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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사나 항성계에서의 끔찍한 퀘스트 이후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지루할 정도로 따분한 퀘스트라는 게임 마스터의 말만 믿고 행성 불부사의로 갔다. 불부사의는 최근에 발견된 변방 중에서도 변두리 행성으로, 비정기적으로 가동되는 말단 링크에서 다시 정상 항법으로 일주일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물론 나는 내내 잤다).

행성 불부사의에서의 퀘스트는 정말 단순했다. 최근 발견된, 멸망한 외계 종족의 오래된 도서관에서 장서들을 스캔하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도서관을 발견한 탐색 팀이, 두둑한 게임 포인트를 챙겨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탐사 장소로 떠나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잡동사니로 어지러운 도서관 로비에서 나는 우리 팀과 처음으로 만났다. 나만큼이나 지친 표정의 노인(그랬다. 그 나이대에나 선택할 퀘스트였던 거다)과 안경을 쓴 아줌마였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줌마가 왜 이런 퀘스트에 낀 거지? 어쨌거나 서로 계정명을 교환하고 게임 마스터가 정해주지 않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서로 나누어 맡았다.

정말 한가한 퀘스트였다. 나는 가장 단순하게 선반들에서 책들을 옮겨오는 일을 맡았고 노인은 그걸 하나하나 스캔하고 저장하는 일을, 아줌마는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작업 순서나 다음 캠프 위치를 정하는 일을 맡았다. 캠프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서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캠프라고 해봐야 각자 가져온 1인용 텐트와 게임에서 제공한 작업용 대형 텐트가 고작이라 옮기기는 쉬웠다. 캠프가 움직인 경로를 따라 서가들은 텅 비고 오래된 책들이 줄지어 쌓였다(책은 플라스틱 필름이나 마이크로 칩이 아니라 플라스틱판에 문자를 새긴 기괴하리만치 원시적인 기록 장치였다).

아침이면 그날 당번이 카페인 수용액을 데우고 식사를 준비했다. 노인과 나는 주로 탄수화물 큐브를 썰어 토스트를 구웠고, 아줌마는 대개 액상 단백질로 오믈렛을 만들었다. 식후에는 밤새 궤도 스테이션이 다운받아 놓은 몇 달 전의 예능 프로그램이나 뉴스 피드를 틀어놓고 잠시 쉬었다가 오전 작업을 시작했다. 내가 전날 아줌마가 체크해놓은 서가에서 낡은 플라스틱판들을 꺼내 전동 수레에 싣고 오면 노인은 작업용 텐트에서 판들을 늘어놓고 입체 사진을 찍고 파일들을 정리해서 궤도 스테이션으로 송신했다. 탁본을 떠서 스캔하기도 했다. 오전 작업이 끝나면 캠프 입구에서 압축 공기로 몇 만 년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들어와 점심을 먹고 한 시간쯤 쉬었다(대개는 낮잠을 잤다). 오후 작업도 오전이랑 똑같았다. 오전 오후 네 시간씩(멀오지 기준으로) 일하고 나면 씻고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잠을 잤다. 대개는 아침에 보다 만 뉴스나 예능을 보며 시덥잖은 잡담이나 했지만, 어떨 때는 갑자기 진지하게―대개는 노인이 합성한 알코올 수용액을 마신 날이었다―각자 전에 했던 퀘스트를 이야기할 때도 있었고, 노인이 연주하는 이름 모를 악기에 맞춰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 아줌마의 목소리는 여자답게 가늘고 고와서 듣기가 참 좋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줌마에게는 말 걸기가 어색하고 마주 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도대체 탐사 퀘스트에서 여자라니?

언젠가 하루는 결국 물어봤다.

- 애 낳는 게 게임 포인트가 더 많이 나오지 않아요?

아줌마는 푸핫 웃었다.

- 그거였구나? 애나 낳고 있어야 할 여자가 여기서 뭐하냐고? 아이고, 여자가 붙여놓은 꼬리표 따라가며 일하느라 힘들었겠네?

- 그런 거 아니에요!

- 미안한데, 너 같은 남자애들 많이 봤어. 사실대로 말하자면, 애도 낳아보긴 했지. 대학 갈 때 게임 포인트가 많이 필요했거든.

- 대학에 갔다고요?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는 어린 애들이 게임 포인트를 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지 않나. 학교에 다니지 않고도 게임 포인트를 딸 수 있다면 어른이 된 거고. 오히려 게임 포인트를 내고 학교에 갔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 넌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막 아무렇게나 꼬리표들을 붙이고 다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옆에서 노인이 쿡쿡 웃었다.

-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막 아무렇게나 경판들을 인쇄하고 스캔하는 건 맞지만 박사님도 그러는 건 아냐. 박사님은 정보 패턴 분석학 전공이라고.

- 정보패턴 분석학? 그건 또 뭐에 쓰는 거예요?

- 뭐에 쓰겠어, 이런 데서 몇 만 년 묵은 책들에 꼬리표 달고 다니는 데 쓰지.

아줌마가 혀를 내밀었다.


*
 

도서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도 있다.

- 정말 원시적인 종족들 아녜요? 이러니 멸종됐지.

아줌마가 웃었다.

- 무슨 소리야?

- 이 기록 장치 좀 보세요. 정말 바보 같지 않아요? 합성 플라스틱을 사용할 수 있었으면서 도대체 왜 전산화하지 않고 이렇게 멍청하게 글자마다 직접 판에 새겨 놓은 거죠? 최소한 플라스틱 디스크나 천공 카드라도 만들 수 있었을 거 아녜요. 전기가 무서웠나?

- 전자 시스템은 빠르긴 하지만 안정적이진 않지. 도서관 밖에 나가보진 못했지만 다른 유적들에는 분명히 전산 자동화 시스템이 있었을 거야. 여긴 일종의 영구적인 백업 시스템 같아. 아마 문명 이후를 예상해서 세워놓은 건지도 모르지. 물론 정말 그렇게 돼서 문자마저 소실되면 별 수 없지만. 아니면 자신들의 멸종을 예상하고 남겨둔 기념비… 혹은 묘비인지도 몰라. 물론, 어쩌면 네 말대로 멍청한 외계 종족이 자기 디스크랑 디지털 연산을 몰라서 멍청하게 일일이 대출 카드 작성하고 손수레에 플라스틱판을 날라다 찍어서 대출하고 살았을지도 모르긴 해. 그렇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이지 않았을까?

멍청해 보이긴 해도… 그거 알아? 지금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곳은 이 도서관의 일종의 장서카드 함에 해당해. 이 도서관을 한 질의 백과사전… 혹은 한 권의 책이라고 하자면 일종의 인덱스 혹은 목차겠지.

- 그걸 어떻게 압니까?

잠자코 있던 노인이 묻자 아줌마는 스캔 후에 쌓아놓았던 종이 무더기에서 한 장을 꺼내왔다.

- 시각적으로 바로 패턴이 보이지 않나요? 위 문단은 책 이름이나 주제, 내용, 아래 문단은 해당되는 서가 위치나 판 번호일 거예요. 아래 문단에 사용된 문자들은 종류가 많지 않아요. 아마 주로 숫자나 기호겠죠.

노인이 웃었다.

- 이런, 지금까지 몇 천 장이나 스캔했으면서도 한 번도 생각을 못해봤네.

아줌마도 웃었다.

- 모르죠. 그냥 추측한 거니까. 어쩌면 주소록이나 전화번호부일지도 몰라요. 세금 계산서나 빨래 영수증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살지는 않았을 거예요. 적어도 도시 규모로 도서관을 지은 존재들이라면….


*
 

게임에 관해서 :
- 옛날엔 사람들이 플레이어였던 적이 있었지.

셋 다 이상하게 잠이 안 오던 밤, 불콰하게 취한 노인이 말했다.

- 지금은 아녜요?

내가 묻자 노인은 우울한 얼굴로,

- 아니지. 이제 우린 모두 게임의 유닛들일 뿐이야. 플레이어는 게임 자체지. 게임이 우릴 움직여서 게임하고 있는 거야.

- 그럼 게임 상대는 뭔데요?

술잔을 홀짝이던 아줌마가 끼어들었다.

- 우주 전체?

노인이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할아버지나 저만 한 생각은 아녜요.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한 이야기예요. 옛날에는… 사람들은 게임 밖에서 살았다고 하죠. 아주 가끔씩만, 게임 안에 들어와 자신의 대행 유닛, 혹은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복수의 유닛을 움직였다고 해요. 게임 포인트는 게임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였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게임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어요. 게임이 사회를 삼키고, 플레이어가 되어 우리를 유닛으로 부리고 있죠.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게임에게 정복당했다고 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어딘가 외계에서 흘러온 사악한 게임에 우리들이 현혹되어 게임 속에 갇힌 거라고도 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인류와 게임이 공생 진화한 결과일 뿐이라는 쪽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이에 따르면, 지금의 게임은 일종의 여가 산업이던 게임 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면서 교육과 행정을 차츰차츰 흡수하고 대체한 것이 출발이었다죠.


게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게임이 세상을 삼키면서―문명이 게임화되면서 삶이 죽었다고 해요. 인간이 플레이어에서 유닛으로 전락했으니 당연한 결과라는 거죠. 이제 우리에게 겨우 채집, 채굴, 제련, 조립, 파종, 경작, 수확 등 단순한 작업을 하는 자동화 기계들을 관리하는 일만 남은 것도 사실이긴 해요. 아니면, 외계를 탐사하고 외계인들과 전쟁하거나. 그것도 겨우 남자들에게나 가능하죠. 게임의 논리에 따르면, 우주로 끊임없이 진출, 확장하기 위해선 인구 증가가 필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여성은 게임에게는 함부로 내돌릴 수 없는 귀중한 유닛이죠. 상대적으로 남성은 끝없이 소모해도 괜찮은 유닛이고요(물론 여성들이 끝없이 재생산해준다는 전제하에서요). 이건 게임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강요한 삶은 아니에요.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게임 이전에도 인류의 삶은 비슷했다고 하니까. 어쨌거나, 우리-게임은 이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모되는 남성 유닛을 예찬하고, 보존되어야 하는 여성 유닛의 가치를 폄하하고 있죠. 외계 탐사 퀘스트에 여자가 나오는 걸 어색해하고 못마땅해 하는 남자들이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에요(아줌마는 나를 보지 않았지만,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극단적인 사람들은 게임이 문명과 사회만 삼킨 게 아니라 우리 인류 자체를 삼켰다고도 해요. 이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우주에 있는 게 아녜요. 게임이 만들어낸 가상 우주 속에서 게임이 디자인한 행성들을 탐험하고 외계인들과 싸우고 있는 거죠. 우리가 가상 우주에 빠지게 된 건 게임이 우리 감각 기관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실제 우주에서는 게임을 돌리는 행성 규모의 컴퓨터나 유지 보수하면서 게임 안에서는 외계를 탐험하고 외계인이랑 싸우고 있는 걸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죠. 너무 형이상학적인 가설이지만, 지금까지 게임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걸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있어요. 물론 반론으로는 인류의 확장이 그렇게 순조로운 편이 아니고, 게임의 완벽한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도 게임이 각 상황에 최적의 해답으로 퀘스트를 구성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덕분이라는 거죠. 아시겠지만 게임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는 유사 신앙이 있는데, 이 반론은 그에 대한 비판도 돼요.


아무튼, 제가 좋아하는 가설에 따르면,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유통 운송 분배하고 가장 효과적인 성장 경쟁 승리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게임이, 실제 우주에서 실제로 구체적인 생산과 수송, 탐험과 채집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인류와 결합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었다고 해요. 게임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변혁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틀이에요 (역으로, 게임에게도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변혁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겠고요). 최신의 고고학적 탐구 결과에 따르면 게임 이전 세계에서 인류는 급격한 산업화와 정보화로 확장된 세계에 대한 조망과 통제 능력을 상실한 채 암울한 혼란기를 보내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게임이 사회 구조 전체를 전면 개편하고 재구조화한 덕분에 혼란기에서 빠져나와 우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거죠.

노인이 쓰게 웃었다.

-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어. 그냥, 이 나이에 지난 삶을 돌아보니, 게임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게임은… 난 게임을 그렇게 추상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러다 문득, 내가 한평생 게임 마스터들 말에 따라 게임 포인트만 좇아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재미있게도 문득, 게임 마스터들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게임 마스터를 마스터링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결국은 모두들 게임 마스터도 아니고 플레이어도 아니고 다만 유닛들일 뿐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그런데 아줌마가 심각하게 받았다.

- 저도 보고 싶어요. 게임 마스터들 위의 최상위 마스터요. 아마도 게임 자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인공지능과는 또 다른 것일 거예요. 외계의 사악한 인공지능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정보 패턴 분석학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한숨처럼 덧붙였다.

- 평생 꿈이에요. 가서 보고 싶어요. 멀고-오랜-지구에 가서 게임의 핵심을 보는 거예요.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언젠지도 모르게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숙취로 골머리를 앓으며 애꿎은 노인만 원망했다.

오래된 도서관에는 유령들이 산다.

퀘스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농담처럼 아줌마가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말로 캠프 안팎에서 알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소한 잡동사니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같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물건들이 뒤섞여 있는 일들이 생겼다.

나는 아줌마한테 짜증이 났다. 누가 여자 아니랄까봐 정리정돈은커녕 제멋대로 들쑤시고 헤집어 놓은 주제에 도서관 유령이 어쩌고 하는 되먹지도 않은 변명으로 넘어가려는 거 같아 열이 받았다. 대놓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점점 더 얼굴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나고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받아주기 싫어졌다. 늙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희미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인도, 박사님 박사님 어쩌고 하면서 눈에 뻔히 보이는 아줌마 잘못을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뭐라고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다보니 작업에서도 실수가 많아졌고, 그게 내 탓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아니까 더 짜증이 났다. 나중에는 노인도 나를 보면 아무 말 안하고 고개를 돌리곤 했고, 나는 그게 차라리 편하다고, 바보 멍청이 거짓말쟁이 사기꾼 나부랭이들이랑은 어울리지 않겠다고 마주 고개 돌리곤 했다.

그렇지만 정말 바보 멍청이는 나였다.
 
*

몇 차례인가 그런 일이 생기자 노인은 캠프 주위에 동작 감지기를 설치했다. 유령이 동작 감지기에 걸리겠냐고 아줌마가 웃었지만 노인은 혼자서 끝까지 동작 감지기를 설치하고 세팅했다. 그리고 어느 날, 여느 날처럼 오전 작업 중인데 동작 감지기가 일제히 빽빽 울기 시작했다. 게임 마스터는 공용 화물에 가장 기본적인 화기만 몇 정 넣어주었고, 어쨌거나 나는 경보기가 울리자마자 반사적으로 캠프로 뛰어 들어가 레이저 소총을 꺼냈다. 그런데 도서관 전체가 시끄럽게 울리며 경보기 소리를 압도했다.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마찬가지로 캠프로 뛰어오는 노인과 아줌마를 보았는데,

그 뒤로는 온통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이고 시각 센서가 새빨갛게 빛나는 거대한 로봇들이 쫓아오고 있었고―

돌연 도서관 천장을 뚫고 세 개의 거대한 금속 큐브가 캠프 중앙에 내려 꽂히고―
시야 한쪽에 게임의 긴급 메시지가 떠오른다 :

=퀘스트 목표 긴급 수정

- 배경 :
가. 사멸한 외계 종족의 도서관에서 자체 방어 시스템이 활성화되었다!
나. 정체불명의 거대 질량체가 궤도 스테이션 주변에 출현했다!

- 분석 :
가. 탐사팀이 최근 스캔한 외계 종족의 문건에 중요한 기밀이 담겨 있음
나. 자체 방어 시스템 활성화 및 정체불명의 거대 질량체 접근은 이와 관련됨

* 수정된 퀘스트 목표
1. 궤도 스테이션이 중앙 서버로 최근 업로드한 데이터 송신을 마칠 때까지 방어할 것
2. 도서관 방어 시스템의 공격을 무효화할 것
# 남은 시간 14분 35초 #


금속 큐브들이 순식간에 동력 장갑복 세 개로 전개된다. 그 중에 하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근접전 전용 보병 마크VIII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탄다.

인공 근육으로 움직이는 두터운 복합장갑 외골격으로 온몸을 감싸고 3.5m에 달하는 신장에서 내려다보는 대역폭 확장 시야에 접속해 주위를 둘러보자 무엇이든 부술 수 있다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신경계가 불타오른다 (사실은 접속과 동시에 혈관에 각종 각성제와 흥분제가 투여된 까닭이다). 노인과 아줌마를 뒤쫓는 괴물들에게 어깨 위의 주포에서 120mm 열화우라늄탄을 아광속으로 발사한다. 껍질이 으깨지고 체액이 기화한다. 등 뒤에서도 괴물들이 달려들지만 장갑판을 두른 외골격 기계팔로 막아내고 땅에 내팽개친 다음 발로 밟아 부숴버린다. 다시 후방 시야 센서에 노인과 아줌마도 각각 동력 장갑복에 올라타는 게 보인다. 그나저나 궤도 스테이션을 어떻게 보호하라는 거지?

노인이 올라탄 동력 장갑복이 그 답이다. 짧고 굵은 허리와 다리에서 다시 몇 개의 보조 다리가 마치 게나 거미처럼 사방으로 펼쳐진다. 어깨와 등에서는 엄청나게 길고 굵은 포신이 단계적으로 전개된다. 망할. 저건 이름만 들어봤다. 보는 건 처음이다. 궤도 스나이퍼. 소행성대나 지상에서 궤도 위의 전함을 저격하는 장갑복이다. 노인이 신중하게 조준하고 발사하자 엄청난 굉음과 충격파가 주위로 퍼져나간다. 그럼 아줌마는?

아줌마의 전자전용 레이더 수트 4.0은 후두부에서 연장된 원반형 메인 안테나가 회전하고, 도서관 내부 통신망의 주파수를 검출하는 동안 자동화된 개인 방어 시스템이 레이저로 결계를 생성하고 탄환을 쏟아낸다. 그리고 나는….

나는 다시 게임과 사랑에 빠진다. 게임은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의 이 조합, 이 목표, 이 난이도, 이 자극, 이 흥분, 이 속도, 이 힘, 이 쾌감. 게임은 완벽하다. 게임 위에서 내 삶은, 나는 이 한순간에 타오르고 빛난다. 다음 순간 게임에 패해 죽는다 할지라도 전혀 아쉽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온몸으로 게임 깊숙이 잠겨 게임할 수 있다는 것이 다만 감사할 뿐이다. 노인은 궤도 저격 대공포를 쉴새없이 쏘아올리고 아줌마는 도서관의 활성화된 신경망에 접속하기 위해 삑삑거리며 한편으로는 컴퓨터로 계산된 탄막을 거침없이 흩뿌리고 나는 그 사이로 미친 듯이 움직이며 멀리 있는 것은 쏘고 가까이 있는 것은 벤다. 오로지 전투용으로만 설계된 내 장갑복에는 기계손 대신 회전식 다연장 극초음속 기관포가 탑재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총검처럼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청백색 불꽃을 날름대며 뻗어 나와 있다. 나는 춤추는 포대, 플라즈마 가시를 단 장미다. 한손을 휘두르면 도서관 지네들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또 한손을 휘두르면 도서관 전갈들이 부서져 흩뿌려진다.
# 남은 시간 11분 02초 #

4분 30초대까지,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녀석들의 공세를 막아낸다. 집게 턱과 발톱이라는 원시적인 무기만 가진 녀석들의 물량 공세는 내 장갑복의 화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궤도 스테이션에서 두 번 탄창 컨테이너를 강하해 줘서 잔탄도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이 다음 공격을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래서 30초 정도 지난 뒤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대하기는 아주 까다로웠다. 숫자가 거의 소진된 지네, 전갈 유닛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나온 것은 마크VIII과 거의 유사한 외양의 인간형 유닛 네 기였던 것이다.

이런 망할. 성능도 비슷할까? 물론 장갑복끼리 다대일 전투 경험이 몇 번 있긴 하지만 훈련이 아니라 실전에서라면 이대일 정도가 간신히 한계였다. 유일하게 믿을 건 녀석들이 장갑보병 운용 교리를 모를 거라는 거, 그리고 희미하게, 녀석들이 과연 인간형이었을까, 이쪽에 맞춰서 인간형 병기를 흉내낸 거라면 어딘가 어색한 계산 착오, 동작 지연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깔렸다. 아, 망할 최소한 삼대일만 되어도….

네 기가 앞으로 나오더니 멈춰 선다. 아하,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아직 잘 모르시겠다? 보고 배우시겠다 이거군. 나는 이 괴물들이 장갑보병 전술을 배웠을 때의 결과가 두렵다. 아무리 인공 근육이 장갑 외골격을 움직여준다 해도 운동 피드백을 위해선 미친 듯이 팔다리를 놀려야 했고, 이제 근육은 모두 녹아내릴 듯하고 신경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다.
# 남은 시간 4분 8초 #

[왼쪽 둘은 내가 맡을 게] 갑자기 내부 통신망이 켜진다. 뭔 소리야, 옆에서 아줌마의 레이더 수트가 통신용 백팩을 탈착한 채 뛰어나온다. 왼쪽에서 두 번째를 향해 탄막을 퍼부어서 견제하고 왼쪽 끝에게 달려들어 두 발로 상체를 걷어차 버린다. 전자전용 장갑복으로 뭐 저런 짓을 다해? 어쨌거나 나도 오른쪽 두 녀석 중 하나를 핸드건으로 견제하고 다른 하나를 주포로 쏴버린다. 주포로 녹아내린 놈 옆에서 달려 나오는 녀석의 목을 플라즈마 블레이드로 날려버리고 아줌마가 견제해놓은 왼쪽 녀석도 주포로 해결한다. 그 사이 넘어진 녀석을 기계손으로만 해치운 아줌마가 일어선다. 그러니까 자기 기계팔을 뽑아서 녀석의 가슴에 박아버린 거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말문이 막히는데 통신망이 다시 달각거린다.

[마크VIII 실전 경험은 너보다 많을 걸? 못 믿겠지?]

응. 믿기 힘든데, 그래도 방금 보여준 움직임은 고참병들이나 할 만한 것이긴 했다.

[도서관 해킹은 어쩌고요?]

[괜찮아. 이제 자동 연산만 남았어. 한 3분이면 돼.]
# 남은 시간 2분 53초 #​

좋아. 내 장갑복도 군데군데 패이고 깨지고 뚫리고 부서졌지만, 어쨌거나 살아남았고, 시간은 잘 가고 있다. 남아 있던 가시 전갈과 바늘 거미들이 다시 달려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여유 있게 두드려 부순다. 그쪽이 시간을 끌수록 이쪽도 시간을 끌 수 있다. 나쁘지 않다. 탄창을 갈고 물을 마시고 내부를 환기시킨다.

[조심해. 마지막 한 방이 남아 있을 거야.]

여전히 바쁘게 대공포를 쏘아 올리면서 노인이 말한다. 알아요. 안다고요.
# 남은 시간 58초 #

그리고 최후의 반격이 시도된다. 그동안 너무 많아서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휑한 도서관 로비 폐허에서 마지막 괴물이 생성되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갑자기 생성된 전자 회오리 속에서 쌓여있던 경판들이 분자 구조 변환되어 장갑병 형상으로 조립된다. 망할. 정말 책 속에 귀신이 들어 있었고만(도대체 어떻게 그 플라스틱에서 마크VIII급 장갑을 만들어낼 수가 있지?).

이번에 나타난 것은 아까와 비슷하지만 살짝 더 크고, 훨씬 더 굵고 뾰족한 가시가 여기저기 많이 나있고, 팔다리 관절이 인간과는 다른 각도로 형성되어 있다. 도서관 괴물계의 마크IX이라고 할 만하다. 아니면 마크X일까? 훨씬 능숙하고 자신감 넘치는 움직임을 보인다. 좋아. 아무튼 학습하고 개선하긴 했겠지. 하지만 얼마나? 바로 그 얼마나가 중요하다. 옆에서 아줌마의 장갑복도 긴장한 듯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 남은 시간 42초 #​

이런 젠장, 갑자기 뒷골이 당긴다. 이건 앞서 전투의 거울상이다. 이대일 전술을 녀석이 제대로 학습했다면 아까의 우리와 똑같이 한쪽을 화력으로 견제하고 다른 한쪽을 격투로 상대하겠지. 숫자로는 우리가 우위지만 녀석의 스펙을 알 수 없으니 확신할 수 없다. 젠장! 젠장! 그런데 그때,

[니가 잡아, 내가 어떻게든 끊을게.]

도대체 어떻게요? 싶지만 시간이 없다. 고참이 까자면 까는 거다. 놈을 향해 달려들고, 다음 순간 튕겨져 나간다. 뭐냐, 믿을 수가 없다. 흉부 장갑이 다 날아갔다. 녀석이 한쪽 핸드건으로 날 견제하고 아줌마에게 달려든 건데 핸드건이 거의 주포 급이다.
# 남은 시간 36초 #​

아줌마는 레이더 수트라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으로 녀석의 공격을 연속 회피하지만 이미 몇 군데 장갑이 날아갔다. 이런 젠장. 경보음 따위 무시하고 일어나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최대한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도약한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게임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게임의 아름다움을, 그 완벽함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나는 순간의 영원 속에서 게임의 맨얼굴을, 그 무시무시하게 냉혹하고 잔인하며 아름답고 숭고한 표정을 본다. 그리고….

녀석이 허물어진다. 먼지로 흩어져버린다.

= 퀘스트 완료 : 도서관 방어 체계가 무력화되었습니다. 궤도상의 미확인 질량체도 퇴각합니다.

멍하니 서있던 아줌마가 백팩으로 가더니 기계손가락 두 개를 V자 모양으로 펴든다. 도서관 해킹에 성공한 거군.

- 아 쫌! 한참 재밌었는데! 진짜!
# 남은 시간 0초 : 데이터 전송 완료! #

궤도 스테이션은 오후에 셔틀을 강하시켰지만 우리는 하루를 꼬박 쉬고서야 간신히 떠날 수 있었다. 게임은 바로 그 데이터를 찾기 위해 우리를 보냈던 거였고, 찾았으니 퀘스트도 끝난 거였다. 뭐에 관한 데이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궤도상에 형성된 괴 질량체도 아마 그와 관련된 것이었을 거다. 대개 수상한 데이터베이스 근처에는 온갖 탐사체들이 고여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찾아서 디코딩하면 가로채기 위해 수억 년씩 기다리는(그거야 말로 진정한 도서관의 유령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종일 간이 식량이나 축내며 뒹굴대는 동안, 아줌마는 이런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어쩌면 여긴 도서관 인덱스가 아니라 은하계 주소록이었던 건지도 몰라요. 게임은 뭔가 중요한 주소를 찾아낸 거죠. 노인과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각자 갈 곳이 달랐기 때문에 궤도 스테이션에서 우리는 각자 따로 우주선을 타고 링크 포인트로 갔다. 탑승 전에 작별 인사를 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인공 동면을 했다.

그 뒤로 노인과 아줌마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아줌마는 과연 멀오지에 갔을까? 알 수 없다. 노인은 어떻게 됐을까? 궤도 저격병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도서관 스캔 같은 시시한 퀘스트에 끼었을까?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그 뒤로도 나는 수많은 퀘스트를 했다. 오리온자리에서 아메바 외계인들에게 장갑복 째 먹히기도 했고 여래상해 행성에서 이 년 동안 밀림 속을 혼자 헤매기도 했다. 납으로 된 늪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고 가스 행성에 강하하기도 했다(보병은 어디서나 쓸모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때 그 궤도 저격병 노인네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이세간 행성의 도서관 도시에 게임 포인트를 모두 기부하고 방문 연구원 명목으로 방을 하나 얻어 지내며,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서가 사이를 산책하며, 틈틈이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니 이상하게도 그때 그 퀘스트가 떠오르고, 아줌마가 했던 이야기들이 곱씹힌다. 그리고 비로소 어렴풋이, 게임의 아름다움에 대해, 완벽함에 대해, 전능함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기초 학교만 나오고 곧바로 보병 교육대에서 훈련 받은 나로서는 아줌마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모르겠고, 어디 누구에게 뭘 더 물어 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조금씩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만 우주 안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살아가는 방식, 사랑하고 싸우는 모든 것이 결국 게임일 뿐이라면, 그런데 그렇다면, 게임이 아름답다는 것은―게임이 완벽하고 전능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아름다우며, 우리의 삶이 아름다우며 완벽하며 전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게임의 중심은 어디에도 없고 다만 이 순간, 지금 여기들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수많은 순간마다 넓은 우주 각각 곳곳이 모두 게임의 중심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행성 이세간에서 올려다 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도―별들마다 품고 있을 수많은 삶들이, 이야기들이, 내 지난 모든 퀘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허망하거나 무의미하지 않고 다만 정답게, 아름답게, 슬프도록 찬란히 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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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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