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결합은 원자들이 전자를 공유하며 이루는 결합이다. 단일결합의 경우 원자는 각각 전자를 하나씩 내놓아 총 두 개의 전자를 공유한다.”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배우는 공유결합에 대한 내용이다.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이 설명에 예외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2024년 9월 발표됐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이 연구를 소개하며 “교과서를 다시 쓸 발견”이라고 평했다. 이 발견,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과학동아가 살펴봤다.
“공유결합은 선물교환 같은 거야. 이쪽 원자가 전자 하나를 내놓으면 반대쪽 원자도 전자 하나를 내놓아야 해. 그렇게 해서 두 원자가 사이에 있는 전자들을 공유하는 거지.”
10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2학년 화학시간, 선생님이 하던 말을 그대로 기억한다. 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냐면 당시 이 개념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공유결합은 이온결합과 함께 원자와 원자 사이의 화학결합을 설명하는 대표적 개념이다. 원자가 서로 전자를 하나씩 내놓았고, 두 원자는 전자 두 개를 공유하게 된다. 각각의 원자는 결국 전자를 하나 더 얻은 셈이다.
고등학교 시절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설명으로도 이해가 안 되는 이를 위해 다른 방식으로 비유해 보자면 이렇다. 영희와 철수가 그림을 그리려고 색연필 세트를 가져왔다. 색연필 8자루가 한 세트를 이루는 건데, 공교롭게도 영희와 철수는 둘 다 7자루밖에 없다. 그래서 둘은 색연필을 각자 하나씩 테이블 가운데 올려놓고 공유하기로 한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색연필이 두 자루 있다. 그런데 영희 입장에서는 철수의 색연필 한 자루를 공유해 써서 총 8자루의 색연필을 쓸 수 있게 됐다. 쓸 수 있는 색연필이 하나 늘어난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공유결합의 원리다.
그런데 이 설명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의 연구 결과가 2024년 9월 25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다. 전자를 하나만 공유하는 공유결합을 발견했다는 것. ‘색연필을반으로 쪼갠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논문을 뜯어봤다. doi: 10.1038/s41586-024-07965-1
폴링의 숙제, 93년 만에 풀다
“이미 몇몇 화학 반응에서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이 연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탄소의 경우 아직 이론적인 가능성만 제기됐을 뿐이었죠.” 연구를 이끈 타쿠야 시마지리 일본 도쿄대 화학과 교수가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실제로 전 세계 과학자들은 1931년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의 존재를 예견한 이후로, 그 실체를 잡기 위해서 수년간 노력해왔다. 1998년엔 인(P)과 인 사이에서 실제로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을 만들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탄소(C)와 탄소 사이에서는 그런 결합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탄소가 중요한 이유는 탄소를 뼈대로 한 화학물질이 생명현상을 이끄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탄소는 동시에 최대 4개의 팔을 뻗어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화합물을 만들 수 있다. 이 이점 때문에 현재까지 발견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탄소를 뼈대로 한 화학물질, 즉 유기 화합물로 이뤄져 있다. 탄소 사이의 결합을 자유자재로 바꿀 방법을 찾는다면, 신약개발이나 실생활에 유용한 화학물질을 효율적으로 대량생산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연구팀은 탄소와 탄소 사이에서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을 만들기 위해 화학물질의 구조 자체에 주목했다. 일반적인 경우에 탄소와 탄소 사이 단일 공유결합의 길이는옹스트롬는 0.1나노미터)이다. 그런데 연구팀이 전자 하나짜리 단일결합을 만드는 데 활용한 헥사페닐에테인은 가운데에 있는 탄소 두개를 둘러싸고 페닐 고리가 여섯 개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이건 화학에서 부피가 커서 ‘우락부락하다(Bulky)’고 부르는 분자다. 이 분자의 형태는 비유하자면 이렇다. 당신이 탄소다. 탄소 원자에 연결된 세 개의 벤젠 고리는 비유하자면 당신이 동시에 등산 가방을 세 개 멘 셈이다. 그 상태로 똑같이 등산 가방 세 개를 멘 사람과 부둥켜안으려고 한다고 생각해보라. 안기는커녕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
헥사페닐에테인 중심 탄소 두 개 사이의 단일결합도 마찬가지다. 탄소 주변에 덩치가 큰 벤젠 고리가 세 개씩 붙어있으니 거리를 좁히기 쉽지 않다. 연구팀은 헥사페닐에테인에 곁가지를 더하는 등 추가적인 변형을 가해 더 덩치 큰 분자, 헥사페닐에테인 유도체를 만들었다. 그러자 중심 탄소 사이의 거리는 100K(영하 173℃)에서 2.921까지 늘어났다. 이 상황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중심 탄소 사이의 공유결합을 이루던 전자 두 개 중 하나가 산화돼 빠져나온 것. 탄소와 탄소 사이의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이 탄생한 순간이다.
연구팀은 헥사페닐에테인 유도체를 보라색 결정 형태로 만든 다음, 단일결정 X선 분광분석법과 라만 분광법 등으로 구조를 측정했다. 그 결과 원자 사이의 연결관계를 검증해 진짜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이 만들어졌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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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트 법칙에 의하면, 이중결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선 이중결합을 이루는 탄소에 연결된 원자나 분자 등이 모두 같은 평면에 위치해야 한다. 축구공 같은 형태로 유명한 ‘버크민스터풀러렌(그림)’이 그런 사례다.
Yusuke Ishigaki
일본 도쿄대 화학과 연구팀은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이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헥사페닐에테인 유도체의 구조를 단일결정 X선 분광분석법으로 측정했다.
‘금단의 결합’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이유는
공유결합 개념을 이해하는 데엔 오래 걸렸지만, 사실 기자는 대학 시절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화학은 재미있는 학문이다. 특히나 유기화학은 비교적 명확한 형태를 지닌 유기 화합물의 특성과 이들 사이의 반응 등에 대해 살펴보는 분야다. 레고 맞추기 같아서 좋아했다(아쉽게도 학점이 높지는 않았다). 2024년 11월 1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 한 편에 십년 전 유기화학 수업에서 본 PPT 슬라이드가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다. 브레트 법칙에 대한 내용이었다. 브레트 법칙이란, 유기 화합물에서 이중결합이 절대로 위치해선 안 되는 곳이 있다는 내용이다.
‘다리-이고리(Bridged bicyclic)’라는 이름의 분자 형태가 있다. 영어 이름을 직역하면 더 쉬운데, 다리가 달린 자전거 형태란 뜻이다. 이름처럼 탄소로 된 고리 모양의 뼈대 위에 가운데 다리가 하나 놓여있는 모양이다(오른쪽 위 그림 참고). 브레트 법칙은 ‘고리와 다리가 연결되는 부분에는 이중결합이 위치해선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하면 이중결합이 분자의 입체적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과하게 비틀려야 하는데, 그 상태로는 결합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4년 11월 발표된 연구 결과는 브레트의 법칙에 정면으로 반한다. 닐 가그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화학 및 생화학과 교수가 이끈 연구팀은 브레트 법칙을 위배하는 화학물질 ‘반-브레트 올레핀(ABO텮nti-Bredt Olefin)’을 만들 방법을 고안했다. ABO는 구조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만들어봤자 형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릴 유사할로겐화물’이라는 물질을 가지고 ABO를 만들되, 구조를 안정시킬 수 있는 플루오린(F) 계열 화합물을 첨가했다. 그 덕에 ABO의 존재를 확인하고, 핵자기공명(NMR) 분광법을 활용해 구조를 검증할 수 있었다. doi: 10.1126/science.adq3519
전자 하나짜리 공유결합이나, 브레트 법칙을 위배하는 화학물질 모두 교과서에서 단호히 ‘안된다’고 말하던 것들이다. 과학자들은 안된다는 연구에 왜 자꾸 매진하는 걸까. 가그 교수가 보도자료를 통해 한 멋진 말이 있어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머지않아 화학 교과서에서 불가능에 부딪힌 유기화학자들의 시도들도 만날 수 있길 바라며.
“제약업계에는 신약개발을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화학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필요성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ABO를 만들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이걸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가능을 규정하는) 규칙들을 가져선 안 됩니다. 만약 불가능하다고 알려주더라도, 이것을 규칙보다는 조금 더 느슨한 가이드라인 정도로 알려야 합니다. 과학에 ‘극복 불가능한 규칙’을 만드는 건 연구에 있어서 창의성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자료: Science
브레트 법칙은 다리-이고리 분자 형태에서 고리와 다리가 연결되는 부분(붉은색)에는 이중결합이 위치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다.
그런데 2024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이 브레트 법칙에 반하는 ‘반-브레트 올레핀’을 합성했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