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우지 않은 정신장애인 중에는 놀라운 예술성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개성 있는 감각은 보는 이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경기도 용인 벗이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개최한 정신장애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를 찾아, 이들의 작품과 내면세계를 들여다봤다.


어린시절부터 조현병을 앓았던 발라는 자신의 방을 모든 악한 영과 죽음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구원의 공간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의 그림은 원색적이고,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 같으면서도 자신만의 언어와 특별한 상징을 담아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상 모든 사물은 3차원이 아니라 2차원 캔버스의 연장선이었다.

특히 그는 다양한 언어의 사전을 모아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어내고, 그 단어를 작품 속에 표현했다. 이충순 벗이미술관장(정신과 전문의)은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특징(조어증)은 일부 조현병 환자들에게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발라는 대표적인 ‘아르 브뤼(Art Brut)’ 작가다. 20세기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1901~1985)가 정신장애인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이들의 작품을 지칭하는 장르명을 아르 브뤼라고 불렀다. 근래에는 공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작품까지 포함하는 ‘아웃사이더 아트’를 대변하는 이름이 됐다. ‘가공하지 않은, 원시적인, 순수한 예술’이라는 아르 브뤼의 의미는, 표현기법과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면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정신장애인들의 예술 세계를 잘 표현하는 단어다.
비현실 왕국 속에 사는 사람들
“정신질환 증상은 크게 ‘생각이 이상한 것’과 ‘감정이 이상한 것’으로 나뉩니다. 조현병은 ‘생각 이상’에 속하고, 조울증은 ‘감정 이상’에 속하죠.”
이 관장은 정신질환을 증상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했다. 그리고 전시된 작품에서 그들이 가진 질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생각 이상에 속하는 환자들이 만든 작품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이야기를 전개하려 한다. 반면 감정 이상에 속하는 환자들의 작품은 색채가 화려하거나 아주 칙칙하다.
이런 설명에 따라 전시장의 작품들을 살펴보니, 그들의 내면세계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헨리 다거(1892~1973)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폐증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읜 그는 보육원에서 생활해야 했고, 친구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받았다. 그는 점차 폐쇄적으로 변했고, 16살 때 보육원에서 도망쳐 시카고에 정착했다.
그때부터 평생을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한 다거는 다른 사람과 거의 소통하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과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집에만 틀어박혀 살았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괴상한 노인네’ 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집주인이었던 사진작가 네이선 레너는 다거의 방에 들어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1만5145쪽에 달하는 소설과, 수백 장의 삽화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반세기 이상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던 망자의 방은 불운했던 예술가의 상상력이 보존된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그가 남긴 소설의 제목은 ‘비현실 왕국의 비비안 소녀들 이야기 혹은 어린이 노예 반란으로 인한 글랜데코-안젤리니안 전쟁 폭풍 이야기’다. 이름부터 만만치 않은 이 소설은, 다거가 60년 넘게 집필한 판타지 소설로 권수로 따지면 20권이 넘는다. 직접 그린 삽화 중에는 길이가 3m에 이르는 대작도 있다. 그는 거리의 쓰레기에서 책과 잡지, 광고지를 가져와 먹지를 대고 그림을 그린 뒤 색을 입혔다.
그의 작품은 지구를 위성으로 삼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잔혹동화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예쁜 아이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어른들에게 쫓기고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어른들의 거짓말과 연관지었던 그의 청소년기가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작품 속에 어린이들의 수호자로 자신을 등장시켰다.
이 관장은 비현실적인 생각을 작품에 투영하는 것은 “내면 깊은 곳의 표현이자, 동시에 스스로 편안함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며 “자기 증상을 표현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완화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작가 헨리 다거가 그린 소설 삽화 중 하나로, 위 그림은 이 작품의 일부를 확대한 것이다.
어른들로부터 쫓기는 여자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다거는 쓰레기 더미에서 구해온 잡지와 광고지 속에 그려진
이미지에 먹지를 대고 스케치한 뒤 색을 칠하는 방식을 즐겨 썼다.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무한한 반복
정신장애인 작가들이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반복’이다. 이들의 작품에는 비슷한 형상들이 수없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오스트리아 작가 하인리히 라이젠바우어(1938~)가 대표적이다. 그는 사과나 딸기, 벌 같은 물체를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캔버스를 채운다.
사과나 딸기를 그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라이젠바우어가 그린 사과와 딸기는 뭔가 독특하다. 사과 꼭지 반대편에 무언가 노란 게 삐쭉 튀어나와 있다. 또 사과를 나란히 줄지어 늘어놓았지만 반듯하지 않고, 개수도 차이가 난다. 딸기도 마찬가지다. 마치 지팡이처럼 줄기가 꼬부라져 있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왜일까?’,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 ‘이 사람이 본 건 무엇이었을까?’ 같은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잇는다.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 수 있지만, 예술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 작품과 관람객의 마음이 호응하면서 작가가 의도치 않은 울림까지 만들어내는 것. 라이젠바우어의 작품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이 관장은 정신질환이 사람의 시각 기능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별빛과 달무리가 대기 중에 휘몰아치는 듯한 고흐의 그림도 그가 앓았던 병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관장은 “실제로 뇌매독에 걸린 사람은 색을 다르게 본다”고 말했다.
반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폴란드 작가 에드문드 몬시엘(1897~1962)의 작품을 보면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 안에서 끝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프랙탈’이 연상된다(70쪽). 그의 그림에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끊임 없이 반복된다. 얼굴 속에 얼굴이 있고, 몸에도 얼굴이 있다. 캔버스의 모든 곳을 빈틈없이 얼굴로 채웠다. 이 얼굴들은 모두 같은 사람의 얼굴이지만, 바라보는 곳이 조금씩 다르다. 누구의 얼굴일까.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관장은 “이처럼 캔버스를 정교하게 채우는 기법을 일반 작가들에게서는 못 봤다”며 “그림을 보면 따라 그릴 수는 있겠지만, 보통 사람은 이런 발상 자체를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과거 정신병원의 분위기가 이런 작가들을 길러내기에 적합(?)했는지 모른다. 당시에는 환자들을 격리해 놓는 것 외에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자들에게 약을 복용시켜 증상을 누그러뜨리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국에는 아직 이런 작가들이 없다. 스위스의 로잔아르브뤼미술관과 오스트리아의 구깅미술관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설립된 아르 브뤼 전문 미술관인 벗이미술관은 용인정신병원 환자들 중에서 잠재력을 보이는 이들을 발굴해 작품 활동을 지원할 계획이다. 또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미술치료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다.
분명 한국에도 사람들을 놀랠 빼어난 예술가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표현활동을 통해 고통을 줄이고, 사람들과 교류할 날을 고대한다.

오스트리아 작가 하인리히 라이젠바우어의 작품 ‘사과(위)’와 ‘딸기’. 같은 개수씩 줄 맞춰
늘어놓은 듯 보이지만 첫째 줄과 마지막 줄에 있는 사과는 다른 줄보다 하나씩 더 많은
15개씩이다. 또 딸기는 줄기가 꼬부라져서 노인의 지팡이를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