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미 하버드대 사회학자 밀그램 교수는 지구상의 사람들이 5명만 거치면 거의 다 알게 된다는 ‘6단계 분리’를 실험적으로 밝혔다. 세상이 좁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사회 네트워크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의 친분관계로 형성되는 네트워크는 어떤 모습일까. 과연 자신은 영화배우 김정은과 연결돼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녀를 알 수 있을까.
밀그램에 앞서 1960년 헝가리 괴짜 수학자 에르도쉬는 그의 제자 레이니와 함께 사람의 친분관계를 그래프이론으로 기술했다. 그래프는 점(노드)과 그 점을 연결하는 선(링크)으로 구성된다. 에르도쉬와 레이니는 사람관계를 단순히 점과 선으로 기술한 것이다. 여기에서 노드는 개인을 나타내고 두사람이 친분이 있으면 둘 사이에 링크가 있다고 가정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그래프에서 아주 적은 수의 링크만 가지고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수학적으로 보였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10억명이 있을 때 한사람 당 약 4명의 사람들만 알아도 모두가 서로 연결될 수 있다. 현재 지구에는 60억명이 살고 있다. 한사람이 24명을 알고 지낸다면 전세계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다. 당시 이들의 이론은 매우 참신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사회는 끼리끼리 네트워크
밀그램이 논문 ‘좁은 세상’을 발표한 3년 후 존스홉킨스대 사회학자 그라노베터 교수는 사회 네트워크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사회의 친분관계에는 ‘강한 연결’과 ‘약한 연결’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가족, 스승과 제자,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와 같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강한 연결, 그리고 어쩌다 만나는 사이 같은 약한 연결 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라노베터 교수는 약한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왜 그럴까.
철수라는 물리학과 대학생이 있다. 그는 매일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며 토론을 한다. 그는 같은 과 친구들과 강한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철수에게는 일년에 한두번 만나는 법대생 민수라는 친구가 있다. 배경이 달라 대화는 약간 어색하지만, 그들은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얻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철수와 민수의 친분관계는 물리학과 학생집단과 법대 학생집단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을 연결하는 약한 연결은 사회에서 이질적인 집단간의 이해를 도와주며 사회의 큰 힘이 된다. 실제로 그라노베터는 이 점을 실험적으로 밝혔다. 그는 실직자가 직장을 구할 때, 누구를 통해 새 직장을 구하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자신의 지인 중에서 약한 연결의 사람을 통해 직장을 찾을 확률이 84%, 강한 연결의 사람을 통해 직장을 찾을 확률이 16%가 된다고 밝혔다. 강한 연결 관계의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배경을 갖기 때문에 정보가 한정돼 새 직장을 찾아줄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해 약한 연결이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이 인식됐다.
최근의 복잡계 네트워크의 연구 결과로 밝혀진 사회 네트워크의 또 하나의 특징은 허브(연결선 수가 많은 노드)가 반드시 전체 네트워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허브의 붕괴가 전체 네트워크의 마비를 가져온 인터넷과는 다른 특징이다. 사회 네트워크에서 허브의 영향력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회에 반드시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사회 네트워크에서 허브의 영향력이 인터넷과 다른 까닭은 네트워크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연결선 수가 작은 것과 큰 것이 결합돼 있는 구조를 갖는다. 반면 사회 네트워크는 연결선이 큰 것은 큰 것끼리, 작은 것은 작은 것끼리 연결돼 있다. 즉 끼리끼리 어울려 지낸다는 말이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활용
사실 사회 네트워크를 정확히 그려내 누구누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자료를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누구를 안다는 의미도 불분명하다. 한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는지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컴퓨터의 도움으로 사회 네트워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미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교수인 던칸 왓츠 교수는 홈페이지(smallworld.sociology.columbia.edu)를 통해 사회가 몇단계로 연결되는지를 실험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인터넷 카페와 같은 동호회 모임의 자료를 분석해 사회 네트워크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연구가 이뤄진 사회는 영화배우 네트워크다. 영화배우들이 같은 영화에 출연하면 서로 알게 된다는 점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출연진의 이름이 죽 나열되는 점을 기억하자. 이 데이터들은 영화 데이터베이스 웹사이트에 모두 보관돼 있어, 누구누구가 어느 영화에 함께 출연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영화배우 네트워크를 분석해 사회 네트워크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com)에 따르면 할리우드는 1900년 당시 배우가 53명이었던 조그만 집단에서 오늘날 50만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그 성장 속도는 점차 가속돼 1998년에만 1만3천2백9명의 새로운 배우들이 imdb.com에 등록됐다.
그런데 거대한 할리우드 영화계는 케빈 베이컨이라는 배우가 어떤 배우와 몇다리에 걸쳐 연결되는지를 알아 맞추는 텔레비젼 게임을 통해 좁은 사회임이 밝혀졌다. 신기하게도 케빈 베이컨은 다른 배우들과 평균 2명을 거치면 연결된다. 그렇다면 케빈 베이컨이 할리우드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처럼 짧게 연결되는 것일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접근해보자. 예를 들어 배우 A를 할리우드 네트워크의 중심에 가져다두고, 그 배우로부터 다른 모든 배우들까지의 거리를 계산한다. 그러면 배우 A로부터 다른 배우들까지의 평균거리를 알아낼 수 있다. 이 숫자들을 기준으로 우리는 어떤 배우가 모든 배우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 즉 어떤 배우가 실제로 할리우드의 중심에 있는지를 밝혀낼 수 있다.
반지의 제왕 사루만이 할리우드 중심
실제로 2002년 2월말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케빈 베이컨은 할리우드의 중심을 차지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주인공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사루만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였다. 그로부터 출발하면 할리우드의 모든 배우들은 평균 2.623번만에 접근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리의 뒤를 따르는 배우들로는 영화 ‘화성침공’에서 데커장군으로 출연한 로드 스타이거(2.627), 1978년작 공포영화 ‘할로윈’에 출연한 도널드 플레젠스(2.651) 등이 있다. 우리에게 낯익은 배우로는 8위 안소니 퀸(2.667), 9위 찰튼 헤스톤(2.670), 10위 진 헤크만(2.676), 12위 숀 코네리(2.682) 등이 있다.
그럼 우리의 주인공 케빈 베이컨은 몇등이나 될까. 불행히도 그는 2.935번으로 겨우 1천1백61위에 불과했다. 물론 50만명이 넘는 배우들 중에서 이 정도의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배우 네트워크를 대표하는 ‘케빈 베이컨 게임’의 주인공으로는 부적합해 보인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www.cs.virginia.edu/oracle 참조).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2002년 엄청난 흥행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코미디 영화 ‘가문의 영광’을 박스오피스 1등 자리에서 끌어내린 영화는 차태현, 이은주, 손예진 주연의 영화 ‘연애소설’이었다. 가문의 영광으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까지 거머쥐며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던 유동근의 입장에서는 연애소설의 주인공 차태현이 곱지만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은 아이러니컬하게 돌아가는 법.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세상이다. 새로 준비중인 영화 ‘첫사랑사수 궐기대회’에서 유동근은 원수같게만 느껴질 차태현, 손예진과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된다. 아마도 한국 영화계가 적과의 동침도 불가피한 좁은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영화배우계에서는 과연 누가 중심에 있을까. 그리고 할리우드에 비해 얼마나 좁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필자(정하웅)는 KAIST에 재학중인 손승우 군과 함께 한국 영화배우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를 해봤다. 하이텔 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23년 서선키네마 제작의 ‘국경’이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2002년 말 현재 6천4백2편의 영화가 제작됐고 등록된 영화배우 수는 7천9백6명이다.
최다 출연편수왕 신성일을 제친 박용팔
한국영화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배우 네트워크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보기로 하자. 먼저 어떤 배우가 충무로의 중심에 있을지를 추측해보자.
첫번째로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배우는 아마도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사람일 것이다. 가장 많이 출연했다면 함께 출연한 배우도 많을 것이고, 따라서 네트워크의 중심에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 영화배우 중에서 최다 출연 편수를 자랑하는 배우는 신성일이다. 그는 무려 4백9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뒤를 잇는 김지미의 3백35편과 비교해보면 신성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많은 영화편수가 그를 충무로의 중앙에 두지는 못했다. 이는 아마도 신성일이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가 1960-70년대의 엄앵란으로 대표되는 비슷한 출연진을 가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결국 많은 편수의 영화에 출연은 했지만 새로운 배우들과의 연결에 실패해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두번째로는 연결선 수가 가장 많은, 즉 허브에 해당하는 배우가 중심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연결선 수, 즉 공동 출연한 영화배우수가 가장 많은 주인공은 이석구인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도 대부분 독자들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석구는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63편의 크고 작은 영화에 출연해 발을 넓혀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연구결과 이석구도 충무로의 중심은 아니었다.
최다 출연편수를 자랑하는 신성일과 최다 공동 출연배우 수를 자랑하는 이석구가 충무로 네트워크의 중심이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인터넷과는 달리 사회 네트워크에서 많은 수의 연결이 언제나 그 사람을 네트워크의 중심, 즉 허브가 언제나 중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충무로의 중심에 있을까.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배우가 중심에 오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정답을 맞추기는 힘들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리 잘 알려진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구결과 충무로의 중심에는 박용팔이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명됐다. 그는 평균 2.06번만에 우리나라 모든 배우들과 연결된다. 독자들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겠지만 사진을 보면 “아! 저 아저씨!”하면서 어디선가 한번 본 듯한 인상을 기억해낼 것이다.
이렇듯 박용팔은 주연이 아니지만 많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여러 배우들과 연결선을 효율적으로 이어나가며 충무로의 중앙에 위치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조연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밝혀진 셈이다. 물론 충무로의 중앙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들도 있다. 국민 배우로 불리는 안성기가 8등을 차지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충무로의 박용팔 게임 또는 안성기 게임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할리우드 잇는 약한 연결
연구를 진행하면서 밝혀진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최근 국내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로 말미암아 충무로 네트워크가 할리우드 네트워크와 연결됐다는 점이다. 두 집단이 긴밀히 연결돼 있지는 않지만, 몇몇 배우들이 끈을 갖고 있었다.
지난해 10월 국내 배우로는 처음으로 메이저 할리우드 영화에 진출한 박중훈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영화 ‘찰리의 진실’에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충무로 네트워크를 할리우드 네트워크에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박중훈은 케빈 베이컨 넘버 2를 부여받았다. 박중훈이 이 영화에서 로버트 W. 캐슬러와 함께 출연했고, 캐슬러는 1996년 제작된 영화 ‘슬리퍼스’에서 케빈 베이컨과 함께 출연했기 때문이다. 연기생활 18년, 1985년 이황림 감독의 ‘깜보’로 데뷔한 이래 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는 충무로에서 위치가 꽤나 높다. 실제로 박중훈은 중심거리에서도 38등이다.
물론 박중훈을 통하지 않더라도 할리우드와 충무로는 몇몇 외국 조연배우들로 인해 이미 연결돼 있다. 그러나 케빈 베이컨 게임의 성격상 좀더 유명한 영화와 배우들로 연결되는 것이 게임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기가 쉽다. 따라서 당분간 박중훈이 충무로 배우들을 케빈 베이컨과 연결해주는 길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박중훈은 그라노베터 교수가 주장했던 약한 연결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stat.kaist. ac.kr/movie 참조).
이처럼 영화배우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 네트워크가 짧은 거리로 연결돼 있고, 약한 연결이 중요하며, 끼리끼리 어울리는 유유상종의 특징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인터넷이나 생물체에서 일어나는 네트워크와는 다르다.
사회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는 나라의 지역발전계획과 인사관리, 그리고 회사의 조직관리 등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때문에 현재 여러 사회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세대의 김용학 교수를 선구로 한준 교수, 서울대 이재열 교수, 장덕진 교수, 고려대 장세진 교수, 동국대 박찬웅 교수 등 많은 연구자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