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일생의 역작인 ‘이기적 유전자’를 발표했다. 비판자들은 이 제목이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을 내포한다고 분노했다. 정작 도킨스는 유전자가 정말로 이기적인 동기를 지닌다고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73년 영국에서 보수당의 노동 정책에 반발해 석탄 광부들이 총파업을 일으켰다. 전력 생산이 중단돼 영국 전역에 비상 사태가 선포됐다. 일주일에 사흘만 전기가 들어왔다. 옥스퍼드대에서 귀뚜라미 수컷의 구애 노래를 연구하던 어느 조교수는 당분간 실험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기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고심 끝에 양초 불빛 아래에서 타자기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1966년에 처음으로 동물행동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됐을 때 만든 강의록이 토대가 됐다.
겨우 두 장(章)을 마쳤을 때 섭섭하게도(?) 전력 공급이 정상화되면서 원고 쓰기를 멈췄지만, 2년 뒤 안식년을 맞아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몇 년간 서랍 속에서 잠자던 원고 뭉치는 1976년에서야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바로 리처드 도킨스의 명저 ‘이기적 유전자’였다.
당시는 열등한 유전자를 박멸한다는 나치 우생학의 공포가 과학자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전자’라는 불경스러운 단어에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버젓이 결합한 제목을 단 이 책은 서구 사회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이 과학분야 베스트셀러 자리를 수십 년째 굳건히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책에 대해 열광적인 찬사와 저주 섞인 비난이 동시에 쏟아진다. 누군가에게는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책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간사의 모든 것을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호들갑을 떨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한 구닥다리 책에 지나지 않는다.
훗날 도킨스가 비평가들은 책 제목만 읽는 경향이 있다고 투덜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 대해 양극단을 오가는 반응들은 주로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에서 비롯된다.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유전자가 ‘이기적’인지 살펴보자.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 읽은 뒤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동요하고 경탄하는 한편 좌절하거나 불쾌하고 더 나아가 분노하게 된다.
실제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소개했다. 어떤 사람은 그 책이 주는 암울한 메시지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사흘 밤이나 잠을 설쳤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런 책을 써놓고서 어떻게 도킨스 당신은 매일 아침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한 여학생은 그 책을 읽고서 삶이 공허하고 아무런 목적도 없음을 깨달았다며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울먹였다.
많은 사람이 ‘이기적 유전자’라는 문구를 대개 이렇게 이해한다. 유전자는 이기적이어서 오로지 다음 세대에 복제본을 더 많이 남기려 애쓴다. 실제로 책에 “유전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다. (중략)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다”(번역서 65쪽)라고 쓰여 있다.
따라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도킨스에 따르면, 심지어 친자식이나 형제, 배우자, 친구 등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헌신도 진정한 이타성이 아니라 유전자가 우리를 조종해 복제본을 더 남기려는 이기적인 책략에 불과하다.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유전자를 섬기는 노예에 불과하다고 일갈한 뒤, 도킨스는 선심 쓰듯 해결방안도 던져준다. “관용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노력하자.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자. 그러면 유전자의 계획을 무산시킬 기회라도 잡을 수 있다.”(41쪽)
이쯤 되면 ‘아유, 노예를 벗어날 방법까지 알려주시니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라고 쏘아붙이고 싶어진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문구는 정말로 인간을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기계로 깎아내리는 말일까.
‘이기적 유전자’는 은유일 뿐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는 단지 은유일 뿐이다. 은유란 ‘내 입술은 앵두’처럼 새로 묘사하고 싶은 낯선 대상을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한 대상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은유가 마음에 안 들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화자의 입술이 아주 붉다는 얘기구나’라고 이해만 하면 된다. 은유가 형편없음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입술이 어떻게 과일이 될 수 있냐며 정색하고 따지면 곤란하다.
도킨스는 책에서 ‘이기적 유전자’는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다고 지겨울 정도로 강조한다. “간결하고 생생한 표현을 위해 우리는 은유를 사용할 것이다”(102쪽) “지금껏 유전자를 의식적인 행위자에 비유했던 작업을”(167쪽) “각각의 동물을 마치 자기 유전자를 보존한다는 ‘목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생존 기계에 비유하는 우리의 접근법을 활용해”(230쪽) 같은 구절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다. 스티븐 제이굴드나 리차드 르원틴 같은 비판자들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문구가 이기적인 의도를 실제로 지닌 유전자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을 내포한다며 분노했다. 과학사회학자인 김동광 고려대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원은 2010년에 발표한 논문 ‘사회생물학의 인식론적 경향, 그리고 그 대중적 차원들’에서 “마치 유전자가 자율적 능력과 기제를 갖춘 복제자인 것처럼 과장했다”며 도킨스를 비판했다. 도킨스는 유전자가 정말로 이기적인 동기를 지닌다고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강조점은 ‘이기적’이 아니라 ‘유전자’에
‘이기적 유전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3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이 은유를 정확히 이해하는 요령을 알려준다. “책 제목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조점을 제대로 찍는 것이다. (중략) 이 책의 제목에서 강조해야 할 핵심 단어는(‘이기적’이 아니라) ‘유전자’다.”(8쪽)
생명을 이루는 실체에는 유전자, 개체, 집단, 종, 생태계 등이 있다. 어느 실체에 자연선택이 작용하든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자연선택이라는 체를 통과해 오늘날 지구상에 흔한 존재가 된 실체는 어떤 특성을 갖추고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마치 어떤 남자가 국가대표 축구 선수로 오랫동안 내로라하는 선수들과 겨뤄왔다면, 그가 배짱 두둑한 남자일 거라고 기대할 수 있듯이 말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다음 세대에 후손을 더 많이 남긴 실체가, 그렇지 못한 다른 실체들을 제치고 자연계에 흔하게 퍼졌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실체가 ‘이기적’이라고 은유적으로 빗댈 수 있다. 이 은유가 싫으면 안 따르면 그만이다. 어쨌든 그 실체가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의도를 정말로 가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인류의 진화에서 추우면 덜덜 떨어 열을 냄으로써 체온을 유지했던 사람들이, 아무리 추워도 가만히 있어 동사(凍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선택이 작용하는 단위가 개체라고 잠시 가정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추우면 몸을 덜덜 떠는 사람을 도킨스는 ‘이기적’이라고 비유했다. 사실 자연 선택의 단위는 정의상 ‘이기적’(다음 세대에 후손을 많이 남기는 특성)이므로 이 은유는 싱겁게 들리기까지 한다.
이제 왜 ‘유전자’가 정작 강조해야 할 핵심 단어인지 살펴보자. 자연선택에 의해 후대에 많은 복제본을 남기게끔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실체는 유전자, 개체, 집단, 종 가운데 무엇일까. 즉, 선택이 작용하는 ‘이기적’인 단위는 무엇일까. 이기적인 종? 이기적인 집단? 이기적인 유기체? 이기적인 생태계? 도킨스에 따르면, 모두 틀렸다. “다윈주의의 메시지를 ‘이기적인 무엇’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자 할 때, 그 무엇은 유전자다.”(10쪽)
선택의 단위가 유전자인 까닭은 명백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전자만이 불멸하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복제본의 형태로 수십, 수백만 년 동안 안정적으로 전해진다. 자연선택이 작용해 더 ‘이기적’인 유전자가 널리 퍼지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반면 개체나 집단은 짧게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나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덧없다. 소크라테스라는 개체를 이뤘던 독특한 유전적 조합은 그가 독배를 마시면서 함께 사라졌다. 유전자만이 불멸하므로, 자연 선택의 단위는 오직 유전자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은유의 참뜻은 이렇다. 진화의 긴 역사 동안 자연선택에 의해 복제 성공도가 최대화되는, 따라서 ‘이기적’이 되는 단위는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니라 유전자이다. 선택의 단위가 유전자라는 명제로부터 유전자나 개체가 정말로 이기적인 동기를 지닌다는 함의를 끌어낼 수는 없다.
잠깐, 그렇다면 “관용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노력하자.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도킨스는 2006년에 새로 쓴 서문에서 이 문장은 틀렸으니 마음속에서 삭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화에서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