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예부터 우리 조상 곁을 지켜온 동물이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알을 지킨 것도 말이었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승천할 때 탄 동물도 말이었다. 이처럼 명색이 기마민족의 후예인데, 주변을 둘러보면 말 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독일에서는 여성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승마라는데….
말을 타는 사람은 없어도 응원하는(?) 사람은 많다. 국내 말 산업에서 경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98%로 압도적이다. 대신 승마 산업은 월등히 작다. 말을 타는 비용이 스키나 보드 수준으로 낮아졌는데도 사람들이 말을 타지 않는 이유는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위험하긴 하다. 우리나라 승마장에서 가장 많은 말은 영국이 원산지인 서러브레드 품종이다. 지면에서부터 등까지 키가 약 160cm로, 성인 여자만 하다.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게다가 은퇴한 경주마를 승마용으로 재훈련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경주마로 훈련을 받아서인지 자극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습성이 남아있다.
말은 덩치에 비해 무척 예민한 동물이다. 김남영 국립축산과학원 난지축산시험장 연구사는 “말이 경계심 많은 초식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면서 “천성적으로 겁이 많아서 움직이는 물체나 낯선 소리에 쉽게 놀란다”고 말했다. 이렇게 예민한 말을, 그 중에서도 경주마 습성이 남아있는 덩치 큰 서러브레드를 타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상하좌우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이는 말 등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그 와중에 허리도 꼿꼿이 펴고 자세를 유지해야 안 떨어진다. 난감하게도 초보자라고 무시하는 말도 있다. 말은 눈치가 빨라 초보자의 어설픈 신호는 잘 듣지 않는다. 승마 교관들은 말에게 명령을 내린다 생각하지 말고, 대화를 하듯이 신호를 주고받으라고 가르친다.
대화를 하라고?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고삐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살짝 당기면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양쪽을 동시에 당기면 그 자리에 멈추라는 신호다. 허벅지에 힘을 줘서 조이면 속도를 높이고, 힘을 빼면 다시 천천히 간다.
말이 쉽지, 균형 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조종까지 능숙하게 하려면 한세월이다. 승마도 자동차 운전연습의 첫 단계처럼 말 움직임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뮬레이터에서 훈련을 받는 방법은 없을까?
초보자 전용 승마로봇 등장!
승마 로봇이야 예전부터 있었다. 놀이공원에 있는 회전목마나 동전을 넣으면 움직이는 말 인형이다(웃는 소리가 들리지만 맞다!). 다만 모터가 하나밖에 없어서 위아래 또는 앞뒤로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자유도 1개짜리 로봇이다. 좀 더 말의 움직임과 유사하게 안장을 8자로 움직이는 재활훈련용 승마로봇도 자유도가 2~3개뿐이어서 실제 승마와는 차이가 크다. 더구나 말은 속도에 따라서 발을 구르는 리듬이 달라진다. 단순히 모터 회전속도만 빠르게 해서는 말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흉내 낼 수 없다.
실제 승마연습에 도움이 될 만한 정교한 로봇은 최근에 나왔다. 포항에 있는 한국로봇융합연구원에서는 말의 움직임을 거의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는 승마로봇 시뮬레이터를 개발했다. 앞뒤(x축), 좌우(y축), 위아래(z축)로 각각 병진운동과 회전운동을 할 수 있는 자유도 6개의 승마로봇이다. 말안장에 센서를 부착해서 걸음걸이 변화에 따른 진동 폭, 속도, 박자 정보를 뽑아낸 뒤 6개 모터를 통해 비슷하게 재현했다.
이 로봇은 말의 움직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처럼 조종할 수도 있다. 경북 영천 운주산 승마장의 트레이닝 코스를 본따 만든 3D 영상의 가상코스를 직접 로봇 시뮬레이터를 타고 한 바퀴 도는 동안 어색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고삐와 허벅지 부분에 센서가 있어 실제 말을 조종할 때처럼 속도를 조절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다. 한쪽 방향으로 체중을 실으면 영상 속의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리듬 타고 ‘통통’ 튀는 말
결정적으로 시뮬레이터는 말의 리드미컬한 걸음걸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말은 속도에 따라 평보, 속보, 구보, 습보의 4가지 패턴을 보이는데, 각 걸음은 전혀 다른 리듬을 가지고 있다. 평보가 왼쪽 뒷다리, 왼쪽 앞다리, 오른쪽 뒷다리, 오른쪽 앞다리 순으로 4박자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속보는 대각선 다리가 교차하면서 위아래로 통통 튀는 2박자 걸음걸이를 보여준다. 우리 귀에 익숙한 ‘다그닥 다그닥’하는 리듬감 있는 3박자 발걸음은 말이 구보할 때 내는 소리다. 말이 움직이는 패턴에 따라 승마자의 움직임도 달라져야 한다. 속보일 때는 가만히 있으면 엉덩이가 아프기 때문에 위아래로 같이 움직이는 식이다. 시뮬레이터는 이런 4가지 패턴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어 승마연습에 훨씬 효과적이다.
로봇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박용식 한국로봇융합연구원 주임연구원은 “초보자들이 말을 처음 접하면 공포감을 많이 느낀다”면서 “시뮬레이터를 통해 말의 움직임에 익숙해지고 나면 승마에 대한 거부감이 꽤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승마 콘텐츠를 좀 더 개발할 생각이에요. 게임 하듯이 가상으로 말을 타는 거지요. 2013년 10월에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로보월드에 시뮬레이터를 전시했더니 학생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승마에 대한 숨은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지요.”
사실 익숙해지면 승마만큼 좋은 전신운동도 드물다. 허리 등 자세를 교정할 수 있고 근력과 지구력, 유연성을 강화할 수 있다. 조심하기만 하면 생각만큼 말이 위험하지도 않다. 오히려 말과 교감하며 정서적인 안정을 느끼거나 자신감, 성취감을 얻는 사람도 많다. 박 연구원은 “시뮬레이터가 승마의 진입장벽을 낮춰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종의 명마 ‘오명마’ 다시 만든다
거듭 말하지만 초보자에게 승마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키가 160cm 이상인 서러브레드는 유럽이나 미국 사람에게는 무리가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타기에는 다소 큰 편이다. 그럼 좀 작은 말을 타면 되지 않을까. 작은 말은 또 너무 작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제주마는 키가 115~125cm 정도밖에 안 되는 조랑말이다. 체력과 지구력은 좋지만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두 종을 교배시켜 새로운 종을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서러브레드의 속도와 제주마의 체력을 둘 다 갖추고 우리나라 사람이 타기에 적절한 키를 가진 말, 바로 ‘한국형 승용마’다. 국립축산과학원에서는 2010년부터 서러브레드와 제주마를 교배시켜 키 145~150cm인 한국형 승용마를 개발하는 연구를 해왔다. 연구 초기에는 130cm 이하의 조랑말과 150cm 이상의 덩치 큰 말이 들쑥날쑥 태어나다가 최근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말들이 태어나고 있다. 한국형 승용마는 ‘한라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고, 아직 공식 이름은 없다.
그런데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기마민족이었던 우리 조상들은 어떤 말을 타고 다녔을까? 서양에서 건너 온 서러브레드는 분명 아닐 테고, 그렇다고 조랑말을 타고 전쟁에 나갔다는 것도 이상하다. 고려 말의 문신 이색이 남긴 기록을 보면 한국에는 두 종류의 말이 있다. 한 종류는 몽골말 계통의 중형 말이고, 다른 한 종류는 제주마 같은 소형 말이다. 지금은 한반도에서 사라진 중형 말을 군마로 주로 사용했을 것이다.
조선 세종 때는 ‘오명마’라는 명마가 이름을 날렸다. 토종말과 몽골, 중앙아시아 말을 교배시켜 만든 세종의 야심작이다. 온통 검은 몸에 발과 이마에만 흰털이 있었던 오명마는 강인하고 지구력이 뛰어나 북방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오명마에 눈독을 들인 명나라에서 매년 1000마리 이상 상납할 것을 강요하면서 한반도 중형 말의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 후기에는 말 생산이 완전히 쇠퇴한다.
한국형 승용마 개발은 이런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일이다. 우리 체형에 적합한 말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이제 열매를 맺고 있다. 2014년 말의 해에는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힘찬 말발굽 소리를 즐겨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