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시험 점수보다 더 긴장되는 ‘성적표’를 받게 된다. 바로 건강검진 결과다. 수많은 항목 중 가장 다양한 결과가 표시된 부분은 혈액 검사다. 최근에는 혈액 검사 기술이 진화해 혈액 한 방울로 암부터 치매까지 진단할 뿐만 아니라, 암의 전이나 치료에 적합한 약물까지 알려준다.
단백질, DNA, RNA 모두 ‘바이오마커’
혈액 검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혈액 속 바이오마커(biomar ker·생체지표)다. 혈액에서 바이오마커를 확인해 질병을 진단하고 예측한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바이오마커를 ‘정상적인 생물학적 과정, 질병 진행 상황, 그리고 치료 방법에 대한 약물의 반응성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지표’라고 정의하고 있다.
쉽게 말해 체내 대사물질이나 단백질, DNA, RNA 등 몸 안의 변화를 알아낼 수 있는 지표는 모두 바이오마커로 보면 된다. 일반 혈액 검사에 포함되는 혈당이나 혈중콜레스테롤, 갑상선호르몬도 모두 바이오마커다.
질병의 종류와 진행 정도에 따라 바이오마커의 종류와 농도가 다르기 때문에 혈액이나 소변 등 체액 속 바이오마커를 분석하면 질병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다.
실제 임상에서 사용하는 바이오마커는 몇 가지 자격을 갖춰야 한다. 민감하고 특이적으로 질병을 감별해야 하고, 간단하고 신속하게 측정할 수 있어야 된다. 또 바이오마커를 이용해 치료를 조절하고, 치료 효과도 예측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혈액에서 바이오마커로 질병을 진단하는 방법은 임신 테스트기와 동일한 원리다. 혈액을 채취한 뒤에 바이오센서가 탑재된 진단키트에 혈액을 떨어뜨린다. 바이오센서에는 바이오마커와 결합하는 특이적인 항체가 있다. 이 항체가 혈액 속 바이오마커와 결합할 때 발생하는 광학적 신호나 전기적, 화학적 신호를 측정하면 바이오마커의 양을 측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혈액으로 8종 암 조기 진단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마커 활용 분야는 암 진단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체액 속 바이오마커로 암을 진단하는 기술관련 출원은 2007년 59건에서 2016년 308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최근 10년간 암 종류별 바이오마커 진단 관련 출원 수는 폐암(406건), 유방암(386건), 대장암(277건), 위암(270건), 간암(259건), 전립선암(255건) 순이다. 이미 폐암과 간암, 위암, 대장암, 전립선암, 유방암, 난소암, 췌장암 등 8개 암은 병원에서 혈액 검사로 고위험군을 진단하고 있다.
기존 암 검사는 내시경이나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등 촬영 장비를 이용해 일차적으로 진단하고, 암이 의심되는 세포 조직을 떼어내 확진(조직 생검)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방식은 검사 비용이 비싸고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경우도 있다. 암세포가 너무 작아 촬영이나 조직 검사에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한 덩어리의 암 조직이라고 해도 각 부분마다 유전자가 다른 암세포가 섞여 있기도 한다.
암세포에서 떨어져 나온 혈액 속 바이오마커를 이용하면 암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 가령 전립선암의 경우 전립선 특이항원(PSA·Prostate-Specific Antigen) 검사가 있다. PSA는 전립선의 상피세포에서 합성되는 단백질 분해효소로, 전립선암이 진행되면 혈액 내 농도가 높아진다. PSA는 1969년 미국의 병리학자 리처드 애블린 박사가 처음 찾아냈다.
전립선암 여부를 판별하는 PSA 수치는 1mL당 4ng(나노그램·1ng은 10억 분의 1g)이다. PSA 수치가 이보다 높으면 초음파검사나 전립선 조직 생검을 받는 게 좋다. 비뇨기과에서 1만~2만 원이면 간단히 검사 받을 수 있다.
김철우 바이오인프라생명과학 대표(서울대 의대 병리과 명예교수)는 “PSA 검사의 민감도(질병을 얼마나 잘 찾아내는지 정도)가 낮아 효과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PSA 외에도 전립선암과 관련된 바이오마커를 중복 확인하고, 빅데이터 분석을 활용하는 등 검사 기법의 발전으로 민감도와 정확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췌장암처럼 초기에 증상이 없어 병이 발견됐을 때는 이미 치료 적기를 놓치기 쉬운 질병을 진단하는 데 혈액을 이용한 암 검사가 특히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뇌 속 베타아밀로이드 간단 확인 키트 개발
최근에는 증상이 없는 정상인의 알츠하이머병 발병 여부를 혈액으로 예측하는 기술도 개발됐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의 대표적인 원인 질환으로 전체 치매의 약 70%를 차지한다. 알츠하이머 병의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과도하게 축적돼 뇌에 침착하면서 뇌 세포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 핵심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베타아밀로이드가 침착되면 신경세포가 점차 손상되면서 인지 기능이 저하된다.
묵인희 서울대 의대 생화학교실 교수와 이동영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공동연구팀은 혈액으로 뇌의 베타아밀로이드 침착을 예측할 수 있는 키트를 개발하고 지난해 2월 국제학술지 ‘알츠하이머 앤드 테라피’에 공개했다.
연구팀은 뇌의 베타아밀로이드 침착과 관련 있는 혈액 내 바이오마커 8종(단백질 4종, 혈액인자 4종)을 발굴했다. 혈중 베타아밀로이드 농도에 신규 단백질 바이오마커 4종과 혈액인자 4종을 이용하면 베타아밀로이드 농도만 이용할 때의 정확도(73%) 보다 월등히 높은 정확도(91%)로 알츠하이머를 진단할 수 있다.
특히 혈액 내 존재하는 베타아밀로이드 농도를 안정화시키는 전처리 방식도 개발해 정확도를 높였다. 혈중 베타아밀로이드는 혈액 속 분해효소에 의해 분해된다. 그래서 혈액을 채취한 뒤 시간이 지나면 베타아밀로이드 농도가 점차 낮아져 검사 정확도가 떨어진다. 연구팀은 혈액을 채취하자마자 단백질분해효소와 인산화분해효소 억제 혼합 물질(MPP)로 전처리해 베타아밀로이드의 분해를 막았다.
기존의 알츠하이머병 진단은 뇌 아밀로이드 양전자단층촬영(PET)으로 확인했다. 정확도가 100%에 이를 정도로 높고, 뇌 안의 베타아밀로이드를 확인할 수 있지만 검사비용이 150만~200만 원으로 비싼 편이어서 알츠하이머병 조기 진단에 어려움이 많았다.
묵 교수는 “이번에 개발한 기술은 증상이 전혀 없는 정상인에서도 알츠하이머병 발병 여부를 진단할 수 있다”며 “미리 진단하면 치매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기 치료로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를 훨씬 늦출 수 있다”고 밝혔다.
혈액으로 알츠하이머병을 진단하는 기술은 치료제 개발도 앞당길 수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임상3상에 있는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는 22종이다. 알츠하이머병 임상시험 실패의 원인 중에는 실험 대상에 알츠하이머병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치매에 걸린 환자가 섞여 있다는 점이 꾸준히 지적돼왔다.
묵 교수는 “이번에 개발된 진단 키트는 저렴한 가격으로 뇌 안의 베타아밀로이드 베타 침착을 확인해 임상시험 대상군을 선별할 아밀로이드 수 있어 시험의 성공 확률을 크게 높일 수 있다”며 “앞으로 바이오마커의 진단 결과에 따라 병의 진행 양상과 약물의 효능까지도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 환자 맞춤치료에 활용 가능토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진단 키트는 사용 승인까지 2~3년 정도 걸릴 전망이다.
‘cff DNA’로 태아 염색체 이상 확인
※ cff DNA Cell-free fetal DNA. 산모의 혈액에 존재하는 태아의 DNA로 태반의 영양막 세포사멸로 생긴다.
산모의 혈액으로 태아의 질병을 진단하는 기법도 있다. 태아의 염색체 이상을 선별하는 비침습적 산전검사(NIPT)다. 이를 통해 태아의 다운증후군(21번 염색체 3개), 에드워드증후군(18번 염색체 3개), 파타우증후군(13번 염색체 3개)을 예측할 수 있다.
세 질환은 산모의 연령이 높을수록 발병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계청의 2015년 출생 통계를 보면 35세 이상 산모의 비중은 23.9%로 산모 4명 중 한 명꼴이다.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35세 이상 산모는 태아 유전자 검사를 권유받는다. 이전에는 태아의 유전자 검사를 위해 양수검사나 융모막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양수검사는 산모의 복부에 긴 바늘을 찔러 양수를 얻어 여기에 들어 있는 태아의 세포에서 염색체를 확인한다. 융모막검사는 주사로 채취한 융모막의 염색체를 검사한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검사에 고통이 따르고 유산이나 합병증(약 0.2%) 위험이 있다.
NIPT는 산모의 혈액 속에 있는 태아의 DNA를 이용한다. 산모의 태반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영양막세포의 일부분이 혈액으로 들어오는데, 여기에 태아와 동일한 ‘cff DNA’가 포함돼 있다. 이 cff DNA를 분석하면 태아의 염색체 이상 세 가지를 99% 이상의 정확도로 확인할 수 있다.
또 임신 10주 이상이면 검사가 가능하고 7~10일 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임신 15주부터 가능한 통합선별검사 등에 비해 태아의 염색체 이상을 빨리 알아낼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NIPT 검사 비용이 30만~60만 원으로 비싸고, 태아의 유전적 질환이 의심된다는 결과가 나왔을 경우 양수검사나 융모막검사를 추가로 실시해야 한다.
양정인 아주대 의대 산부인과교실 교수는 “조기 진통이나 태아가 발육부진인 경우 cff DNA의 양이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어, 이를 바이오마커로 활용해 산모와 태아의 건강 상태를 예측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자점 나노입자로 ‘형광 바이오마커’ 개발
바이오마커로 더 많은 질병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바이오마커의 발굴과 함께 이를 분리하고 측정하는 기술의 발전도 매우 129중요하다. 조윤경 UNIST 생명과학부 교수팀은 혈액에서 순환종양세포(CTC·Circulating Tumor Cells)를 효과적으로 분리해내는 기술을 개발했다. 암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핏속을 떠다니던 CTC가 다른 조직에 부착해 자라면 전이암이 발생한다. 이 세포를 미리 찾아내면 전이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지만, 혈액 1cc 속 CTC는 수십 개 미만으로 매우 적어 검출이 어렵다. 같은 양의 혈액 속에 적혈구는 수십억 개, 백혈구는 수백만 개다.
기존에는 CTC를 검출하기 위해 혈액에 복잡한 전처리를 해야 하고, 비싼 시료도 필요했다. 또 CTC 표면에 있는 단백질을 이용하는 방식은 정확도에서 한계가 있었다. 필터로 CTC를 걸러내는 기술도 있지만 필터가 자주 막혀 분리 효율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었다.
연구팀은 수mL의 혈액에서 1분 내에 CTC를 포획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쉽게 말해 ‘랩온어디스크(Lab on a disk)’에 마이크로 필터를 붙여 크기에 따라 세포를 분리하는 방식이다. 랩온어디스크는 실험실을 손바닥만한 디스크에 옮겨 놨다는 뜻이다.
랩온어디스크에 혈액을 넣은 뒤, 구동장치에 넣고 회전시키면 원심력에 의해 크기가 작은 혈구세포가 필터 아래쪽으로 빠져나가고 CTC만 남는다. 랩온어디스크 중앙에는 필터가 들어있는데, 필터 아래쪽에는 항상 물이 채워져 있다. 덕분에 혈액이 필터 전면에서 고르게 걸러지면서 필터를 막지 않고, CTC 손상도 줄어든다.
연구팀은 이런 방식으로 암환자 142명과 정상인 50명의 혈액을 검사해 95% 이상 CTC를 검출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폐암환자의 혈액에서 분리한 CTC의 유전자와 조직 생검에서 검출한 유전자가 동일하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는 검출한 CTC가 폐암 조직에서 떨어져 나왔음을 의미한다. 조 교수는 “채혈만으로 암세포를 검출할 수 있어 향후 전이암의 조기 진단이나 항암치료 효과의 모니터링 등 암 진단과 치료에 유용하다”고 말했다.
전봉현 건국대 시스템생명공학과 교수팀은 양자점(quantum dot)을 기반으로 고감도 진단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양자점은 nm(나노미터·1nm는 10억 분의 1m) 크기의 반도체 물질로 입자 크기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 일반 형광염료보다 1000배 더 밝은 것도 장점이다.
이를 이용하면 여러 종류의 바이오마커를 다양한 색의 형광으로 한 번에 진단하는 센서를 만들 수 있다. 양자점 나노입자를 입힌 물질을 세포 내에 침투시킨 뒤 형광을 추적해 세포 내에서 물질의 기작 연구도 가능하다. 또 형광이 밝은 만큼 매우 적은 양의 바이오마커를 검출하는 데도 유용하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의 경우 고감도 진단을 위해서는 유전자증폭기술(PCR)로 사전처리를 해야 하는데, 양자점을 이용하면 바이러스를 바로 검출하는 고감도 키트를 개발할 수 있다.
전 교수는 “고감도 검출 키트를 이용하면 아주 적은 양의 바이오마커도 검출해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며 “바이오마커를 이용한 질병 진단 기술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검출 기술의 발전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