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시속 1200km로 비행기보다 빠른 ‘꿈의 열차’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른바 ‘하이퍼루프(Hyperloop)’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올해 5월 12일, 하이퍼루프원이라는 회사가 첫 시험 주행에 성공했다.
2km 달리면 시속 1100km 도달
“발사 5초 전. 4초, 3초, 2초, 1초.”
5월 12일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 설치된 하이퍼루프원의 시험 주행 트랙.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관제실을 축소한 듯한 공간에서 20~30명이 숨을 죽이고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모니터에 자동차처럼 생긴 물체가 미끄러지듯 레일을 따라 지나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곧이어 마치 우주 탐사선 발사에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이퍼루프원의 공동설립자인 쉐르빈 피쉐바르는 “세상은 오늘 밤 네바다 사막에서 일어난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하겠지만,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며 “우리는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별 것 아닌 시시한 영상에 호들갑을 떤 게 아니다. 지름 3m, 길이 500m에 이르는 터널을 0.001기압 정도의 진공 상태로 만든 뒤 차량을 레일 위에 자기력으로 띄워 사실상 ‘날아가게’ 만든 것이다. 최고 시속은 약 103km였으며, 이동 거리는 97m 정도였고, 작동 시간은 5.3초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과연 가능할까’라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던 하이퍼루프라는 개념을 현실화시키는 첫 단추를 채웠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현재 하이퍼루프원은 길이 8.7m 너비 2.7m 높이 2.4m인 버스만 한 열차 시제품을 만들어 주행실험을 진행 중이다. 7월 29일에는 해발 60km 높이의 대기압(약 0.0002기압)에 해당하는 진공 상태에서 437m의 거리를 최고 시속 310km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시험 주행 트랙의 길이가 짧아서 가속장치를 300m밖에 사용하지 못했는데, 이론적으로는 2km를 더 가속시키면 시속 1100km에 도달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100년 전 꿈 되살린 일론 머스크
진공 상태의 터널 안에서 달리는 열차에 대한 아이디어는 사실 100년도 전에 나온 개념이다. ‘해저 2만리’를 쓴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아들인 미쉘 베른이 1888년에 출간한 ‘미래의 기차’라는 작품에 최초로 등장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던 당시에는 그저 상상일 뿐이었지만 1980년대 들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스위스메트로는 1987년부터 2000년까지 13년간 0.1기압의 저진공 터널 안에서 자기부상열차가 최고 시속 500km 이상으로 달리게 만드는 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한국의 고속철도(KTX)처럼 여러 개의 차량을 이어 붙여 크고 무거운 자기부상열차를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하면서 비용이 걸림돌이 됐고, 결국 현실성이 없다는 판단에 잠정 중단됐다.
하지만 2012년 머스크가 하이퍼루프를 제안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하이퍼루프는 버스 하나 정도의 크기에 적은 수의 승객을 실어 나르는 시스템이라 건설 규모가 훨씬 작다. 머스크가 2013년 제안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구간 613km 건설비는 75억 달러(약 8조5612억 원)로, 현재 추진 중인 캘리포니아 고속철도 건설비의 약 10분의 1 수준이다. 머스크는 요금도 편도 20달러 정도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때부터 많은 기업들이 하이퍼루프의 개발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로 여섯 시간 이상 걸리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불과 30분 만에 주파할 수 있고 요금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현재 하이퍼루프원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민간 회사 여섯 군데가 하이퍼루프 개발에 뛰어들었다.
3년 먼저 시작한 국내 ‘하이퍼튜브’
“우리는 머스크가 하이퍼루프를 제안하기 전부터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8월 7일 경기도 의왕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만난 이관섭 하이퍼튜브 연구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서는 ‘하이퍼튜브’라는 이름으로 하이퍼루프와 동일한 개념의 초고속 열차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심지어 머스크가 하이퍼루프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2012년보다 3년 일찍 연구를 시작했다. 민간 주도로 개발 중인 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을 중심으로 한국건설기술연구원과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이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 팀장은 “하이퍼루프원이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 있지만, 그들이 제시한 기술은 국내에서도 이미 확보한 상태”라고 말했다. 2010년 실제의 52분의 1 크기로 줄인 열차 모형을 0.2기압에서 시속 700km로 주행시키는 데 성공했다.
2011년에는 콘크리트로 진공 터널(튜브)을 건설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압축 강도를 높여도 콘크리트는 기체를 통과시키는 성질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진공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확인됐다.
2015년에는 최고 시속 550km로 달리는 무게 28t(톤) 자기부상열차를 제작해 150m 길이의 시험 구간에서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팀장은 “하이퍼루프 기술에서는 한국이 가장 앞섰다고 자부한다”며 “앞으로 실제 실험에서 누가 먼저 시속 1200km를 돌파할지를 놓고 주도권 싸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서울~부산 400km 구간에 하이퍼튜브를 설치하면 20분이면 충분하다. 하이퍼튜브의 지름이 3~4m로 작은 편이어서 가지를 치듯 도시 내의 다른 지역으로 길을 내기 쉬운 것도 장점이다. 이 경우 전국이 ‘30분 생활권’이 된다.
이 팀장은 “하이퍼튜브는 KTX보다 건설비가 저렴하다”고 설명했다. KTX 건설비의 약 70%가 토목공사 비용인데, 하이퍼튜브의 경우 열차 크기가 작은 만큼 터널의 단면적이 KTX와 비교해 110m2에서 30m2로 약 4분의 1 크기로 줄어든다. 또 KTX 무게가 40t(톤)이라면 하이퍼튜브는 절반인 20t인 만큼 교각의 두께를 포함해 부대시설이 대폭 줄어든다. 서울~부산 구간의 평균 건설 비용은 km당 약 205억 원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현재 운영중인 호남고속철도(388억 원)의 53% 수준이다.
‘진공 터널’ 건설이 관건
하이퍼루프원과 하이퍼튜브 모두 열차를 만들 수 있는 기본적인 기술은 갖췄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다. 최고 난이도로 꼽히는 기술은 진공 상태를 유지하는 터널을 건설하는 일이다. 수십 m2 단면적에 수백~수천 km 거리에 이르는 큰 터널을 0.001기압 수준의 진공 상태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하이퍼루프원은 철제 터널을 만든 뒤 용접으로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시험 주행 트랙을 만들었다. 현재까지는 이 방식이 터널 건설에서는 가장 유력한 기술로 꼽힌다. 하지만 철로 터널을 지을 경우 자성을 이용하는 자기부상열차의 부상과 운행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어서 다른 재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터널에 얇은 막을 코팅하는 방법으로 공기가 새어 들어가는 현상을 막는 밀폐 기술을 연구할 계획이다. 완벽하게 밀폐시킬 수만 있다면 콘크리트로도 터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철을 쓰더라도 완전한 밀폐는 불가능한데, 한 번 더 코팅을 해 주면 진공 유지 성능을 높일 수 있다. 연구팀은 현재 탄소섬유시트 등을 후보재로 염두에 두고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백종대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도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장비 구축을 끝내고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했다”며 “온도와 기압 변화에 따른 막의 특성 변화를 연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터널은 지상뿐 아니라 지하와 바닷속에도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공기뿐 아니라 물과 압력 등에도 견딜 수 있는 재료와 건설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그밖에도 승객의 안전을 확보하는 기술 등 아직 개발해야 할 기술들이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가 새로운 교통수단을 기대하는 이유는 더 빠르게 이동하고자 하는 바람과, 경제적인 효과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하이퍼루프원의 조사 결과 100개국 이상이 하이퍼루프 설치를 희망했다. 희망 노선은 2600개가 넘었다.
모든 노선에 건설할 수는 없겠지만, 100개국에 한 노선씩 설치한다고 가정하면 노선 당 건설비를 10조 원으로 잡았을 때 1000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시장이다. 한국처럼 땅이 작은 나라가 하이퍼튜브를 먼저 개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가 먼저 시속 1200km를 달성하고 차세대 초고속 교통수단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될지 계속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