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 내용은 잘 모르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이다.
하지만 표준모형은 낯설다.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많지 않다.
“표준모형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물리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후배(실험물리 전공)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몇몇 이공계 대학생들에게 물어봤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바꿔 물었다. 힉스 입자를 아느냐고. 그제야 “아~! 그게 그건가요?”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2012년에 발견된 힉스 입자는, 쉽게 말하면 표준모형의 ‘대표상품’ 쯤 된다. 힉스 입자 외에도 쿼크, 중성미자 등 표준모형이 낳은 ‘제품’은 수없이 많고, 여기서 나온 노벨물리학상도 무려 19개나 된다. ‘히트상품 제조기’라고 부를 만하다. 하지만 그렇게 ‘상품’ 속에 묻히기에는 뭔가 많이 아쉽다. 표준모형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매력적이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와 세상 만물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를 설명하고, 다양한 첨단 기술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게 표준모형이다.
표준모형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 중에서 중력을 제외한 세 가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바로 전자기력과 약력(약한 핵력 혹은 약한 상호작용), 강력(강한 핵력, 강한 상호작용)이다. 전자기력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물체를 만지고 축구와 야구 같은 운동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기도 하다. 우리 몸이 원자로 이뤄져 있고, 원자는 전하를 띤 핵과 전자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전자기력은 이들을 묶어주는 힘이다(2파트 참고).
약력은 원자핵 붕괴를 일으키는 힘으로, 전자기력보다 세기가 약해 약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양에서 수소원자의 핵이 융합해 큰 에너지를 내는 과정에 약력이 관여한다. 또 지구 내부에서는 칼륨-40을 비롯해 다양한 동위원소(원자핵 속에 양성자보다 중성자가 더 많은 원소)가 붕괴돼 지구의 맨틀을 데우는 에너지원이 된다. 그 에너지는 심해저 열수구나 화산, 지진 같은 자연현상으로 분출된다.
강력은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핵발전(원자력발전)의 근원이 되는 힘이다. 양전하를 띠는 양성자들을 꽁꽁 묶어주는 강력은 약력이나 전자기력보다 강력한 힘으로, 원자핵이 분열될 때 에너지를 방출시킨다. 그 에너지로 물을 데워서 발전기를 돌리고, 전기를 만드는 게 핵발전이다.
이 세 가지 힘을 표현하는 표준모형은 상대성이론을 나타내는 ‘질량-에너지 등가원리(E=mc2)’나 ‘뉴턴의 운동방정식(F=ma)’처럼 수식 형태로 기술할 수 있다(하지만 여기 쓰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하다!). 갖가지 자연현상과,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에너지의 근원, 그리고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수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힉스 입자나 쿼크, 중성미자 등은 그 수식을 채우고 있는 뼈대라고 할 수 있다.
신약개발부터 원자력 안전까지, 표준모형의 ‘파생상품’
표준모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과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다룬다. 그래서인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는 다른 분야처럼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하지만 표준모형을 비롯한 입자물리학 연구에 쓰이는 기술은 의료, 반도체, 신약개발, 원자력 안전, 정보기술(IT) 등의 분야에 혁신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현재 전세계에서 운영되는 입자가속기의 수는 3만 대가 넘는다. 특히 그 중에서 7000대 이상은 의료용으로 쓰이고 있다. 가속기가 만들어내는 X선과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중이온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쓰인다. 예를 들어 암 치료에 쓰이는 양성자 치료법은 수소 원자로부터 얻은 양성자를 가속기로 가속시켜 환자의 암 조직에 쪼이는 방식이다. 양성자가 깊은 암 조직까지 침투해서 일시에 에너지를 내뿜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정상 조직에 미치는 방사선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3000만 명 이상의 환자들이 가속기를 이용한 치료를 받았으며, 세계적으로 의료용 가속기 시장은 연간 약 4조1500억 원(35억 달러)에 이른다.

가속기뿐만 아니라 가속시킨 입자가 충돌한 뒤 나오는 반응을 검출하는 입자 검출기도 암 진단에 쓰인다. 대표적인 것이 양전자단층촬영(PET)이다. 양전자(+전하를 띤 전자)를 방출하는 동위원소를 포도당 유사체에 결합해 몸에 주입한 뒤, 몸에서 나타나는 반응을 검출기로 살피는 것이다. 암세포는 정상세포보다 훨씬 많은 포도당을 소모하기 때문에, 방출되는 양전자의 차이를 분석하면 어느 부위에 암세포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신약 개발을 위한 단백질 구조 분석도 가속기가 활용되는 분야로, 현재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치료에 가장 많이 처방되는 치료제 칼레트라(Kaletra)가 대표적이다. 칼레트라는 1996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단백질가수분해효소(protease)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로 개발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미국 국립아르곤연구소의 가속기가 쓰였는데, 전자를 가속시켜 얻은 강한 X선을 단백질에 쪼여주는 방식으로 구조를 분석했다.
최근 주목받는 입자물리학 기술 활용 분야는 원자력 안전이다. 2015년 초부터 일본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내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뮤온을 검출하는 장치를 설치했다. ‘뮤온’은 표준모형의 17개 기본 입자 가운데 하나로, 매 순간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지는 우주선(cosmic ray)이 대기와 반응해서 생성된다. 특히 이 입자는 물질을 통과하는 성질이 강한데, 우라늄처럼 밀도가 높은 물질을 만나면 흡수되거나 진행방향이 바뀐다.
일본 물리학자들은 원자로 내부를 지나온 뮤온을 측정해 X선처럼 원자로 내부를 들여다봤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나고야대 모리시마 구니히로 교수는 후쿠시마 제1원전 2호기 원자로 노심의 핵연료가 70% 이상 녹아내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2015년 9월 일본물리학회에서 발표했다. 그밖에도 전세계 중성미자 검출기를 이용해 핵물질을 제조할 때 나오는 중성미자를 감시하자는 의견 등 원자력 안전에 입자물리학 기술을 응용하는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스위스 CERN에 있는 월드와이드웹 서버.]
표준모형의 ‘파생상품’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것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컴퓨터과학자 팀 버너스 리가 1991년에 개발한 월드와이드웹(WWW)이다. 오늘날 전세계인이 사용하는 인터넷이 바로 표준모형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입자물리학 연구는 입자가속기라고 부르는 거대한 실험장치를 이용해서 이뤄진다. 실험장치는 몇 대 없는데 연구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많게는 1000명이 넘고 전세계에 퍼져있다. 따라서 연구 정보를 서로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 팀 버너스 리는 연구자들이 효율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통신망을 이용해 서버에 저장된 정보를 검색하고, 그 결과를 모니터에 출력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있게 했다. 세계 곳곳의 입자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월드와이드웹은 일반인들에 게도 급속도로 확산됐다. 장상현 기초과학연구원(IBS) 순수물리이론연구단 연구위원은 “지금도 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논문데이터베이스가 20여 년 전부터 입자물리학자들이 논문을 올린 아카이브(arXiv)”라며 “최근에는 초당 수 기가바이트(GB)의 속도로 입자가속기에서 전송되는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 세계 곳곳의 컴퓨터를 연결하는 새로운 컴퓨팅 방식도 입자물리학계가 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입자물리학, 좁게 말하면 표준모형 연구에서 비롯됐다.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가’를 묻고, 물질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이 의도치 않게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중요한 과학적 발전은, 진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가 아니라 본능적인 궁금증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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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인류 최고 이론을 향한 도전 표준모형
Part1.표준모형이 지배하는 일상
Part 2.커피잔 속에서 우주의 원리를 보다
Part 3.‘표준모형 너머’를 꿈꾸다
Part 4.그들은 더 완벽한 우주이론을 꿈꾼다
Part 5. 스티븐 와인버그 교수 인터뷰 “‘최종 이론’ 찾을 때까지 탐구 멈추지 않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