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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생각해선 안 될 것을 생각하다

전중환의 협력의 공식 ➎

이타성의 진화를 수학적 이론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품은 윌리엄 해밀턴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 가르쳐 줄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혼자만의 공부가 시작됐다.


1950년대 후반, 케임브리지대의 학부생 윌리엄 해밀턴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찾았다. 각 개체는 자기의 번식 성공도를 늘리게끔 진화한다는 현대적 종합의 틀 안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이타적 행동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이었다. 집단 선택설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던 학과에서 이는 분명 외로운 작업이 될 터였다. 게다가 야외에 안 나가고 방안에 틀어박혀 이론 연구를 한다고? 당시 해밀턴이 여동생에게 보낸 우편엽서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지금껏 만난 모든 교수님과 강사님들은 수리생물학을 지독하게 싫어해.”

어쨌든 이타성의 유전학에 꽂힌 해밀턴은 인간의 이타적 행동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유전학과에는 졸업하려면 반드시 부전공으로 다른 과의 과목들도 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해밀턴은 사회인류학을 부전공 삼기로 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유전학과의 요구사항을 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생의 과업을 해결하는 데도 인류학 지식이 도움될 테니 일거양득이라 생각했다.

해밀턴에게만 그럴듯하게 보인 이 계획은 사회인류학과와 유전학과 양쪽으로부터 퇴짜를 받았다. 부전공을 허락받기 위해 해밀턴이 찾아갔던 인류학 교수 에드먼드 리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오직 문화로부터 유래하며 유전자는 전혀 무관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훗날 에드워드 윌슨의 역작 ‘사회생물학’을 놓고 거센 논쟁이 벌어졌을 때 윌슨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리치 교수가 이타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를 연구할 계획이니 사회인류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이과생을 문전 박대한 것은, 차라리 당연했다.

게다가 유전학과도 인류학을 부전공하겠다는 요청을 뚜렷한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고 거부했다. 낙담한 해밀턴은 졸업 후 다른 대학에서 유전학 대학원 과정을 밟기로 결심했다. 그가 여동생에게 보낸 우편엽서를 다시 들춰보자. “차라리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혼자 연구하는 게 나을 듯하다. 내 연구야 어차피 책만 읽으면 되니까.”



‘사악한 뿌리 움’이 대학원에 입학하다

해밀턴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유전학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 전에 리오넬 펜로즈 교수를 찾아가 어떻게 이타성이 진화했느냐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펜로즈는 정신 지체 같은 질병의 유전적 원인을 밝힌 세계적인 유전학자였지만, 인간 행동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이 케임브리지 졸업
생이 행동, 그것도 이타적 행동을 진화적 관점에서 연구하겠다고? 이 친구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하겠다며 유대인, 장애인, 흑인 등 ‘열등한’ 인종을 학살했던 나치 우생학을 떠받드는 것 아냐?’ 펜로즈는 이타성이 과연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조차 의문이라고 점잖게 말했다. 이타적 행동 말고 당시 그의 연구실에서 수행하던 염색체 연구를 같이하겠다면 해밀턴을 박사과정으로 받아주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이는 해밀턴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또 미역국이었다. 진화생물학계에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를 연구계획을 이미 짜놓은 대학원 지망생에게 찬사는커녕 시련만 계속 찾아왔다. 다행히 1960년에 런던정경대(LSE) 사회학과의 인구통계학 프로그램에서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인구통계학자인 노먼 캐리어는 해밀턴이 하려는 연구주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해밀턴을 맞아 주고 따뜻하게 격려해 줬다. 1년간 장학금도 챙겨 줬다. 얼마 후 해밀턴은 유전학에 정통한 인구통계학자인 존 하이날을 캐리어와 함께 공동지도교수로 모시게 됐다. 하이날은 이타성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어떻게 선택되었는가에 대해서 흥미를 보였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진 못했다. 어쨌든 해밀턴은 캐리어와 하이날의 대학원생으로 독자적인 연구에 돌입했다.

1960년 말, 해밀턴은 얄궂게도 예전에 퇴짜 맞았던 UCL의 유전학 연구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두 지도교수가 해밀턴이 유전학자들이 많은 곳에서 연구할 수 있게끔 UCL 유전학과에도 동시에 적을 두게 한 것이다. 안 좋은 기억이 남았던 펜로즈 대신, 세드릭 스미스라는 유전학자가 UCL에서 그를 지도했다. 이렇게 런던의 두 대학에 소속된 채로 해밀턴은 3년에 걸쳐 필생의 과업과 씨름했다.

해밀턴이 겪었던 푸대접은 어떻게 보면 그리 놀랍지 않다. 당시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치의 우생학 상흔이 여전히 음울하게 떠돌던 시기였다. 유전자가 인간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예 처음부터 배제됐다. 인간에 대해 유전학이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유전병밖에 없었다(필자는 1996년 학부 4학년 때 ‘인간 유전학’ 과목을 수강했는데, 한 학기 내내 유전병만 배워서 크게 실망한 기억이 있다). 나중에 해밀턴은 자신이 “파시즘이 뿌리째 뽑혀나간 자리에서 다시 끈질기게 돋아난 사악한 뿌리 움”임을, 캐리어 교수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고 농담했다. “‘유전자’와 ‘행동’을 한 문장 속에서 나란히 쓸 만큼 대담하고 어리석은 움”을 몰라보다니 말이다.


외로운 연구자

해밀턴은 런던정경대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동시에 소속됐지만 두 곳 모두 거의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어느 곳에도 그의 책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해밀턴에게 다가와서 왜 가끔 과 건물에서 얼씬대는지 묻지 않았고, 대학원생이라면 연구 중인 걸 발표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도서관을 출입할 권리와 장학금을 받은 것이 그가 두 대학에서 받은 지원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밀턴은 런던의 허름한 단칸셋방과 도서관을 오가며 수식 계산에 매달렸다. 외로운 나날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지독히 외로웠다. 때때로 내 단칸방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면, 그리고 (…) 도서관도 문을 닫는 시간에 좀 더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내 단칸방이 아니라 워털루 기차역으로 향하곤 했다. 대기실 의자에서 여행객들 사이에 앉아 계속 책을 읽거나 수식 모델을 세웠다…. 대기실이나 도서관에서 내가 먼저 남들에게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 어쨌든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외로움이 다소 덜어지는 것 같았다(해밀턴, 1996년, 23~24쪽).

술주정뱅이, 헤어지는 연인, 지친 엄마를 못살게 구는 아이들 같은 여행객들 틈새에서 노트를 펼쳐 놓고 복잡한 수식을 휘갈기는 청년을 그려 보라. 왠지 마음이 짠하다.

외로움에 더하여, 해밀턴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부심과 좌절감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자신이 보기에는 틀림없이 학계를 뒤흔들 연구인데,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으니 점차 자괴감에 빠졌다. 영구기관을 발명했다거나 상대성 이론의 허구를 증명했다는 사람들처럼, 기존의 과학이론을 부정하며 홀로 큰 성취를 했다고 착각하는 일반인들을 ‘사이비 전문가(crank)’라 한다. 해밀턴은 자신도 사이비 전문가가 아닌가 고민했다.

어떨 때는 내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봤다고 확신했다. (…) 어떨 때는 내가 사이비 전문가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위의 권위 있는 과학자들, 그리고 나와 이야기했던 여러 명석한 대학원생들이 이타성의 진화 연구가 지닌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겠는가? 연구에 내재한 치명적인 허점이 내 눈에는 안 보였지만 그들의 눈에는 아마도 또렷하게 보였으니 그랬을 것이다(해밀턴, 1996년, 25쪽).

도서관도 단칸방도 지겨울 때면 근처에 있는 치즈윅 하우스(Chiswick House) 정원이나 큐 왕립식물원(Kew garden)의 벤치로 가서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들판을 누비며 곤충을 채집했던 해밀턴은 다양한 동식물의 자연사에 놀랄 정도로 해박했다. 해밀턴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 딱정벌레나 이끼, 거미와 함께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끼는 현장 생물학자였다. “길거리에 홀로 울고 있는 어린이도 내 심장을 흔들지만, 도시의 개천에 피어난 고사리는 내 심장을 더 세게 흔든다.” 가까운 혈연을 애지중지 돌보는 사회성 곤충을 관찰하면서 그는 이타성의 진화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들을 분석했다.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해밀턴은 나중에 쓴 자전적 에세이에서 ‘종의 기원’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소개했다. 이미 들어 봤겠지만 참고 들으면 고맙겠다. 다윈이 활동하던 시절, ‘펀치’라는 잡지에 실린 만평에서 두 귀부인이 이야기한다. “다윈 씨가 그러는데 우리는 모두 원숭이에서 유래했대요!” “세상에나! 그게 사실일 리 없어요!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고요.”

해밀턴은 이 귀부인의 대답이 리치나 펜로즈 같은 과학자들의 쌀쌀맞은 반응을 잘 설명해준다고 보았다. 인간 행동에 대한 진화 과학이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과학, 이를테면 물리학이 봉착하는 어려움과 매우 다르다. 진화 사회과학이 내놓는 설명은 대부분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진짜 어려움은 사회가 생각하지 말라는 것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다. 고결한 이타적 행동에 대한 진화적 설명은 희생, 박애, 자선 등에 대해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녀 온 믿음과 충돌한다. 오늘날에도 진화 사회과학자들이 불필요한 오해와 비난에 시달리는 이유다. 해밀턴이 워털루 기차역 대기실에 앉아서 씨름했던 수식 모델은 다음 호에 엿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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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일러스트

    황영진
  • 에디터

    윤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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