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사에서 푸슈킨 이후 최대 시인으로 꼽힌다는 표도르 튜체프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성으로 러시아를 이해하기 어렵도다. 보편의 잣대로 재기도 어렵구나. 그것에는 특별한 모습이 있나니. 러시아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도다.”
자연환경만 봐도 그렇습니다. 국토가 동서로 9000km, 육지 면적의 8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 겨울만 되면 기온이 영하 30℃까지 곤두박질치는 나라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오랜 사회주의 역사를 가진 만큼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도 독특합니다. 이번 달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의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연구소, 레베데프 물리연구소(LPI RAS)를 알아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리를 다룬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는 러시아 과학의 시작이라고 불립니다. 설립은 1934년 광학 분야 물리학자 세르게이 바빌로프가 했지만,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과학을 육성시킬 목적으로 설립한 연구소가 모태기 때문입니다. 체렌코프 효과, 위상 안정성의 원칙, 열핵융합 기술 등 기초과학 분야에서 그동안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왔습니다. 레이저의 전신인 ‘메이저’ 이론을 확립한 니콜라이 바소프 등 노벨상 수
상자도 7명이나 배출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독특한 특징은 물리학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룬다는 점입니다. 홈페이지에서 분과 소개를 보면 진동의 비선형 이론 같은 기초과학부터 펨토초 레이저, 반도체 공학, 전파 천문학 등 원천기술까지 다양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토카막’이라고 하는 도넛 모양의 자기핵융합실험장치도 레베데프 물리연구소에서 처음 제안한 것입니다. 토카막이라는 단어는 러시아어 ‘도넛형 자기장 코일 챔버(тороидальная камера с магнитными катушками)’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합성어입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가 경제난을 겪으면서 연구비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규모나 설비는 여전히 어마어마합니다. 전파 천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연구소 시설 중에 관측소가 따로 있고요, 연구소에 서 사용할 실험 기기를 만드는 전용 공장이 30km 거리에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또 1990년대 이후에 해외로 이직한 연구원들이 꽤 많았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수천 명의 연구원 규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연구소 생활
레베데프 물리연구소는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지하철 ‘레닌스키 프로스펙트’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본관 건물이 연구소답지 않게(?) 고색창연한데요.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식 연구시설들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연구원들은 대부분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들도 통근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해요. 사회주의 국가에선 교수나 전문 연구원들의 급여가 다른 직업에 비해 특별히 높지 않기 때문에 소박한 생활을 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요즘 러시아 젊은이들은 이 때문에 과학기술 분야의 직업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에도 현재 30~40대 젊은 연구자들보다 50~60대 연구자들이 더 많습니다(시베리아 지역 쪽에 몰려 있는 항공기술 분야 연구소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고 하지만요).
여행에 식도락이 빠질 수 없겠죠. 연구소 안에 작은 식당에선 두툼한 고기를 튀긴 커틀렛과 감자를 삶은 뒤 으깬 퓌레를 팝니다. 한국의 김치찌개, 된장찌개처럼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메뉴입니다. 보르쉬’라고 하는 빨간무를 재료로 한 따끈한 스프도 추천합니다. 원래 맛있는 건지 날씨가 추워서 맛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번 맛보면 ‘인생 스프’가 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