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은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연구한 이론물리학자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우주의 시공간이 빅뱅으로 탄생해서 블랙홀로 사라진다는 이론을 폈다. 또 이 이야기를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라는 책으로 펴내 대중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호킹의 일대기를 그가 남긴 말들을 통해 되돌아봤다.
"나의 학업태도는 매우 어수선했고 필기는 선생들을 절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학우들은 나에게 아인슈타인이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내가 걸린 병(病)의 한 가지 효과는 이 모든 태도를 바꿔놓은 것이다"
호킹은 1942년 1월 8일, 현대 물리학의 창시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정확히 300년이 되는 날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공교롭게도 그의 사망일 3월 14일은 아인슈타인의 생일이다). 호킹의 아버지는 열대 풍토병 연구에 매진하는 의사였고, 어머니 역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를 졸업했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집안 분위기는 지적이고 학문적이었다.
그러나 부유하지는 못했다. 호킹의 부모님은 그를 영국의 명문 퍼블릭 스쿨(사립 중고등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보내고 싶어 했지만 장학금 없이는 보낼 수 없는 처지였다. 호킹은 학비가 낮은 ‘세인트 올번스 스쿨’에 진학했다. 성적은 학급에서 중간 이하였으나 친구들은 왜인지 그를 ‘아인슈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학교 졸업을 2년 앞두고 호킹은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화학을 전공하면서 수학은 아주 조금만 공부하길 원했다. 그는 실제로 세인트 올번스 스쿨을 졸업한 뒤 공식적으로 수학을 한 번도 배우지 않았다(그럼에도 2009년 9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30년 동안 명문 케임브리지대의 루카스 수학교수를 역임했다).
호킹은 1959년 3월 옥스퍼드대의 자연과학 전공 장학생으로 선발된다. 당시 옥스퍼드는 학업을 적대시하는 분위기였다. 노력하지 않고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천재’만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아주 쉬운 물리학 과정을 밟으며 3년 동안 약 1000시간을 공부했다. 하루에 한 시간 꼴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찾아온 질병은 그의 삶을 의욕적으로 바꾼다. 1963년 초 대학원 진학을 위해 케임브리지로 막 이사 온 21세의 호킹은 ‘루게릭 병’으로 불리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진단을 받는다. 3명 중 1명은 1년 이내에, 절반 이상이 2년 이내에 사망한다고 알려진 병이다.
그래도 절망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인 제인 와일드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목표로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1965년 7월 결혼에 골인했다(제인은 1995년 이혼하기 전까지 30년 동안 호킹의 곁을 지켰다). 연구에도 더 매진하게 됐다. 호킹은 훗날 자서전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에서 “나의 장애는 나의 과학 연구에서 심각한 걸림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장점이었던 것도 같다”고 밝혔다.
"나는 기본입자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은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
만약 기본입자를 택했더라면, 그 시절 나의 연구는 지금 모조리 폐기됐을 것이다"
1962년 10월 호킹은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당대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정상 우주론’의 옹호자였던 프레드 호일의 연구실에 들어가길 원했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데니스 시아마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교수의 제자가 됐다.
당시 그가 관심을 갖던 분야는 ‘우주론’과 ‘기본입자물리학’이었다. 기본입자물리학 분야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는 반면, 우주론 분야는 아이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이후로 답보 상태였다. 그는 우주론과 중력이론이 등한시되지만 발전할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 초 우주론의 가장 큰 질문은 ‘우주의 시초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의 시초가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물질이 창조돼 우주의 평균 밀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정상 우주론’을 주장했다.
그러던 1965년 마이크로파 배경복사가 발견됐다. 마이크로파 배경복사는 우주가 과거에 뜨겁고 조밀한 단계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호킹은 우주가 수축하는 단계가 있었고, 그러다 어떤 높은 밀도에 이르러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호킹이 주목했던 건 이론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가 증명한 특이점(singularity) 이론이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무거운 별은 핵연료가 소진되면서 수축한다.펜로즈는 이런 별들이 무한대의 밀도를 갖는 특이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수축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별이 특정 반지름까지 수축하면 공간과 시간이 끝나는 지점(특이점)이 발생함을 증명했다.
호킹은 이를 우주의 팽창에 적용했다. 우주가 팽창하기 전 초기에도 밀도가 무한이었던 특이점, 즉 빅뱅 시점이 반드시 있어야함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후 5년 동안, 로저 펜로즈, 보브 게로치, 그리고 나는 일반상대성이론 내 인과구조에 관한 이론을 개발했다. 한 분야를 사실상 우리가 독차지하는 기분은 정말 멋졌다”며 호킹은 당시의 성과를 자서전에서 회상했다. 호킹은 연구의 일부를 1966년 박사학위논문으로 펴내 대학에서 애덤스 상을 받았다.
"이론물리학자는 단 한나절에도, 내 경우를 보면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동안에도 대단한 발상에 이를 수 있다"
호킹은 이론물리학을 연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한 예로 1969년 당시 미국 메릴랜드대 조지프 웨버는 알루미늄관을 안테나로 사용해 중력파를 포착했다고 주장했다. 호킹은 웨버의 놀라운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지도학생과 함께 중력파 분출 탐지의 이론을 논문으로 쓰기도 했다. 그는 더 민감한 탐지기를 설계해야한다고 제안하며 실험 장소를 물색하고 다녔다.
하지만 경쟁팀이 있는 걸 보고 포기했다. 이런 판단에는 장애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 실험물리학자로 일하기 힘들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실험물리학을 하기 위해서는 흔히 대규모 팀에 속해 몇 년 동안 실험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두발로 갈 수 없는 우주를 머릿속으로 탐구하는 이론물리학자는 그에게 딱 맞는 직업이었다.
"블랙홀에 대한 나의 연구는 1970년에 불쑥 찾아온 깨달음으로 시작됐다.
나는 내가 특이점 정리들을 위해 개발한 인과구조이론을
블랙홀에 적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특이점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대단한 성공을 거둔 호킹은, 다음 단계로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의 결합에 도전했다. 시공간의 창조와 소멸 등 거시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상대성이론과 미시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이론을 모순 없이 도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랙홀은 그가 발견한 특수한 연구 장소였다. 거대한 질량이 모두 특이점에 몰려있어서 상대론이 중요해지는 동시에, 특이점의 부피가 0이기 때문에 양자역학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호킹은 양자이론이 지배하는 입자들과장(field)들이 블랙홀 근처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계산했다.
그 결과 1974년 빛을 포함한 모든 물질을 빨아들인다고 알려진 블랙홀이 입자를 방출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이론을 얻어냈다. 양자역학적 효과 때문에 블랙홀 주변의 진공 상태에서 입자와 반입자 쌍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듭하고, 이러한 요동으로 블랙홀이 입자를 내뿜으며 질량과 에너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오늘날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라고 불리는 이 이론을 통해 호킹은 블랙홀에서 에너지가 방출되며, 끝내는 증발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호킹은 이런 이론을 2004년과 2014년 두 번이나 수정했다. 앞서 블랙홀 이론에서 정보(입자 등)가 블랙홀 속 특이점으로 빨려 들어가 그 속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가정한 것이 양자역학적 기본 원칙과 모순이라는 반론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자들 사이에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고 아직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후대 과학자들이 그의 뒤를 이어 현대물리학의 양 축을 결합한 ‘만물의 이론(The Theory of Everything)’을 찾아 나가는 중이다(자세한 내용은 3파트 참조).
호킹은 치열한 연구 경쟁 속에서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았다. 우주론 가설의 결론을 두고 내기를 하는가 하면 2013년 자서전을 통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의 이론물리학자들은 블랙홀에서 양자 방출이 일어난다는 나의 예측이 옮음을 인정할 것이다. 비록 그 방출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내가 아직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시공의 배경에서 일어나는 양자요동은 미시 규모의 웜홀과
시간여행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물체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호킹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연구해온 역사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야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88년 대중서인 ‘시간의 역사’를 출간했다. ‘시간의 역사’는 40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 1000만 권 넘게 팔렸다. 하지만 어려운 내용 탓인지 오늘 날 출판계에는 ‘호킹 지수’라는 지표가 있다. 책의 전체 페이지를 100페이지라고 가정할 때 실제 읽은 페이지를 나타내는 숫자로, ‘시간의 역사’를 실제로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어졌다(참고로 ‘시간의 역사’의 호킹 지수는 6.6이다). ‘시간의 역사’에는 그의 질병에 대한 언급이 두 세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서전에서 “책에서 다루고자 한 것은 우주의 역사지, 나의 역사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블랙홀과 아기 우주’ ‘호두껍질 속의 우주’ ‘위대한 설계’ 등 대중서를 계속해서 펴냈다.
스타트렉이나 심슨가족 같은 유명 영화와 인기 미드 ‘빅뱅 이론’에 깜짝 출연하는가 하면, 컴퓨터 음성장치를 이용해 강연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그는 타임머신, 신의 존재, 인공지능(AI) 등 일반인이 관심을 가질 주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곤 했다. 그는 시공간의 양자 상태에 따른 시간여행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간여행이) 물리학자들이 비웃음이나 조롱을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 설령 불가능하다고 밝혀 지더라도 왜 불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무언가를 보탰다면, 나는 행복하다.” 호킹은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을 이다지도 담백하게 끝냈다. 확실한 건 호킹이 남긴 유산은 그가 생각한 ‘무언가’보다는 훨씬 클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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