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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만능인가

원하는 세포만 골라 파괴하는 정밀유도탄

지난 1998년의 앤지오스태틴에 이어 또 하나의‘기적의 항암제’가 개발됐다는 소식으로 연일 언론이 떠들썩하다. 만성 골수백혈병에 특효약이라는 글리벡. 그 원리는 무엇이고 문제점은 없는지 알아보자.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만능인가


작년 한해동안 가장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라면 ‘가을동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백혈병에 걸려 숨지는 여주인공의 가슴아픈 사랑이야기가 수많은 시청자를 울렸다. 백혈병에 걸린 주인공을 내세우는 드라마는 가을동화 외에도 많다. 극중 인물은 주로 코피를 흘리는 것으로 병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백혈병 진단 후 대부분 2-3개월 이내에 사망함으로써 드라마는 종영된다.

먹는 항암제 복용 후 병세 회복

백혈병이란 일종의 혈액암이다. 정상인의 골수에 있는 조혈모세포는 혈액 속에 있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혈구세포를 비롯해 자기와 동일한 조혈모세포를 만든다. 하지만 백혈병 환자의 경우 이런 조혈모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로 늘어나면서 정상적인 혈구세포를 만들지 못하고, 또한 정상적인 조혈모세포의 활동도 방해한다. 백혈병이라는 이름은 환자의 혈액에서 비정상적인 백혈구의 수치가 높게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백혈병은 대략 인구 10만명 당 10명 정도 발병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연간 3천-4천명 정도가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백혈병에는 급성과 만성의 두가지가 있다. 급성백혈병은 조기에 발견해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좋은 치료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반면 만성백혈병은 발병 후 3-5년의 만성기를 거쳐 가속기에서 급성기로 진행되는데, 급성기 환자는 대부분 3-6개월 이내에 숨진다. 만성백혈병은 발병 후에도 증세가 미약해 진단이 늦어지는 경향이 있어 조기치료가 어려운 난치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만성백혈병 환자에게서 획기적인 치료효과를 거두고 있는 알약이 개발돼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미 희망을 잃고 고통으로 누워있던 환자가 이 약을 먹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잇따라 보도되면서 기적의 항암제로 불리게 된 ‘글리벡’이 그 주인공이다. 멀고 험난했던 암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인간이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먹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에 대해 알아보자.

미 보건부 장관이 직접 판매 승인 발표

글리벡(개발명 STI-571, Glivec/Gleevec)은 지난 1998년 스위스의 제약회사 노바티스사가 만성 골수백혈병(CML, Chronic Myeloid Leukemia) 환자를 위해 개발한 약이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작년 5월 10일 노바티스사가 글리벡의 판매허가 신청을 한지 2달여만에 전격 판매 승인을 해줬다. 판매 허가가 늦어도 올해 말까지 이뤄질 것이라는 노바티스사의 예상보다 이른 승인이었다. 특히 미국 보건부 장관 토미 톰슨이 이례적으로 승인 사실을 직접 발표해 더 많은 화제를 낳았다.

사실 글리벡은 연구 개발초부터 세계 신약 역사상 볼 수 없었던 이례적인 기록을 세워왔다. 글리벡에 대한 노바티스사의 1차 임상실험이 실시된 1998년, 글리벡을 복용한 첫 31명의 만성골수백혈병 환자 모두의 증세가 놀랄 정도로 호전됐다. 노바티스사의 종양학 연구실 실장인 데이비드 입스테인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실험 결과는 암이나 백혈병 치료제 연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1차 임상실험 결과를 검토한 노바티스사는 즉시 글리벡 생산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 신약에 대한 자신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기도 해도 이제 겨우 1차 임상실험을 끝낸 신약의 생산을 시작했다는 것은 당시 노바티스사에게도 회사의 평판이나 투자자금을 고려해볼 때 많은 위험을 감수한 조치였다. 노바티스사는 10년간 1조원을 투자해 글리벡을 개발했다.

그 후 1천2백3십명의 만성골수백혈병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2차 임상실험 결과는 첫 임상실험 결과보다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글리벡을 복용한 전체 환자의 88%가 글리벡 복용 수일 안에 정상적인 백혈구 수치를 되찾았다. 부작용은 가벼운 증세의 어지럼증, 메스꺼움, 부종, 설사 등이었다. 그리고 전체 중 약 50%의 환자가 세포유전학적 반응(cytogenic response)을 보였다. 이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병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세포 내의 유전자 결함, 즉 병의 근본적인 원인이 감소하거나 사라졌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암의 경우 항암치료 후 최소한 5년 이상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아야 완치됐다고 할 수 있으므로 당장의 세포유전학적 반응이 곧 완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적 세포증식 신호를 차단하라

최근 인간 게놈지도의 완성 등으로 가속도가 붙은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발전은 새로운 항암 치료법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글리벡은 최근 개발되고 있는 차세대 항암 치료법인 ‘분자표적 치료법’(Molecular targeted therapy)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항암 치료법은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세포까지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융단폭격’에 비교할 수 있다. 반면 글리벡과 같은 분자표적 치료법은 최근 미국이 탈레반 정부와의 전쟁에 사용하고 있는 최신 정밀유도탄처럼 특정 암부위만 선별적으로 정확히 공격한다. 따라서 부작용이 적으면서 치료효과도 높다. 그럼 글리벡은 과연 어떤 원리로 백혈병 세포만 골라서 공격하는지 알아보자.

거의 모든 만성골수백혈병 환자와 약 20%의 급성림프구백혈병(ALL, acute lymphoblastic leukemia) 환자는 병을 앓고 있는 동안 BCR-ABL이라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을 많이 갖고 있다. 이 단백질은 세포의 증식, 대사, 분화, 운동 등을 조절하는 타이로신 물질을 활성화시키는 효소다. 정상적인 세포의 경우 타이로신은 세포 분열이 필요한 경우에만 합성돼 세포의 증식을 촉진한다. 하지만 백혈병 환자는 BCR-ABL이 끊임없이 타이로신을 활성화시켜 세포를 무한정으로 분열시킨다. 바로 백혈병의 원인이다.

BCR-ABL 효소는 조혈모세포 내에 있는 ‘필라델피아 염색체’의 BCR-ABL 부분에서 만들어진다. 필라델피아 염색체란 22번 염색체에 변이가 생긴 일종의 변종염색체다. 인간의 46개의 염색체 중 9번 염색체에는 ABL이라는 원형암유전자 부위가 있고, 22번 염색체에는 BCR이라는 부분이 있다. 조혈모세포에서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도중 9번 염색체의 ABL이 절단돼 나와 22번의 BCR에 결합되면 ABL과 BCR이 결합된 비정상적인 필라델피아 염색체가 생긴다. 이 염색체의 BCR-ABL 부분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이 바로 BCR-ABL 타이로신 활성화효소다.

BCR-ABL 효소는 조혈모세포 내의 타이로신, 그리고 세포 내 에너지 공급원 역할을 하는 ATP와 반응해 타이로신 복합체를 만든다. 이 타이로신 복합체는 세포 밖으로 나가 다른 조혈모세포 표면의 타이로신 리셉터에 결합해 세포 안으로 ‘세포분열을 계속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끊임없이 세포가 분열하는 원인이다. 글리벡은 BCR-ABL과 결합하는 ATP를 경쟁적으로 방해해 결국 타이로신 복합체를 만들지 못하도록 한다. 즉타이로신 활성화효소의 역할을 방해함으로써 세포의 비정상적인 증식신호를 차단해 암을 막는 것이다.

임상실험 없이 국내 시판 허가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지난 2001년 4월 20일 글리벡을 ‘희귀의약품’으로 지정해 다급한 환자들이 우선 글리벡을 항암치료제로 사용할 길을 열어줬다. 올초부터 글리벡을 항암 치료제로 복용하고 싶다는 많은 환자들의 절실한 민원이 대통령비서실 등 관련 정부 부서에 쏟아져 식약청이 노바티스사에 임상실험 허가 신청 대신 희귀의약품 신청을 권고했고, 노바티스사가 신청서를 제출한지 20분만에 글리벡을 희귀의약품으로 등록해줬다. 미국 FDA의 승인이 나지 않은 의약품을 국내에서 별도의 임상실험 없이 환자가 사용할 수 있게 한 첫번째 사례다.

정부의 당초 계획은 국내에서 우선 6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1년 동안 글리벡에 대한 임상실험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우선 노바티스사가 임상실험용으로 제공할 예정이었던 글리벡을 기증받아 약 1백50명의 국내 만성골수백혈병 환자에게 1개월 동안 무상 제공했다. 의료계는 초기의 이런 성급한 글리벡 사용에 많은 우려를 표명했다. 병세를 약화시키고 치료할 수 있는 약의 분량과 기간은 각 민족의 체질과 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사전 임상실험에서는 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환자를 알맞은 그룹으로 나눠 일정한 환경 아래서 복용된 약에 대한 여러가지 반응을 자세히 조사한다.

그런데 수많은 병원에 흩어져 있는 환자들이 일단 약을 복용하면 여러가지 조건이 일정하게 관리될 수 없기 때문에 약의 복용과 관련된 사후조사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또한 앞으로 임상실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약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도 논란거리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허가를 받았다는 이유가 국내 환자들이 사용해도 1백%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과정을 통해 시판되고 있는 글리벡은 과연 약점없는 기적의 항암제일까. 물론 글리벡도 약점을 갖고 있다.

지난 6월 21일 사이언스지는 만성골수백혈병 말기 환자는 글리벡을 복용한 후 처음엔 증세가 호전되다가 곧 글리벡에 내성을 보여 다시 증세가 악화될 수 있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글리벡의 최초 임상실험에 참여했던 3명의 백혈병 전문의 중 한사람인 찰스 소여스 박사가 이끄는 UCLA의 존슨 암 센터의 연구팀에 의해 진행됐다.


임상실험 없이 국내 시판 허가


말기 백혈병 환자에게 내성 보여

소여스 박사팀은 만성골수백혈병 말기인 급성기에 해당하는 환자 중 글리벡을 복용한 후 증세가 호전된 환자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증세가 악화된 11명의 환자를 연구했다. 그 결과 11명 중에 6명은 BCR-ABL에 관계된 유전자의 변이로 글리벡이 결합하는 BCR-ABL 부위가 변형됐다. 즉 글리벡이 BCR-ABL의 역할을 방해할 수 없게돼 비정상적인 세포증식이 일어나 백혈병이 재발한 것이다. 다른 3명은 보통 한개만 만들어지는 BCR-ABL 유전자가 몇개 더 생성되면서 글리벡이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BCR-ABL이 과잉생산 돼 약의 효과가 떨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2명의 환자에게는 충분한 DNA를 얻을 수 없어 이유를 규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보고서가 발표된 후 ABC와의 인터뷰에서 소여스 박사는 “만성백혈병 말기 환자에게 복용된 글리벡과 암세포와의 싸움에서 암세포가 승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만성골수백혈병 초기 환자라도 기존의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글리벡만을 너무 장기적으로 복용할 경우 내성이 생겨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어 글리벡의 효능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앞으로 백혈구 암세포의 좀더 세밀한 부분을 선별적으로 공격해 글리벡의 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제가 개발돼야 할 것이다.

최선 치료는 아직까지 골수이식

결국 글리벡만으로 만성골수백혈병의 완치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글리벡 공급 심의위원장’인 가톨릭대 의대 김동욱 교수는 “백혈병 치료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은 아직까지 골수이식”이라고 말한다. “다만 기존의 항암치료가 더 이상 효력이 없는 만성골수백혈병 초기 환자가 복용했을 때 정상인과 비슷한 건강상태까지 병세가 호전될 수 있고, 기존의 항암치료법을 사용했을 때 보다 생존기간을 2-4배정도 연장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글리벡은 환자에게 골수이식을 할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지 결코 완치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글리벡은 단기적으로는 기존의 치료법인 인테페론보다 2배 정도 높은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인 효과와 부작용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또한 초기의 만성골수백혈병 환자에게 큰 효과가 있는 반면 말기의 환자에게는 약의 내성 때문에 다른 항암치료법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인테페론이 10-20년의 임상결과를 갖고 있고 골수이식이 20-30년의 임상결과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해 글리벡은 아직 3년여의 임상결과만을 보유하고 있다.

아직은 사용해야 하는 환자의 상태, 복용시작시기, 복용기간, 복용한도, 복용중단시기 등 약 복용에 대한 충분한 임상결과가 없기 때문에 글리벡 사용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없는 상태다. 의료계는 많은 환자들이 글리벡을 마치 모든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글리벡에만 의존하려는 경향에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보통 암환자의 완치여부는 최소 5년 동안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 글리벡을 복용해 진정으로 백혈병이 완치됐는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글리벡 가격 책정 두고 국제적 마찰

글리벡의 본격적인 국내 시판을 앞두고 제조사인 노바티스사와 우리 정부가 가격 문제에서 심한 마찰을 빚고 있다. 노바티스사가 제시한 글리벡의 가격은 1알당 2만5천원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생각은 다르다. 지난 10월 3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종적으로 제시한 글리벡의 국내 보험약가는 1알당 1만7천8백62원. 노바티스사가 제시한 가격의 71.5%에 불과하다. 노바티스사가 이를 거부한다면 글리벡의 국내도입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

정부가 이런 가격을 제시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국내의 보험료를 담당하고 있는 국민건강보험재단의 재정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6월말부터 바닥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금융기관을 통해 매달 3천여억원을 빌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의료계 한편에서는 정부의 정책 실패로 인해 하루하루가 급한 백혈병 환자만 피해를 보는게 아니냐는 비난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편 노바티스사의 가격 정책을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현재 노바티스사는 세계 모든 나라에 동일한 가격(2만5천원)으로 글리벡을 공급하고 있다. 진정으로 백혈병 환자를 위한다면 국민총생산(GNP) 등의 국가별 수준을 고려해 약값을 책정해야 되지 않는냐는 것이다. 하루 4번 글리벡을 복용해야 하는 백혈병 환자가 노바티스사의 값으로 약을 살 경우 한달 약값은 약 3백만원 정도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등의 많은 나라에서는 노바티스사의 비인도적이고 이기적인 횡포를 비난하는 항의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정부와 노바티스사는 한발자국씩 물러서서 고통받는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환자 곁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환자를 지키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하루 속히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해야 할 것이다.


글리벡 가격 책정 두고 국제적 마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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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손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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