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로서 아이에게 유전병을 물려주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을까요. 그래도 최근엔 막을 방법이 생겼습니다.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 수정란을 만든 뒤, 이것이 4-8세포기(수정 후 2~3일)가 될 때 미리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거든요. 검사를 통해 유전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가 없다는 게 확인되면 안심하고 배아를 엄마의 자궁에 이식하는 거죠. 그런데 이 과정도 부모에게는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포라고 해봐야 달랑 4개 또는 8개 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전자 검사를 한답시고 하나를 떼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걱정은 발생 초기 배아의 엄청난 적응력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수정란이라는 하나의 세포는 훗날 하나의 개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거듭해 형성된 4세포기, 8세포기의 배아에 있는 각각의 세포도 수정란처럼 개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죠. 하나 정도 뗀다고 해서 남은 것들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일란성 쌍둥이가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초기 배아의 세포들이 둘로 분리된 이후에도 각각 완벽한 개체를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이런 사실은 실험을 통해 입증됐습니다. 그리스 파트라의 불임전문병원 연구팀이 8세포기의 배아에서 세포 4개를 떼어 내 다른 배아에 넣어 관찰했더니, 세포를 잃은 기존의 배아와 분리돼 나온 네 개의 세포 모두 착상 전의 배아 상태까지 정상적으로 발달했습니다(doi:10.1016/j.mefs.2010.05.001).
적응력으로 태어난 돌연변이 쥐
어린 배아의 끝내주는 적응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배아는 외부에서 세포가 몇 개 더 들어와도 문제없이 개체를 만들어 냅니다. 한 예로 하얀 털을 가진 쥐 한 쌍을 교배해 수정란 A를 얻고, 털이 검은 쥐 한 쌍을 교배해 수정란 B를 준비한 뒤, 두 수정란이 8세포기에 접어들 때 합치는 실험이 있습니다. 수정란의 세포 수가 8개에서 16개로 갑자기 두 배 늘어나도 문제가 없었죠. 배아는 정상적으로 발달했고, 태어난 쥐에서는 흰색과 검은색 털이 둘 다 자랐습니다(그림).
과학 연구에 많이 쓰이는 돌연변이 쥐 역시도 어린 배아의 놀라운 적응력을 이용해 만들어집니다. 돌연변이 쥐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배아줄기세포에서 연구 주제인 유전자를 변형시킨 뒤, 이것을 수정 후 5~6일이 지난 다른 정상적인 배아에 주입합니다. 배아는 세포 수가 조금 늘어나도 이에 아랑곳없이 발달을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쥐가 생식 세포에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교배를 통해 원하는 형질의 돌연변이 쥐를 만들어냅니다.

최근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병원 연구재단 연구팀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임신한 어미 쥐의 자궁을 보면(자궁과 배아가 연결된 부위) 배아 세포 안에 엄마의 자궁벽 세포가 쏙 들어가 있다는 것을요. 이것은 배아 세포가 엄마 세포를 먹어버렸다는 뜻입니다(doi:10.1016/j.celrep.2015.03.035). 아직 인간의 배아로는 실험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만약 같은 방법으로 착상을 한다면 우리는 생긴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상태에서 엄마의 세포를 먹어버리는, 생애 첫 불효를 저지르는 셈입니다.
태아 세포와 엄마 세포의 끈끈한 관계
착상 뒤에 배아는 본격적으로 엄마로부터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을 태반을 발달시킵니다. 배아 안쪽의 세포들은 세포 분열을 하면서 태아로 발달하고요, 바깥쪽 세포들은 세포 분열을 한 뒤 융합해서 여러 개의 핵을 갖는 하나의 세포를 만들어냅니다. 신기한 것은 이 세포 안에 자연스럽게 빈 공간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빈 공간은 엄마의 혈관과 연결돼 엄마의 혈액으로 채워지고, 이 공간에 태아의 혈관이 들어와 영양분과 산소의 선택적 교환이 일어납니다(그림).
이때 엄마와 태아의 피는 섞이지 않습니다. 만일 태아의 혈관이 엄마의 혈관과 직접 이어져 있다면 문제가 심각했을 겁니다. 엄마의 혈압을 태아의 혈관이 견디지 못할 뿐만 아니라, 둘의 혈액이 섞여 응고될 경우 엄마와 태아 모두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다만 가끔은 태아의 세포가 엄마의 몸에서, 또는 엄마의 세포가 태아에게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임신 20주 여성들의 혈액 속 DNA는 20%가 태아의 것이라고 합니다(doi: 10.1073/pnas.0808319105).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임신부의 혈액을 채취해서 태아의 유전자 검사를 하는 기술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가까운 미래에는 태아의 유전자를 검사하기 위해 더 이상 가늘고 긴 바늘을 산모의 배에 찌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엄마 몸에 들어온 태아의 세포는 대부분 엄마의 면역 시스템에 의해 사라집니다. 그러나 엄마의 몸속에 자리 잡아, 출산을 한 지 10년이 넘도록 남아 있는 세포도 있습니다. 이렇게 남아있는 태아 세포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합니다(doi:10.1002/bies.201500059). 엄마의 상처 치유 과정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도 있고요, 엄마의 암세포 중 태아 세포가 발견되면서 이들의 존재가 유해하다는 의견도 있고요. 태아와 엄마의 관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끈끈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