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양자컴퓨터의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정보기술(IT)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양자컴퓨터 개발이 올해 성숙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 3대 IT 공룡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잇달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고 있다. IT 업계가 주도하는 ‘양자컴퓨터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당신이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양자역학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양자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해 양자전기역학을 구축한 공로로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말이다. 천재마저 이렇게 이야기할 만큼, 양자역학은 만만치가 않다. 양자를 이용해 연산하는 양자컴퓨터의 난해함이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양자컴퓨터 상용화 본게임 시작
양자컴퓨터는 ‘큐비트’라는 단위로 정보를 저장한다. 지금 컴퓨터의 ‘비트’에 해당한다. 비트는 0 혹은 1로 저장 되지만, 큐비트는 0인지 1인지 관측하기 전까지 알 수 없고, 0과 1이 겹쳐 있는 ‘중첩’ 상태로 유지된다. 양자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양자컴퓨터는 이런 큐비트의 ‘불확정성’을 이용해 연산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데이터를 한번에 병렬 처리할 수 있다.
1982년 파인만이 양자컴퓨터를 처음 제안했지만 30여 년이 지날 때까지 양자컴퓨터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딱 35년이 되는 올해, 거대 IT 기업들이 줄줄이 양자컴퓨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용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양자정보연구단 선임연구원은 “구글 등의 대기업이 양자컴퓨터 개발에 발벗고 나서면서 상용화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고 말했다.
올해 초 구글은 “올해 안으로 큐비트 49개로 이뤄진 칩을 넣은 양자컴퓨터를 개발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IBM은 올해 3월 양자컴퓨터 플랫폼을 대중에 공개했다. 그리고 그간 조용히 숨 고르기를 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9월, 연말까지 양자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개하겠다며 치고 나왔다.
IT 업계 최고 3사가 모두 양자컴퓨터에 달려드는 이유는 양자컴퓨터의 활용 범위가 엄청나게 넓기 때문이다. 신약 개발에 필요한 최적의 분자구조를 찾거나, 지금까지 밝혀내지 못한 자연계 현상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으며, 현재 슈퍼컴퓨터로는 풀지 못한 수학적 난제도 해결할 여지가 있다. 이 모든 가능성은 기업의 경제적인 이익으로 직결된다.
미국 시장조사업체인 마켓리서치퓨처는 올해 7월 발표한 ‘양자컴퓨팅 시장조사 보고서’에서 2022년에는 양자컴퓨터 시장이 24억6400만 달러(약 2조7845억 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양자컴퓨터가 0과 1로만 정의되던 고전적인 컴퓨팅의 패러다임을 뒤흔들면서 사회 전반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결국 양자컴퓨터에서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에 따라 향후 IT 업계는 재편될 공산이 크다.
49큐비트 양자컴퓨터 개발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진정한 의미의 양자컴퓨터를 최초로 개발할 곳은 구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구글은 올해 안으로 큐비트 49개로 이뤄진 49큐비트 칩을 이용한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기로 했다. 49는 ‘양자 우월성(Quantum supremacy)’에 근거해 나온 숫자다.
양자 우월성이란 미국의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인 존 프레스킬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양자컴퓨터가 기존 컴퓨터의 기능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기준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다. 많은 연구자들은 양자 우월성을 결정짓는 기준을 50개 정도로 보고 있다.
구글은 지난해 9큐비트 칩의 양자컴퓨터를 구현해 ‘네이처’ 6월 8일자에 발표했다. 1년 만에 큐비트를 5배 이상 늘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구글의 발전 속도를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3사 가운데 구글은 양자컴퓨터 개발에 가장 늦게 뛰어들었다. 2013년 캐나다 벤처인 디웨이브(D-wave)가 개발한 512큐비트의 ‘디웨이브2’를 구매했다. 그런데 디웨이브는 연산 성능이 처음 보고된 것보다 낮고, 범용으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어 아직까지 학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양자컴퓨터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그 해 5월 16일, 구글은 자사 블로그에서 “인공지능(AI) 연구를 위해 자체적으로 양자컴퓨터 하드웨어를 제작 하겠다”고 발표했다.
구글이 지난해 발표한 9큐비트 양자컴퓨터는 ‘초전도 루프’를 큐비트로 이용한다. 절대온도 0도(영하 273도) 부근에서 저항이 사라지는 초전도 현상을 이용해, 극저온에서 발생하는 양자역학적 상태를 큐비트로 사용한다.
구글은 자사 블로그에서 “이번에 개발한 양자컴퓨터 시스템의 핵심은 제어 가능성”이라고 밝혔다.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려면 큐비트가 중첩 상태를 유지하며 정보를 저장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외부와의 상호작용으로 중첩 상태가 무너지지 않도록 제어할 기술이 필요하다. 구글은 “큐비트들 간의 상호작용을 줄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계산의 한계는 디지털 회로를 이용해 극복했다”고 밝혔다.
김 선임연구원은 “극저온이라는 제약이 있고, 양자 알고리듬 연구가 부족해 일반 산업체에서 쓰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49큐비트의 제어가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개발된 양자컴퓨터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성능이 월등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글은 이미 ‘알파고’의 성공을 통해 인공지능(AI) 연구에서도 가장 앞서있다. 최근에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알파고를 능가하는 ’알파고 제로’를 공개했다. 2013년 디웨이브2 구입 당시 엔지니어링 디렉터였던 하트뭇 네벤은 자사 블로그에 “우리는 양자컴퓨터가 기계학습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우리는 이미 양자 기계학습 알고리듬을 몇 가지 개발했다”며 양자컴퓨터와 AI의 융합연구가 시작됐음을 시사했다.
소프트웨어 시장 동시 공략
마이크로소프트는 구글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 2005년 양자컴퓨터 개발을 담당할 연구소 ‘스테이션 Q’를 설립하면서 양자컴퓨터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큐비트를 구현할 입자로 구글과 달리 ‘마요라나 페르미온’을 선택했다.
마요라나 페르미온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반입자의 특성을 가지는 입자다. 입자와 반입자는 마치 양과 음 같은 존재로, 질량, 스핀 등은 모두 동일하지만 전하가 반대인 관계다. 존재가 예상된 이후 80년간 관측되지 않았다. 이런 입자로 큐비트를 만드는 건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지만, 성공할 경우에는 가장 안정적이고 범용성이 큰 양자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마요라나 페르미온의 입자 자체에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자의 위치를 나타내는 파동 함수에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 때문이다. 양자컴퓨터의 큐비트로 많이 연구되는 이온 트랩 방식이나 구글의 초전도체 방식은 입자 자체의 양자 특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큐비트의 양자 상태가 금방 깨져버린다. 그만큼 안정적이지 못하다.
반면 마요라나 페르미온은 2개씩 쌍을 이뤄 다니는데, 2쌍이 만들어지면 물리학적으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입자 4개의 위치가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함수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지로 가는 길이 두 개인 셈이다.
4개의 마요라나 페르미온이 위치를 서로 바꿔, 같은 위치에 정확히 돌아가더라도 이 상태를 기술하는 함수가 달라진다. 즉, 위치를 교환하는 ‘순서’를 이용해 연산한다. 이 순서는 마요라나 페르미온이 쌍으로 만나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위상학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박권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는 오렌지와 도넛을 예로 들었다. 오렌지와 도넛을 위상학적으로 동일하게 만들려면 오렌지에 구멍을 하나 뚫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두 물체의 위상학적 성질은 바뀌기 힘들다. 박 교수는 “마요라나 페르미온의 교환 순서 역시 오렌지처럼 위상학적 성질이 보호된다”며 “이 입자로 양자컴퓨터를 구현할 수만 있다면 가장 안정적인, 다시 말해 상업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는 컴퓨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위적으로 마요라나 페르미온을 구현하려는 연구를 하고 있다. 2012년 레오 쿠벤호벤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카블리나노과학연구소 교수팀은 금과 초전도체 전극에 나노미터 수준의 얇은 금속선을 접촉시키는 방법으로 인공 마요라나 페르미온을 구현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입자와 반입자 상태를 동시에 가지는 것은 확인했으나, 위치를 교환할 때 함수가 변하는 것을 확인하지 못해 진짜 마요라나 페르미온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과학동아 2017년 1월호 참조).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쿠벤호벤 교수와 입자물리학의 석학인 찰스 마커스 덴마크 코펜하겐대 교수, 마티아스 트로이어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 교수, 데이비드 레일리 호주 시드니대 교수 등과 마요라나 페르미온 양자컴퓨터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스테이션 Q의 규모도 3배 키웠다. 박 교수는 “실제 마요라나 페르미온의 관측과 상관없이 인공적으로 입자를 만드는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별개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숨은 전략은 따로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장 잘 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이다. 현재 양자컴퓨터 개발은 주로 하드웨어에 집중돼있다. 하지만 양자컴퓨터가 개발된다 하더라도 이를 원활하게 작동시키고, 활용할 프로그램을 만들 소프트웨어가 당연히 필요하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는 9월 25일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개최한 마이크로소프트 연례 기술 콘퍼런스 ‘이그나이트 2017’에서 양자컴퓨터에 적용할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를 처음 공개했다. 그는 “비주얼 스튜디오와 양자컴퓨터 양쪽에서 모두 작동하는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비주얼 스튜디오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작동하는 통합 개발 환경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프로그래밍 언어인C언어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즉, 많은 개발자들이 익숙한 환경이라는 의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양자컴퓨터용 프로그래밍 언어는 개발자들에게 매우 익숙할 것”이라며 “파이썬, C#, F# 등 개발자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능을 일부 차용했다”고 덧붙였다.
배준우 한양대 응용수학과 교수는 “아직은 양자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개발되고 있지 않다”며 “가장 먼저 프로그래밍 언어를 선점하는 기업이 소프트웨어의 생태계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왓슨’ 자존심 되찾을 ‘IBM Q’
컴퓨터 하드웨어업계 1인자로 꼽히는 IBM은 ‘초반에 많이 쓰이는 제품이 결국 시장을 장악한다’는 전략을 택했다. 먼저 공개해서 먼저 쓰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IBM은 슈퍼컴퓨터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기업이었다. IBM이 개발한 ‘블루진(BlueGene)’은 수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슈퍼컴퓨터 연구에 뛰어들며 순위에서 밀려나 현재 5위를 기록하고 있다(2017년 6월 기준).
매출을 60% 이상 차지하던 전통적인 하드웨어 분야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IBM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2011년 미국 퀴즈 프로그램 ‘제퍼디’에서 인간 우승자를 이긴 인공지능 ‘왓슨’은 현재 금융, 의학, 교육, 쇼핑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 활용되며 IBM의 주요 매출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양자컴퓨터는 왓슨의 ‘후계자’ 격이다. IBM은 5개 큐비트로 구현한 양자컴퓨터 ‘IBM Q’를 개발해 올해 3월 자사 클라우드에 공개했다. IBM은 구글과 마찬가지로 초전도 상태의 양자를 큐비트로 이용했다.
IBM은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와 소프트웨어 도구도 함께 공개했다. IBM 클라우드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자신이 개발한 양자 알고리듬이나 프로그램을 IBM의 양자컴퓨터로 시험할 수 있다.
제리 차우 IBM 토머스왓슨연구센터 양자컴퓨팅연구소 그룹장은 “전 세계 연구자들이 양자 알고리듬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며 “우리의 전략은 기술 커뮤니티와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아직 개발 초기 단계이지만, 이를 개발자들에게 공개함으로써 빨리 상용화 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IBM은 현재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수년 안에 50큐비트 양자컴퓨터를 개발할 계획이다. 개발에 성공하면 유료화 전환을 통해 이익을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 포브스는 이런 IBM의 전략에 대해 “현재는 IBM이 영업 감소 위기를 맞았지만, 양자컴퓨터로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