창덕궁의 ‘불로문(不老門)’을 통과할 것을 추천했다. 비록 명칭이지만 늙지 않는다는 뜻이니까(호킹은 그밖의 일정으로 간병해주는 간호사와 함께 제주도에 있는 카지노도 구경했다고 한다).

 

 

행운을 기회로 만든 과학자

 

호킹이 지도한 학생 중 한국인 제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인생은 많은 동료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물리학자들이 기억하는 호킹의 가장 큰 업적은 블랙홀이 입자를 내놓는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다.

 

호킹 박사는 1990년과 2000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1990년 방한 당시 대중 강연을 하는 모습.

 

 

이 내용은 1974년 ‘네이처’에 반 페이지 정도로 소개됐는데,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부터 나오는 빛이라니! 이 얼마나 새로운 이론인가. 블랙홀을 일반상대론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한 사람은 1939년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하트랜드 스나이더였고, 그 뒤를 이어 로저 펜로즈, 베르너 이스라엘, 야코브 베켄스타인 등도 연구를 했지만 오늘날에는 ‘호킹=블랙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호킹이 애초에 이걸 목적으로 삼고 연구를 시작했던 것 같지는 않다. 호킹이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 입학할 때 지도교수로 당시 유명했던 우주론 학자 프레드 호일을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례다. 프레드 호일은 ‘정상 우주론’을 주장한 학자고, 알다시피 현재 대부분의 우주론 학자들은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학자에게 행운은 알맞은 지도교수를 택하는 것으로부터 찾아온다. 나는 그가 이런 우연한 행운을 대단한 기회로 만들었다는 점을 매우 높게 산다. 그의 아이디어는 기발했다. 펜로즈의 블랙홀 특이점은 태초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방향을 (+)로 보는 것이었다. 호킹은 이 시간의 방향을 (-)로 돌려 보면 우주 초기가 되고, 우주 초기의 특이점을 알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우주가 어떻게 창조됐는지 알고 싶어 하던 호킹은 2010년 돌연 “신(神)은 없다”는 선언을 했다. 저서 ‘위대한 설계’를 통해 “현대물리학은 우주 창조에서 신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고 한 것을 두고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런 그가 아이작 뉴턴의 동상과 폴 디랙의 무덤이 있는 영국 테임즈 강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다는 소식은 실로 놀랍다. 신을 부정하는 과학자의 유해가 사원에 안치된 사례는 그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세상에서 편히 영면하길 기원한다.

 

 

김진의_jihnekim@gmail.com
1980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해 2011년 퇴임할 때까지 30여 년 간 교편을 잡았다. 1998~1999년에 고등과학원 교수, 2010~2013년에는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2013년부터는 경희대 물리학과 석좌교수로 있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Intro. 호킹, 별이 되어 떠나다

Part 1. 호킹의 말로 되돌아 본 그의 삶

Part 2. 한국 과학자들이 기억하는 호킹

Part 3. 호킹이 남긴 21세기 이론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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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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