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으로 매운 떡볶이 4단계 도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2단계도 맵다며 고전하지만, 평소 매운맛을 즐기는 기자는 ‘매운맛 고수’만 가능하다는 4단계를 먹어보기로 했다. 김이 폴폴 나는 떡을 입에 넣는 순간, 매운맛인지 뜨거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고통이 쏟아졌다. 얼얼해진 혀를 둥글게 말고 겨우 떡을 씹어 삼켰다. 고통도 잠시, 한 번 더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미각수용체 대신 감각수용체에 들러붙어
매운맛은 고추나 마늘, 양파, 고추냉이, 페퍼민트(박하), 겨자 등 식물에 많다. 식물이 내는 매운맛은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내뿜는 물질이다. 사람이나 동물은 갑자기 환경이 나빠지면 더 좋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땅에 붙어 있는 식물은 항산화물질을 분비해 환경에 적응한다. 토마토의 붉은빛을 내는 ‘라이코펜’이나 블루베리의 푸른빛을 내는 ‘안토시아닌’ 등 항산화물질을 색소로 보유한 식물도 있지만, 고추나 마늘은 항산화물질로 매운맛을 쓰는 셈이다.
맛은 과학적으로 ‘맛 분자가 혀에 있는 맛봉오리에 붙어 미각수용체를 자극한 뒤 신경계를 통해 대뇌에 맛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단맛과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 등 다섯 가지만 맛으로 인정받는다.
이와 달리 매운맛 분자는 혀에서 온도나 통증을 느끼는 감각수용체에 들러붙는다. 그러면 전기신호가 신경계를 거쳐 대뇌까지 전달되고 급격한 온도 변화나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혀가 뜨겁거나 차갑거나, 아프다고 느끼는 상태가 매운맛의 과학적 정의인 셈이다.
매운맛을 내는 분자는 식물마다 다르다. 고추에 든 캡사이신, 후추 속 피페린, 생강 속 진저롤 등은 화끈한 매운맛을 낸다. 이 분자들은 비휘발성으로 물에 잘 녹지 않는다. 물을 연거푸 마셔도 매운맛이 혀에 달라붙은 듯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끈한 매운맛의 대명사인 ‘캡사이신’은 혀에서 열과 압력을 감지하는 수용체 ‘TRPV1’에 붙는다. 이후 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 약 43도 이상의 뜨거움과 통증을 만든다. 사람은 TRPV1이 활성화하기 시작하는 온도인 약 27도보다 높으면 따뜻하게, 이보다 낮으면 차갑다고 느낀다. 또한 캡사이신이 든 음식을 약 43도 이상으로 데우면 온도에 비례해 더 맵게 느낀다.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포유류가 TRPV1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매운맛 분자를 가진 식물을 주식으로 삼지 못한다. 하지만 태국 앵무, 카나리아 등 일부 조류는 열과 압력을 감지하는 수용체의 구조가 TRPV1과 다르다. 고추를 먹으면 달게 느낀다.
한국식품연구원에서 고추를 연구하는 권대영 책임연구원은 “이런 새들은 고추를 열매처럼 먹는다”며 “멀리까지 날아가 배설하면서 씨앗을 퍼뜨리기 때문에 고추 입장에서는 영리하게 진화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반대로 차가움을 느끼게 해 얼얼하게 매운맛을 내는 성분도 있다. 계피 속 ‘신남알데히드’의 경우 ‘TRPA1’이라는 감각수용체에 붙는다. 이 수용체가 활성화되면 약 16도 이하의 차가움과 통증을 느낀다. 겨자씨나 고추냉이 뿌리에 든 ‘아이소타이오사이안산알릴’, 마늘과 양파의 ‘알리신’은 TRPV1과 TRPA1, 두 수용체에 모두 붙는다. 그래서 톡 쏘는 차가운 맛과 혀가 얼얼해지는 매운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들 성분은 식물 자체에서는 매운맛을 내지 않는다. 포도당과 붙은 배당체(유기화합물이 당과 붙어 있는 형태)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고추냉이의 아이소타이오사이안산알릴은 배당체인 ‘시니그린’으로 들어 있다.
하지만 뿌리를 갈면 조직이 부서지면서 세포 내 소포체에 갇혀 있던 티오글루코시드 가수분해 효소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당이 떨어져 나가면서 톡 쏘는 매운맛 분자인 아이소타이오사이안산알릴로 변한다. 이 분자는 휘발성이어서 캡사이신 등 비휘발성 분자에 비해 매운맛이 빨리 사라진다. 고추냉이를 넣은 초밥이 눈물을 찔끔 나게 할 만큼 매우면서도 금세 매운맛이 사라지는 이유다.
박하를 먹었을 때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청량한 매운맛은 ‘멘톨’ 분자가 열감지수용체인 ‘TRPM8’에 붙기 때문이다. 이 수용체가 활성화되면 약 26도 이하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압력을 감지하는 수용체가 아니어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멘톨 분자는 마늘이나 고추냉이를 먹었을 때 활성화하는 TRPA1에도 붙는다. 그래서 박하를 먹으면 마늘이나 고추냉이 보다 훨씬 시원하게 느껴진다. 또 멘톨 분자가 물에 잘 녹지 않아 청량감이 오래간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페퍼X’
한국인에게 매운맛은 스트레스 해소법이자 일종의 ‘자존심’이다. 하지만 사실 한국 고추는 매운맛으로 따지자면 전 세계 100여 종 가운데 15등 안에도 들지 못한다. 청양고추도 마찬가지다. 이보다 캡사이신이 훨씬 풍부한 품종이 많기 때문이다.
2013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 1위는 ‘악령고추’라는 별명이 붙은 ‘부트 졸로키아’였다. 이 고추는 매운 정도를 나타내는 스코빌 척도가 85만~100만SHU다. 청양고추가 2000~1만SHU이니, 이보다 100배 더 매운 셈이다.
과학자들은 부트 졸로키아의 품종을 개량해 폭탄처럼 매운 고추를 개발했다. 2013년 12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와 퍼커버트 페퍼 컴퍼니가 개발한 ‘캐롤라이나 리퍼’는 스코빌 척도가 156만~220만SHU로, 시뻘건 색깔처럼 불타오르는 듯한 맛을 낸다.
지난해에는 약 318만SHU나 되는 신품종 ‘페퍼X’도 개발됐다. 이 고추는 피망처럼 생긴데다, 심지어 초록색을 띠고 있어 매우 순하게 보이지만 청양고추보다 300배 이상 맵다. 만지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수 있어 묽게 희석한 핫소스(The Last Dab)로만 판매된다.
세계적으로 매운맛 순위에 올라간 부트 졸로키아, 캐롤리나 리퍼 등은 고추 중에서도 ‘카프시쿰 치넨세(Capsicum chinense)’ 품종에 속한다. 한국 고추는 남미의 할라피뇨, 이탈리아의 페퍼론치니와 함께 ‘카프시쿰 아눔(Capsicum annuum)’에 속한다.
한국 고추, 47만 년 전 탄생
지난해 9월 권대영 책임연구원이 이끄는 연구팀은 세계 고추 품종을 유전적으로 분석해 품종 간 계통적 관계를 알아내는 한편, 한국고추가 언제 어떤 경로로 유래했는지 결정적인 증거를 확인해 국제학술지 ‘전통음식저널(Journal of Ethnic Foods)’에 발표했다.
그간 국내에는 임진왜란(1592년) 때 일본에서 한반도로 고추가 넘어왔다고 알려져 있었다. 1980년대 이성우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뒤 중남미 식물인 고추를 유럽으로 가져갔고, 이후 100년간 인도와 중국, 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주장한 내용이 시초가 됐다.
하지만 권 책임연구원은 태조 이성계의 일화에 순창고추장이 등장하고, 고려 후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나 이수광이 1614년에 펴낸 ‘지봉유설’ 등 옛 문헌에 고추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국 고추의 기원을 다시 추적했다.
담배처럼 품종이 1~2개로 다양성이 작은 작물이라면 임진왜란이 들어맞는다. 권 책임연구원은 “고추는 아시아에만 수백 종이 넘고, 달달한 품종부터 아주 매운 품종까지 다양하다”며 “육종 기술이 없었던 과거에 단일 품종이 이렇게 다양한 품종으로 분화하기 위해서는 수십~수백 만 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남미의 ‘아히’와 ‘할라피뇨’, ‘태국의 ‘남만초’, 인도의 ‘번초’ 등 세계 각지의 고추품종과 한국 고추를 유전적으로 분석해 계통학적으로 얼마나 가까운지 분석했다. 또 화석에 남아 있는 고대 고추의 유전체도 분석해 품종 간 분화 지도를 그렸다.
그 결과 약 1500만 년 전 고대 고추가 아히가 속한 카프시쿰 바카툼(Capsicum baccatum)과 부트 졸로키아가 속한 카프시쿰 치넨세로 분화했고, 약 47만 년 전 카프시쿰 아눔으로 분화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doi:10.1016/j.jef.2017.08.010
권 책임연구원은 “500여 년 전 중남미의 매운 고추가 유럽에 넘어간 뒤, 아시아에 전파돼 100년 뒤 한국 고추가 됐다는 주장이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며 “오히려 수천 만 년 전 야생고추가 새를 통해 여기저기 전파된 뒤,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해 다양하게 진화했다고 해석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