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성의 진화를 종 전체의 이득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 집단 선택설이 대세를 이룬 20세기 중반. 자연 선택이 개체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개체 선택설은 어떻게 다시 힘을 얻었을까. ‘다윈 이후 가장 위대한 다윈주의자’라고 불린 윌리엄 해밀턴의 등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뭔가에 몰두하면 다른 것엔 아예 신경을 꺼버리는 이들이 있다. 장점이자 단점이겠지만, 주변 사람들로선 아무래도 좀 피곤하다. 1990년대 영국 옥스퍼드대 동물학과에도 그렇게 주변머리 없이 공부만 파는 교수가 한 명 있었다. 윌리엄 해밀턴이었다. 업적이 워낙 뛰어나서 일 년에 딱 한 과목만 강의하면 됐는데도, 그조차 연구하느라 수업을 빼먹는 적이 태반이었다. 하루는 어느 대학원생이 복도에서 해밀턴과 우연히 마주쳤다. 며칠 전 해밀턴이 했던 세미나 자리에 참석 못 해 미안하다고 대학원생이 사과했다. “괜찮네.” 해밀턴이 대꾸했다. “사실 나도 잊어버리고 안 갔거든.”
덕분에 동료 교수였던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를 쓴 그 사람–가 고생했다. 과에 흥미 있는 세미나가 열리는 날이면, 도킨스는 언제나 시작하기 5분 전에 해밀턴의 방문을 두드렸다. 같이 세미나 들으러 가자고 도킨스가 권유한다. 논문에 코를 박고 있던 해밀턴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도킨스를 따라나선다(왠지 ‘응답하라 1988’의 바둑 기사 최택 같다). 만약 십 분 전에 가서 세미나를 상기시켜 주기만 하고 먼저 발표장으로 향했다면 말짱 헛수고가 됐을 거라고 도킨스는 회상했다. 해밀턴은 도킨스의 말을 깨끗이 ‘까먹고’ 하던 연구에 전념할 테니 말이다.
해밀턴도 자신을 가리켜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도 모르는” 자폐증 환자에 가깝다고 고이타성을 향한 여정백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다윈 이후 가장 위대한 다윈주의자라는 호칭에 걸맞은 인물(도킨스의 평)”이 될 수 있었을까? 그가 남긴 다른 업적도 많지만, 이타적 행동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처음으로 밝혔음을 빼놓을 수 없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603/S201604N042_1.jpg)
생명의 패턴에 눈을 뜨다
해밀턴은 1936년 태어나서 영국 켄트주의 한적한 시골 오두막집에서 6남매 중 둘째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들판을 쏘다니며 곤충, 특히 나비를 채집하길 즐겼다. 12살 생일 때 부모님으로부터 생태유전학자 에드먼드 포드(Edmund Ford)의 책 ‘나비’를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은 해밀턴으로 하여금, 생물학이 우표 수집에 불과한 취미 활동이 아니라 자연 속에 숨은 패턴을 찾는 과학임을 일깨워 주었다.
나비를 쫓아다니던 어느 날, 해밀턴은 군사공학자였던 아버지가 토끼 구멍 속에 숨겨 놓은 총과 화약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남동생을 불러다 앉힌 다음, 원료를 이것저것 섞어서 놋쇠 탄약통에 재워 넣고 반응을 살펴보는 실험을 했다. 쾅! 탄약통이 폭발했고 해밀턴은 까무러쳤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로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해밀턴은 세 손가락의 일부를 잃었고 가슴에 평생 놋쇠 파편을 지니고 살게 됐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해밀턴은 어머니로부터 다윈의 ‘종의기원’을 배웠다. 사실 그는 진화 이론을 공부하기에 매우 유리한 환경에서 자랐다. 집에서 6.5km만 걸어가면 다윈이 작고하기까지 40년을 살았던 다운하우스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어머니와 함께 그 길을 수없이 오갔다. ‘나비’와 ‘종의 기원’은 열두 살 소년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관찰해온 곤충들의 다양한 특성으로부터 하나의 일반 원리를 끄집어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해밀턴은 유서 깊은 명문 사립학교인 톤브리지 스쿨을 졸업했다.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특출나진 않았다. 생물학이 가장 우수했고, 수학과 다른 과학 과목도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의 수능 시험에 해당하는 A-레벨 시험에서 프랑스어는 낙제점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해밀턴은 전 과목 만점을 휩쓰는 전형적인 모범생이 아니었기에 훗날 그가 이룩한 성취에 대해 동창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스스하고 바보같이 보이던 애가 나중에 그렇게 잘 됐으니 신기했죠.”
해밀턴은 별로 흥미가 안 생기는 과목은 그냥 내버려 두고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과목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학생이었다. 이런 점에서 해밀턴이 시험지에 답안을 작성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해밀턴은 어떤 주관식 시험이든지 세 문제 이상 답하는 일이 없었다(독자가 학생이라면 이는 되도록 본받지 마시라). 단, 풀기로 마음먹은 문제에 대해서는 완벽한 답을 길고 상세하게 써냈다. 빈칸으로 제출한 다른 문제들은 아는데 시간이 없었는지, 몰라서 못 쓴 건지는 오리무중이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미 중고생 때부터 해밀턴은 고분고분한 ‘범생이’가 아니라 소신 있는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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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를 영접하다
생물학, 그중에서도 진화와 유전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해밀턴은 1957년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곧 실망했다. 진화생물학의 현대적 종합이 한창 이뤄지고 있던 시기였지만, 이 세계 최고의 대학교에서 진화는 찬밥 신세였다. 지난 회에 살펴보았듯이, 동물들은 종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는 집단 선택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케임브리지대 생물학자의 다수는 진화를 별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적어도 자연 선택의 효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처럼 보였다”고 해밀턴은 덤덤하게 회상했다.
교수님들로부터 진화를 배울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새내기 학생은 도서관에서 진화 관련 서적과 논문을 독학하는 길을 택했다. 어느 날 해밀턴은 그의 운명을 정한 책과 마주쳤다. 아직 케임브리지대에 재직하고 있던 로널드 피셔가 쓴 ‘자연 선택의 유전학적 이론’(1930)이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해밀턴은 “이 책이 진화를 이해하는 열쇠임을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피셔 빠돌이(Fisher freak)’가 됐다. 피셔의 극도로 간결하고 함축적인 논리 전개를 따라가느라 학과 공부도 접고 책에 매달렸다. 1999년에 ‘자연 선택의 유전학적 이론’ 주석본이 새로 출간됐을 때 해밀턴이 뒤표지에 실은 헌사를 보자.
이 책에서 피셔는 자연 선택이 집단이 아니라 개체의 이득을 높여준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러나 해밀턴의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들은 하나같이 이타적 행동은 종 전체에게 이득이 됐기 때문에 선택됐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어떤 교수는 피셔가 통계학자로선 훌륭하지만, 생물학자로선 별로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해밀턴은 교수들이 틀렸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자연 선택이 개체의 수준에서 작용한다는 현대적 종합의 체계 안에서 어떻게 이타적 행동을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해밀턴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고약한 맛은 어떻게 선택됐나
피셔(1930)는 이타성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고약한 맛의 진화’라는 단락에서 제공했다. 딸기독화살 개구리처럼, 어떤 애벌레나 나비는 자신을 먹어봤자 아주 맛이 없음을 포식자에게 화려한 경계색으로 알린다. 포식자는 화려한 먹이를 덥석 물었다가 고약한 맛에 놀라 뱉어낸 다음에 다시는 그렇게 생긴 먹이에 접근조차 하지 않는다. 문제는 애벌레처럼 아주 부드러운 몸통을 지닌 생물은 포식자에게 한 번만 공격 당해도 죽기 쉽다는 것이다. 포식자에게 고약한 맛을 선사해서 자기 몸을 지키는 전략은 당사자에게는 손해지만 종 전체에게 이득을 줬기 때문에 선택된 이타적인 행동처럼 보인다. 피셔는 이런 이타성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피셔의 해답은 혈연이었다. 대개 애벌레들은 피를 나눈 친형제 자매들끼리 다닥다닥 붙어산다. 포식자 새가 날아와 이 중 한 마리를 먹는다. 구역질하며 뱉어낸 뒤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운이 나쁜 애벌레는 목숨을 잃었지만 대신 여러 동기의 생명을 구했다. 어떤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동기들이 공유할 확률은 50%다. 그러므로 고약한 맛을 지닌 의로운 애벌레 당사자는 포식자에게 공격 당해 죽을지언정 그 덕분에 유전자를 공유하는 다수의 친형제 자매들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자연 선선택은 고약한 맛을 만드는 유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애벌레 때 비교적 먼 혈연들까지도 함께 모여 사는 종보다 친동기들끼리만 모여 사는 종에서 고약한 맛이라는 방어체계가 더 뚜렷이 나타나리라고 피셔는 예측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타적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이처럼 혈연에게 유전적 이득을 제공함으로써 과연 후세대에 빈도를 높일 수 있는지 정교한 수식 모델을 세우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피셔는 여기서 멈췄다. 이타성의 진화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단이 없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나중에 해밀턴은 이타적 행동의 수식 모델을 만드는 작업에 처음 착수했을 때, 그 전에 피셔의 책을 분명히 읽긴 했지만 고약한 맛에 대한 피셔의 논의는 머릿속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하긴, 책을 읽을 당시에는 이타적 행동이 자신의 박사학위 주제가 될지는 몰랐으리라. “읽고 나서 잊었다.” 해밀턴의 고백이다.
에필로그
57학번(?) 해밀턴으로선 아쉽게도, 피셔는 1957년 9월에 은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몇 년간 피셔는 케임브리지대에 출강했기에 해밀턴은 그와 두세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어느 티타임 시간에 해밀턴은 피셔에게 다가갔다. 피셔가 흥미를 느낄 만한 통계학에 관련된 문제를 질문했다. 피셔는 다시 한 번 잘 분석해 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응답해 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얼굴을 맞댄 만남보다 책을 통한 만남이 해밀턴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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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에 몰두하면 다른 것엔 아예 신경을 꺼버리는 이들이 있다. 장점이자 단점이겠지만, 주변 사람들로선 아무래도 좀 피곤하다. 1990년대 영국 옥스퍼드대 동물학과에도 그렇게 주변머리 없이 공부만 파는 교수가 한 명 있었다. 윌리엄 해밀턴이었다. 업적이 워낙 뛰어나서 일 년에 딱 한 과목만 강의하면 됐는데도, 그조차 연구하느라 수업을 빼먹는 적이 태반이었다. 하루는 어느 대학원생이 복도에서 해밀턴과 우연히 마주쳤다. 며칠 전 해밀턴이 했던 세미나 자리에 참석 못 해 미안하다고 대학원생이 사과했다. “괜찮네.” 해밀턴이 대꾸했다. “사실 나도 잊어버리고 안 갔거든.”
덕분에 동료 교수였던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를 쓴 그 사람–가 고생했다. 과에 흥미 있는 세미나가 열리는 날이면, 도킨스는 언제나 시작하기 5분 전에 해밀턴의 방문을 두드렸다. 같이 세미나 들으러 가자고 도킨스가 권유한다. 논문에 코를 박고 있던 해밀턴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도킨스를 따라나선다(왠지 ‘응답하라 1988’의 바둑 기사 최택 같다). 만약 십 분 전에 가서 세미나를 상기시켜 주기만 하고 먼저 발표장으로 향했다면 말짱 헛수고가 됐을 거라고 도킨스는 회상했다. 해밀턴은 도킨스의 말을 깨끗이 ‘까먹고’ 하던 연구에 전념할 테니 말이다.
해밀턴도 자신을 가리켜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도 모르는” 자폐증 환자에 가깝다고 고이타성을 향한 여정백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다윈 이후 가장 위대한 다윈주의자라는 호칭에 걸맞은 인물(도킨스의 평)”이 될 수 있었을까? 그가 남긴 다른 업적도 많지만, 이타적 행동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처음으로 밝혔음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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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패턴에 눈을 뜨다
해밀턴은 1936년 태어나서 영국 켄트주의 한적한 시골 오두막집에서 6남매 중 둘째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들판을 쏘다니며 곤충, 특히 나비를 채집하길 즐겼다. 12살 생일 때 부모님으로부터 생태유전학자 에드먼드 포드(Edmund Ford)의 책 ‘나비’를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은 해밀턴으로 하여금, 생물학이 우표 수집에 불과한 취미 활동이 아니라 자연 속에 숨은 패턴을 찾는 과학임을 일깨워 주었다.
나비를 쫓아다니던 어느 날, 해밀턴은 군사공학자였던 아버지가 토끼 구멍 속에 숨겨 놓은 총과 화약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남동생을 불러다 앉힌 다음, 원료를 이것저것 섞어서 놋쇠 탄약통에 재워 넣고 반응을 살펴보는 실험을 했다. 쾅! 탄약통이 폭발했고 해밀턴은 까무러쳤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로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해밀턴은 세 손가락의 일부를 잃었고 가슴에 평생 놋쇠 파편을 지니고 살게 됐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해밀턴은 어머니로부터 다윈의 ‘종의기원’을 배웠다. 사실 그는 진화 이론을 공부하기에 매우 유리한 환경에서 자랐다. 집에서 6.5km만 걸어가면 다윈이 작고하기까지 40년을 살았던 다운하우스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어머니와 함께 그 길을 수없이 오갔다. ‘나비’와 ‘종의 기원’은 열두 살 소년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관찰해온 곤충들의 다양한 특성으로부터 하나의 일반 원리를 끄집어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해밀턴은 유서 깊은 명문 사립학교인 톤브리지 스쿨을 졸업했다.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특출나진 않았다. 생물학이 가장 우수했고, 수학과 다른 과학 과목도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의 수능 시험에 해당하는 A-레벨 시험에서 프랑스어는 낙제점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해밀턴은 전 과목 만점을 휩쓰는 전형적인 모범생이 아니었기에 훗날 그가 이룩한 성취에 대해 동창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스스하고 바보같이 보이던 애가 나중에 그렇게 잘 됐으니 신기했죠.”
해밀턴은 별로 흥미가 안 생기는 과목은 그냥 내버려 두고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과목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학생이었다. 이런 점에서 해밀턴이 시험지에 답안을 작성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해밀턴은 어떤 주관식 시험이든지 세 문제 이상 답하는 일이 없었다(독자가 학생이라면 이는 되도록 본받지 마시라). 단, 풀기로 마음먹은 문제에 대해서는 완벽한 답을 길고 상세하게 써냈다. 빈칸으로 제출한 다른 문제들은 아는데 시간이 없었는지, 몰라서 못 쓴 건지는 오리무중이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미 중고생 때부터 해밀턴은 고분고분한 ‘범생이’가 아니라 소신 있는 과학자였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603/S201604N042_2.jpg)
피셔를 영접하다
생물학, 그중에서도 진화와 유전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해밀턴은 1957년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곧 실망했다. 진화생물학의 현대적 종합이 한창 이뤄지고 있던 시기였지만, 이 세계 최고의 대학교에서 진화는 찬밥 신세였다. 지난 회에 살펴보았듯이, 동물들은 종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는 집단 선택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케임브리지대 생물학자의 다수는 진화를 별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적어도 자연 선택의 효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처럼 보였다”고 해밀턴은 덤덤하게 회상했다.
교수님들로부터 진화를 배울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새내기 학생은 도서관에서 진화 관련 서적과 논문을 독학하는 길을 택했다. 어느 날 해밀턴은 그의 운명을 정한 책과 마주쳤다. 아직 케임브리지대에 재직하고 있던 로널드 피셔가 쓴 ‘자연 선택의 유전학적 이론’(1930)이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해밀턴은 “이 책이 진화를 이해하는 열쇠임을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피셔 빠돌이(Fisher freak)’가 됐다. 피셔의 극도로 간결하고 함축적인 논리 전개를 따라가느라 학과 공부도 접고 책에 매달렸다. 1999년에 ‘자연 선택의 유전학적 이론’ 주석본이 새로 출간됐을 때 해밀턴이 뒤표지에 실은 헌사를 보자.
『이 책은 내 케임브리지대 학사 과정 전체와 맞먹는 중요성을 지닌다. 이 책에 투자한 시간으로 인해 내 졸업 평점이 아마도 한 등급은 낮아졌을 것이다. 한 장(章)을 읽는데 몇 주, 심지어 몇 달이 걸렸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카프카조차도 피셔가 자선을 논할 때만큼 나를 우울하게 하진 못했고, 피셔가 문명을 논할 때만큼 나를 흥분시키진 못했다.』
이 책에서 피셔는 자연 선택이 집단이 아니라 개체의 이득을 높여준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러나 해밀턴의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들은 하나같이 이타적 행동은 종 전체에게 이득이 됐기 때문에 선택됐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어떤 교수는 피셔가 통계학자로선 훌륭하지만, 생물학자로선 별로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해밀턴은 교수들이 틀렸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자연 선택이 개체의 수준에서 작용한다는 현대적 종합의 체계 안에서 어떻게 이타적 행동을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해밀턴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고약한 맛은 어떻게 선택됐나
피셔(1930)는 이타성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고약한 맛의 진화’라는 단락에서 제공했다. 딸기독화살 개구리처럼, 어떤 애벌레나 나비는 자신을 먹어봤자 아주 맛이 없음을 포식자에게 화려한 경계색으로 알린다. 포식자는 화려한 먹이를 덥석 물었다가 고약한 맛에 놀라 뱉어낸 다음에 다시는 그렇게 생긴 먹이에 접근조차 하지 않는다. 문제는 애벌레처럼 아주 부드러운 몸통을 지닌 생물은 포식자에게 한 번만 공격 당해도 죽기 쉽다는 것이다. 포식자에게 고약한 맛을 선사해서 자기 몸을 지키는 전략은 당사자에게는 손해지만 종 전체에게 이득을 줬기 때문에 선택된 이타적인 행동처럼 보인다. 피셔는 이런 이타성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피셔의 해답은 혈연이었다. 대개 애벌레들은 피를 나눈 친형제 자매들끼리 다닥다닥 붙어산다. 포식자 새가 날아와 이 중 한 마리를 먹는다. 구역질하며 뱉어낸 뒤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운이 나쁜 애벌레는 목숨을 잃었지만 대신 여러 동기의 생명을 구했다. 어떤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동기들이 공유할 확률은 50%다. 그러므로 고약한 맛을 지닌 의로운 애벌레 당사자는 포식자에게 공격 당해 죽을지언정 그 덕분에 유전자를 공유하는 다수의 친형제 자매들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자연 선선택은 고약한 맛을 만드는 유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애벌레 때 비교적 먼 혈연들까지도 함께 모여 사는 종보다 친동기들끼리만 모여 사는 종에서 고약한 맛이라는 방어체계가 더 뚜렷이 나타나리라고 피셔는 예측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타적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이처럼 혈연에게 유전적 이득을 제공함으로써 과연 후세대에 빈도를 높일 수 있는지 정교한 수식 모델을 세우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피셔는 여기서 멈췄다. 이타성의 진화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단이 없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나중에 해밀턴은 이타적 행동의 수식 모델을 만드는 작업에 처음 착수했을 때, 그 전에 피셔의 책을 분명히 읽긴 했지만 고약한 맛에 대한 피셔의 논의는 머릿속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하긴, 책을 읽을 당시에는 이타적 행동이 자신의 박사학위 주제가 될지는 몰랐으리라. “읽고 나서 잊었다.” 해밀턴의 고백이다.
에필로그
57학번(?) 해밀턴으로선 아쉽게도, 피셔는 1957년 9월에 은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몇 년간 피셔는 케임브리지대에 출강했기에 해밀턴은 그와 두세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어느 티타임 시간에 해밀턴은 피셔에게 다가갔다. 피셔가 흥미를 느낄 만한 통계학에 관련된 문제를 질문했다. 피셔는 다시 한 번 잘 분석해 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응답해 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얼굴을 맞댄 만남보다 책을 통한 만남이 해밀턴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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