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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뛰지 못하는 작은 원숭이의 생존법

허재원의 영장류 이야기 ➎ 느림보원숭이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며 살아간다.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이 비슷하다. 그런데 종종 색다른 적응 방식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종이 있다. 열대 우림에 사는 자그마한 야행성 원숭이인 느림보원숭이가 그렇다.

느림보원숭이를
한번쯤 만나본 독자라면 매우 느리고 순하며 착한 원숭이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귀여운 외모도 이런 판단에 한몫한다. 그러나 섣부른 오판이다. 아마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뒤 느림보원숭이를 다시 만나면, 예전과 달리 만지기조차 꺼려질 것이다.

산소탱크 장착한 ‘파워 근육’의 소유자!

느림보원숭이는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소형영장류로, 성체의 몸무게가 약 1.2kg이다. 야행성 영장류로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 위에서 보내며, 과일, 새알, 나무수액 등을 찾아 먹거나 나무 위에 사는 곤충을 사냥해 먹는다. 소형영장류이기 때문에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뱀, 고양이, 매, 독수리 같은 육식동물을 피하기도 해야 하다.
 


먹잇감에 슬그머니 접근하면서 포식자의 눈도 잘 피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전략은 바로 ‘천천히 움직이기’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나뭇가지를 붙잡은 채 약 1시간 이상을 멈춰 서 있을 수 있다. 원래 빠르게 움직이는 것보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게 훨씬 힘든 법이다. 좁은 나뭇가지 위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려면 네 발로 나뭇가지를 꽉 붙들면서 이동할 수 우아영밖에 없다. 이 때문에 느림보원숭이의 손과 발은 마치 펜치처럼 물체를 움켜잡을 수 있게 진화했다. 손발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번째 손가락이 무척 짧은데, 가는 가지를 꽉 잡을 때 두 번째 손가락이 방해돼 퇴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다른 동물이나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람이 온몸에, 특히 손발에 힘을 잔뜩 주고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를 잡은 채 아주 천천히 이동한다면, 수 분 이내에 몸에 경련이 일어날 것이다. 대사산물인 젖산이 축적되면서 근육이 뻣뻣해지기 때문이다. 느림보원숭이 역시 비록 느리지만 나뭇가지를 꽉 붙들고 이동하므로 근육이 계속 수축해 있는 상태다. 인간이 전속력으로 달릴 때 근육의 상태와 같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느림보원숭이의 손발 근육에는 경련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물처럼 생긴(망상구조) 혈관다발 덕분이다.
 


망상구조의 혈관다발은 일부 척추동물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수한 구조로, 대표적으로 기린의 목에 있다. 기린이 긴 목을 굽히거나 펼 때 혈액의 급격한 쏠림을 방지하는 일종의 충격완화장치로, 뇌의 혈압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또, 망상구조의 혈관다발은 동맥, 정맥이 매우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서 동맥과 정맥 사이의 열교환, 가스교환, 이온교환에 효율적이다.

느림보원숭이의 경우 두 팔과 두 다리의 근육에 이 같은 혈관다발이 집중 분포해 있다. 따라서 산소와 영양분이 충분히 담긴 신선한 혈액을 빠르게 공급할 수 있고, 근육에 피로를 유발하는 젖산도 그때그때 제거할 수 있다. 또 나무를 올라가거나 거꾸로 내려올 때 혈액이 쏠려서 혈압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도 막아준다. 결과적으로 느림보원숭이는 산소탱크를 장착하고 끊임없이 운동할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근육을 가진 셈이다.

영장류 중 유일하게 독을 가졌는데…공격용이 아니다?

느림보원숭이의 얼굴은 포식자를 속일 수 있는 가면처럼 진화해 왔다. 예를 들어, 이들의 눈은 덩치에 비해 유달리 크다. 상상해 보라. 만약 이런 눈을 어두운 숲에서 마주친다면? 주변이 어두워 동물의 실제 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도 커다란 눈만 보고 그 동물이 몸집이 무척 크다고 짐작할 것이다(참고로 느림보원숭이의 실제 몸 길이는 30cm에 불과하다).

피부도 느림보원숭이의 방어를 돕는다. 특히 목 뒷부분의 피부가 두꺼워서, 포식자는 느림보원숭이의 목을 물어 한번에 즉사시킬 수 없다. 게다가 아주 얇고 날카로운 송곳니도 가졌다. 포식자에게 사로잡혔을 때 송곳니로 공격하면, 비록 커다란 포식자를 죽이진 못하지만 엄청난 고통을 선사(?)해 달아날 시간을 벌 수 있다(포식자가 쇼크사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더 놀라운 점은, 느림보원숭이가 영장류 중 유일하게 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유류 전체를 통틀어 봐도 독을 가진 동물은 느림보원숭이와 오리너구리 단 두 종뿐이다. 물리면 최악의 경우 쇼크사할 수 있지만, 죽지 않더라도 큰 위협이 된다.

이 독은 특이하게도 뱀처럼 물어서 주입하는 방식이 아닌, 바르는 방식이다. 팔꿈치 안쪽 분비샘에서 나오는데 그 자체로는 원료물질일 뿐 아직 활성화된 독이 아니다. 이 분비물을 입으로 옮겨 침과 섞어야 비로소 독이 활성화된다. 느림보원숭이는 이렇게 만든 독 물질을 빗처럼 생긴 아래쪽 이빨을 이용해 털에 발라서 사용한다.

흥미로운 건, 독의 정확한 용도가 미스터리라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독의 성분과 기능을 연구했지만 아직까지 용도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공격용이라면 뱀의 독처럼 언제 어디서든 바로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사용방법이 너무 불편하다. 자연 상태에서 어미 느림보원숭이가 새끼의 털을 골라줄 때 독을 발라주는 행위가 관찰된 반면, 아직까지 자신을 위협하는 포식자나 인간에게 독을 바르는 행동은 보고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느림보원숭이의 독은 어쩌면 열대 우림에 서식하는 체외 기생충을 제거하는 일종의 해충방제시스템일 수 있다(doi:10.1016/j.toxicon.2014.12.005). 연구팀이 기생충을 독에 노출시킨 결과, 기생충의 활동이 감소하고 일부는 죽기도 했다. 만약 이 가설이 옳다면 어미가 새끼의 털에 독을 발라주는 행동도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독이 공격용으로 쓰일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느림보원숭이가 무언가에 놀랐거나 위협적인 상대를 만났을 때 보이는 행동은 다소 굴욕적인 것처럼 보인다(왼쪽 아래 사진 참조). 하지만 사실은 팔꿈치의 독을 입에 넣을 수 있는, 언제든 독을 쓸 수 있는 자세다. 굽히는 척 하면서 칼을 간다고 할까.

느림보원숭이의 생태가 워낙 미스터리여서 그런지, 일부 영장류 학자들은 더 과감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느림보원숭이가 (일부러) 코브라를 흉내 낸다는 것이다. 코브라와 느림보원숭이의 형태(왼쪽 위 사진 참조)가 유사한 데다, 느림보원숭이가 위협받을 때 내는 ‘쉬익 쉬익’하는 소리가 코브라가 위협받을 때 내는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둘의 서식지도 겹친다.

노련한 사냥꾼들이 다른 이에게 방해 받지 않고 사냥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산과 들을 홀로 누비는 것처럼, 느림보원숭이 역시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대개 혼자 생활한다(물론 젖먹이 새끼가 있을 때는 예외다). 이처럼 비밀스러운 습관 때문에 야생 상태에서의 느림보원숭이의 생활사는 아직까지 상당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우리와 유사한 DNA서열을 가졌으면서도 저런 놀라운 구조와 능력을 가졌다니! 약간의 유전공학적 도움을 받으면, 우리 인간도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농담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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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허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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