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학벌이 좋거나 천재일 필요 있나요? 그래야 한다면 청소년이 모델로 삼고 따라가기 너무 힘들잖아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서슴지 않고 ‘과학계의 김남일’이라고 소개하는 채연석 박사(51). 올해 월드컵에서 스타로 떠오른 김남일 선수는 청소년에게 모범생이 아니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라고 설명하며, 과학계에도 청소년의 모델로 자신처럼 천재가 아닌 사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실 채 박사는 학교 다닐 때 성적이 그리 우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채 박사는 ‘한국의 NASA’라고 말할 수 있는 항공우주연구원에서 국산 로켓을 개발하는 중책을 맡아 왔다. 10여년 동안 국내 최초의 액체추진로켓을 연구·개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현재는 우리 힘만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우주발사체를 구상하는데 몰두해 있다.
국내 로켓 개발의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또 로켓과 함께 한 그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채 박사는 성공에 대한 생각부터 남다르다. 성공이란 돈이나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로켓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그의 성공관을 빌자면, 로켓 연구에 수십년을 매진해온 그는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를 올바로 선택하고 그 분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달렸다고 그는 생각한다.
고교시절 실험하다 고막 다쳐
로켓에 대한 그의 인연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미국과 옛소련이 인공위성을 띄우고 지구궤도뿐만 아니라 달에까지 사람을 보내며 치열하게 우주개발 경쟁을 벌였던 1960년대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에게 이때의 사건은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소련이 발사한 우주선이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는 내용이 학교 게시판에 나붙었을 때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고,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해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딛었다’는 내용을 방송으로 접했을 때는 마당에 나가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 속은 온통 로켓으로 채워졌다.
로켓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린 시절부터 대단했다. 당시 로켓과 우주개발에 대한 내용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신문을 통해서가 전부였다. 그래서 로켓에 관한 신문기사는 놓치지 않고 몽땅 스크랩했다. 어느 날에는 도랑에 빠진 신문에서도 새로운 로켓 기사가 눈에 크게 띄었다고 한다. 로켓에 대한 스크랩 자료 덕분에 대학 시절에는 웬만한 전문가에 못지 않은 ‘로켓 박사’가 됐다.
하지만 로켓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머리 속에 있던 생각을 직접 해봐야 자기 것이 된다는 신념에 따라 로켓에 대한 실험을 직접 시도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내에서 로켓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2학년 때 로켓 실험을 하다가 한쪽 고막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이때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로켓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더라고요. 이때의 사고가 오히려 평생 로켓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됐답니다”라며 채 박사는 당시를 회상했다.
경희대 물리학과에 다니던 시절에는 한국우주로켓클럽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활동했다. 또 그때까지 연구했던 내용을 월간 ‘학생과학’을 통해 ‘로케트 이야기’로 1년 반 동안 연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3회 분량의 글을 썼지만 독자들의 인기를 끌어 계속 연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연재한 내용은 1972년 그의 첫저서인 ‘로케트와 우주여행’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됐는데, 이 책은 당시 문공부 우량도서로 뽑혔다. 최근에는 소년 시절 이 책을 읽고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서울시립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의 안도열 교수를 만나기도 했다.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이 제 책을 보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받았다니, 놀랍기도 하고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답니다”라며 채 박사는 안 교수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채 박사는 지난달 말에 로켓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운 책 ‘로켓이야기’를 일반인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로켓에 대한 그의 애정을 고백하는 8번째 저서다. 그 동안 채 박사는 로켓, 우주개발, 고대 화약무기 등에 대한 책을 저술해 왔다.
고대로켓 복원하며 느낀 우리의 과학성
로켓 분야는 어릴 적 그가 꿈꿀 당시만 해도 그리 전망이 밝지는 않았다. 다행히 미국 미시시피주립대에서 항공우주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마침 한국에서는 항공우주연구원의 전신인 천문우주과학연구소가 출범했고, 채 박사는 여기에 합류해 국내 로켓 개발에 뛰어들었다. 목표가 좋으면 노력 끝에 결국은 길이 열린다는 그의 평소 지론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요즘 이공계를 기피하는 사회분위기 속에 방황하는 학생들에게 채 박사는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이공계가 대우받을 수밖에 없는 시절이 곧 옵니다”라며 확신을 갖고 충고한다. 특히 재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일은 국가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큰 손해라고 따끔하게 질책한다.
채 박사는 한국인은 조상 대대로 손재주가 좋으며 과학적인 창조의 피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대학 시절 그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화살을 장착한 로켓인 신기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후에는 세종 때 편찬된 문헌에서 신기전의 설계도까지 찾아내 국내외 학계에 보고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옛 로켓 설계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설계도에 사용된 길이의 단위 중 0.3mm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리’라는 단위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고대과학의 제작 정밀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라고 채 박사는 강조한다. 이런 조상의 피를 물려 받은 우리나라 청소년이 이공계 분야에 잠재력이 크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는 얘기다.
1993년에는 신기전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신기전을 직접 복원하고 발사하는 실험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대덕 연구단지의 갑천 고수부지에서 이동식 발사대인 화차의 신기전 발사틀에 1백발을 장착시킨 후 점화시키자 ‘고대로켓’ 신기전 1백발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1백-2백m를 날아갔던 것이다. 세종 이후 5백45년만에 신기전이 부활하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우주개발 역사에 우리나라의 역사도 당당히 한몫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채 박사가 우리 로켓의 뿌리와 전통을 찾기 위해 애쓴 결실이기도 했다.
월드컵 4강 신화 능가한다
채 박사는 1990년대 초 일찌감치 로켓연료로 액체연료의 중요성을 인식해 액체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체로켓은 일단 연료에 불이 붙으면 연료 소모량을 조절할 수 없는 반면, 액체로켓은 연료의 분사량을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속도를 바꿀 수 있어 인공위성 발사에 필수적이다.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고체로켓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채 박사는 이를 바탕으로 액체로켓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특히 로켓 기술의 확산을 우려한 선진국이 기술이나 부품을 이전해주지 않아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액체로켓에 대한 그의 소신은 꺾이지 않았다. 지난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할 일에 집중하면 가속도가 붙어 더 잘할 수 있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밀고나갔다. 정말 대학 때 자신의 별명이었던 ‘로켓’처럼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마침내 1995년에는 액체로켓의 엔진에 대한 실험에 성공했고, 1997년에는 국내 최초의 액체로켓인 ‘KSR-Ⅲ’를 개발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현재 KSR-Ⅲ는 액체추진엔진을 1분 이상 연소하는 실험에 성공한 상태며, 11월 27일 서해안 국군 미사일 발사장에서 시험발사를 앞두고 있다.
KSR-Ⅲ는 무게 1백kg짜리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우주발사체 KSLV-1로 가는 교두보다. KSR-Ⅲ에 이어 2005년 KSLV-1이 발사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도 우주개발국가 대열에 진입하게 된다. 그의 오랜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의 꿈만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2005년 우리 로켓으로 우리 위성을 쏘아올리는데 성공하면 이를 통해 국가 이미지가 높아지는 효과가 올해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룬 월드컵 4강 신화를 능가할 것”이라고 채 박사는 강조한다. 물론 이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채 박사는 “정부에서 좀더 지원하고 연구원들과 힘을 합치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10년 후면 우리 손으로 우주개발
채 박사는 앞으로 이공계를 선택할 청소년에게 자신의 분야를 강력히 추천한다. “10년 뒤를 바라보고 공부해야 하는 청소년에게 로켓을 비롯한 국내 항공우주 분야는 유망하다”고 채 박사는 강조한다.
2005년이면 전남 외나로도에 우주발사체를 발사할 수 있는 우주센터가 건설될 예정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2005년 이곳에서 우리 우주발사체로 우리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2010년이면 지구 저궤도 위성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2015년에는 외국에 수출할 수도 있고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외국 위성을 발사해주는 서비스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바야흐로 우주산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 항공우주 분야는 자국의 국력과도 직결되므로 선진국에서 기술 이전을 꺼리는 탓에 우리나라 자체 기술이 절실한 형편이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로켓과 위성에 대한 노하우를 알아내고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꾼 자신의 꿈과 목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채연석 박사. 그는 현재에도 우리 로켓을 만들려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채연석 박사가 걸어온 길|
1951년 충북 충주 출생
1975년 경희대 물리학과 졸업
1978년 경희대 기계과 석사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 기계과 전임강사
1982년 미국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과 연구조교
1984년 미국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 석사
1987년 미국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 박사
1988년 천문우주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1990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우주추진기관연구실장
1997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KSR-Ⅲ 사업단장
1998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우주기반기술연구부장
2000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부장
2001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연구개발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