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엄청난 발견을 눈앞에 두고 진리의 발견에 황홀해하기보다는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움츠러들었다.자신의 연구결과가 초래할 사회적 파장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던져질 비난에 불안해했다.왜 그랬을까.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규칙성과 질서를 찾아내고 그것의 실제적인 응용을 도모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과학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5백년 전의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과학은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에 출현한 ‘뮤세이온’과 중세 전반기 이슬람 세계에 등장한 ‘지혜의 집’, 그리고 중세 후반기에 새롭게 출현한 옥스브리지와 같은 ‘대학’을 중심으로 전수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과학의 근본적인 토대는 르네상스 시대의 끝 무렵인 16-17세기에 등장한다. 이때의 과학은 기계적 철학에 바탕해 만물을 물질과 운동으로 환원시켜 설명한다. 이것이 고전물리학으로 불리는 것으로 이 패러다임 안에서 과학은 양적 질적 팽창을 이뤄냈다. 그러면서 점차 응용성을 넓혀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광물학 등과 같은 분야들로 정착한다.
19세기말 과학은 감지되지 않는 미시 세계로 그 대상을 확대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나선다. 마치 20세기말 인류가 밀레니엄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헤맸듯이. 결국 상대성이론과 함께 양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틀이 등장하면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도 않게 됐고, 어떤 물리적 사건도 확정적으로 기술될 수 없게 됐다.
영웅의 불안
과학에서의 변화와 진보의 선봉에는 과학교과서나 위인전에서 많이 보았던 위대한 과학자들이 있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데이비, 패러데이, 와트, 라부아지에, 맥스웰, 다윈, 톰슨, 줄, 파스퇴르, 퀴리 부인, 아인슈타인, 왓슨과 크릭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여러 방향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과학 이론들이 안고 있는 모순을 과감하게 노출시키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했다. 과학자들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을지도 모를 과학의 발전 속도를 가속시켰을 뿐 아니라 비약적인 발전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사람들은 과학자들을 과학 발전의 최전방에 서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선각자로 바라본다. 또 과학의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나섰던 영웅으로 그린다. 과학자들은 종종 시대가 가하던 종교적, 사회적, 철학적 제약들을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무기 삼아 과감히 맞서고 헤쳐나간 인물로 칭송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실제 삶은 전설적 영웅담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진보를 가져오던 바로 그 시점에서 진리의 발견에 황홀해하기보다는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움츠러들었다. 또 자신의 연구결과가 초래할 사회적 파장과 함께 자신에게 던져질 비난을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했다. 과학자들이 갖가지 연구를 수행하면서 여러 형태의 콤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이야기다.
다윈이 ‘종의 기원’ 발표를 망설인 이유
천문학 혁명을 가져온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지구중심 우주론을 대체하는 태양중심 우주론에 제일 먼저 도달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공표하지 못했다. 정통 교회의 신부라는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가슴 속에 숨겨야만 했다. 죽음을 맞이해서야 친구 오시안더 신부의 도움으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2)를 출간할 수 있었다. 20여년 동안 조마조마해하며 믿고 있던 바를 말할 수 없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에 비해 케플러(1571-1630)는 주저할 것이 없었다. 케플러는 기존 사회로부터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던 맨 아래 계층 출신이었다. 더구나 루터파였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갈등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과학자들처럼 사회적 출세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사회적, 종교적 여건상 출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케플러는 신의 세계의 상징이던 원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행성의 운동을 타원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주장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케플러의 유년 시절은 암울했다. 스스로 아버지를 “싸우기 좋아하고 범죄성이 농후한 인물”, 어머니를 “마르고 수다스러우며 성격이 고약한 사람”으로 묘사할 정도로 가족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신교도라는 이유로 수학교사 자리를 박탈당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절망감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케플러는 자신의 미래가 오직 티코 브라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면서 티코 브라헤가 남긴 데이터에 근거해 수학적 천문학이라는 분야에 외곬으로 몰입했다.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함으로써 생물학의 혁명을 가져온 다윈(1809-1882)역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까지 오랫동안 망설였다. 다윈은 책을 출간하기 12년 전부터 이미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지내야만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내와 멀어질까봐, 그리고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봐 다윈은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밤마다 초기 천문학자들에 대한 박해나 신교의 순교자들이 처형당하는 꿈에 시달리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만약 다윈의 이론과 동일한 내용을 담은 월러스의 논문을 받아보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망설임은 훨씬 더 오래 지속됐을 것이다. 심지어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는 것이 마치 “살인죄를 고해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사회적 열등감을 경쟁심으로 표출한 뉴턴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으로 유명한 뉴턴(1642-1727)은 당대 과학자들과 많은 싸움에 휘말렸다. 왕족들의 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광을 누렸지만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가난한 농부를 아버지로 둔 하층 출신이라는 사실이 항상 열등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한 사회적 열등감은 지적 경쟁심으로 표출됐다. 뉴턴은 왕립학회의 회장이 됐을 때 회원들을 동원해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미적분법의 발견을 두고 치사할 정도의 우선권 논쟁을 벌였다. 만유인력의 기본을 이루는 행성을 움직이는 힘의 본성에 대해 연구하도록 도와준 후크와 플램스티드를 비난하기도 했다. 뉴턴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비양심적으로 행동했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동료를 인정하는 것에는 무척이나 인색했다. 또 오만으로 지적 좌절감을 감추기도 했다. 뉴턴은 가까운 친구가 하나도 없었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인생의 후반부에는 비밀스런 연금술 연구와 성서의 재해석을 유일한 친구로 삼고 지냈을 뿐이었다.
대표적 자수성가형 과학자로 데이비(1778-1829)와 그의 제자 겸 동료였던 패러데이(1791-1867)가 있다. 가난한 하층 출신의 데이비는 유명한 기술자였던 와트의 아들을 도와준 덕에 과학자로 상승할 수 있었다. 뉴턴처럼 성공하고 싶었던 데이비는 뛰어난 언변과 실험능력으로 빠른 시간 내에 명성있는 과학자가 됐다. 과학을 사랑하던 조지 3세의 절친한 친구도 됐다. 하지만 늘 사회적 열등의식과 누군가가 자신의 위치를 빼앗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는 형태로, 또 자신과 동일한 출신 배경을 가진 패러데이의 사회적 진출 기회를 적극적으로 가로막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데이비는 패러데이가 책 제본업을 그만두고 과학에 뛰어들겠다고 하자 “과학은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거친 여자와 같다”며 그만두도록 권했다. 패러데이가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에 실험조교로 취직됐을 때에는 마치 몸종을 다루듯 했다. 게다가 데이비는 다른 사람에 의해 패러데이가 왕립학회 회원으로 추천되자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이라며 오히려 패러데이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패러데이는 나중에 “데이비는 나에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를 가르쳐줬다”고 술회했다. 데이비는 과학자로서 사회적 지위는 얻었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과학자들간의 경쟁심과 지적 열등감은 라부아지에(1743-1794)에게서 극에 달한다. 파리의 세금징수원이던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발견함으로써 화학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인물이다. 과학 역사상 가장 불운한 과학자로 기억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구체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그랑주가 “그의 목을 자르는데는 한순간이 걸렸지만 그만한 재능의 인물이 등장하기까지는 1백년이 걸릴 수 있다” 고 한탄했던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동료과학자인 마라가 그에게 가졌던 지적 열등감과 치욕감 때문이었다. 라부아지에는 마라가 왕립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돌아왔다. 마라가 대혁명의 실세 중 한사람이었으며, 라부아지에의 재판관이었던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재판에 마라의 입김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과학자들간의 경쟁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절망감을 연구로 승화시킨 갈릴레이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스퇴르(1822-1895)는 스스로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비밀을 밝혀내는 근대적 마술사로 생각했다. 자신을 갈릴레이나 뉴턴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과 동일시했다. 파스퇴르는 나서기를 좋아했으며, 동료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공격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쇼맨십이 강했던 파스퇴르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애국심을 보이기 위해 보불전쟁동안 독일이 수여하려던 훈장과 명예학위를 거절했다. 본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도 분개하며 돌려줬다. 1881년에 양과 염소와 소를 대상으로 탄저균 배양액을 공개 투입한 실험은 전 세계 뉴스거리가 됐다. 영국에서는 타임스지 기자까지 특파된 시대의 사건이었다.
교회와의 싸움으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도 파스퇴르 못지 않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갈릴레이는 시대가 주는 제약에 과감하게 맞서기보다는 우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망원경으로 달과 태양을 들여다보고, 태양흑점의 변화를 새로운 우주론의 구체적 증거로 내세우면서 예수회 신부들과 맞섰다.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됐던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린 적이 없다. 그는 과감하게 시대적 제약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대신 고해자의 옷을 입고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참회의 글을 썼으며, 영구적인 가택연금을 당했다. 사방이 막힌 듯한 절망감에 빠진 갈릴레이는 나머지 생을 역학 연구에 몰두했다. 이것은 뉴턴 물리학의 초석이 됐다.
이상의 몇몇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과학자들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도 또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기쁜 마음으로 내세우지도 못했다. 과학자들은 결정적인 선택을 두고 불안해하고, 동료와 지나치게 경쟁을 벌였으며, 사회적 열등감으로 고민했으며, 시대가 주는 제약에 고통을 당했다.
이것을 일부 심리학자들은 천재들의 정신병리라는 측면으로 해석하면서 과학자들을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규정해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과학자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방법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과학자들이 가진 콤플렉스는 그들도 역시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내주며, 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감소시켜준다. 과학자들 역시 늘 선택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야기되는 암울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들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위대하고 그들이 위인으로 그려져야 하는 것은 결코 과학적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한 분야에 매달리고 정진한 과학자들의 노력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과학자를 다시 평가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