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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마치 누군가 설계한 듯한

전중환의 협력의 공식 ❶

※ 편집자 주_진화심리학자 전중환 경희대 교수의 ‘협력의 공식’을 새롭게 연재합니다. 인류는 물론 생명이 갖고 있는 이기성과 이타성을 진화의 관점으로 살펴봅니다.


지난해 9월 어느 새벽, 제주시 용담동 인근 바다에서 큰 소동이났다. 술에 취한 한 남자가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졌다. 다행히 이를 발견한 두 청년 이승준, 강동호 씨가 바다에 뛰어들어 남자의 목숨을 구했다. 두 사람은 제주 소방서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금전적 보상은 없었다. 그래도 두 이는 귀한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함과 보람을 느낀다며 밝게 웃었다.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자연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비정한 정글인가, 아니면 모든 생명이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인가? 침몰하는 세월호를 먼저 탈출해 304명의 무고한 승객들을 희생시킨 이준석 선장과 선원 15명을 보면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인명 구조에 따르는 이해타산을 머리로 저울질하지 않고서 곧바로 몸을 바닷속으로 던진 두 청년을 보면 이타성도 인간의 본능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된다.

이 연재는 이기성과 이타성을 진화의 관점에서 살핀다. 오늘날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협력과 갈등을 단일한 이론 틀로 매끄럽게 설명하고 있다. 바로 진화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이 1963년에 제안한 ‘포괄 적합도 (inclusive fitness) 이론’이다. 포괄 적합도 이론이 낯설게 들린다고 인상을 쓰진 마시라. 어쨌든 우리는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만든 과학 이론이 어떻게 부모의 자식 사랑, 남아 혹은 여아 선호, 형제 간의 다툼, 조부모의 손주 챙기기, 친족이 아닌 사람 간의 협력, 영웅적인 자기희생, 국가에 대한 충성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잘 설명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첫걸음을 아쿠아리움에서 시작하자.


풀잎 해룡을 찾아라!

얼마 전 롯데월드몰 아쿠아리움을 7살 난 아들과 함께 방문했다. 깊고 드넓은 해양 생태계의 경이로움을 아이가 직접 체험하게 해주려는 의도는…, 별로 없었다. 아쿠아리움 방문고객은 주차요금을 크게 할인해 준다기에 아쿠아리움을 후딱 둘러보고 남은 시간 동안 쇼핑을 즐길 심산이었다. 아, 내가 좋아하는 물고기다. 풀잎 해룡(Weedy seadragon)이었다. “하준아, 저것 봐. 해초랑 똑같이 생겼지? 저렇게 모양과 색깔이 해초를 빼 닮아서 남들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는 거야.” 그런데 풀잎 해룡이 해초들 사이에 있으니 정말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이는 끝내 해룡을 찾지 못했다. “아빠,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풀잎 해룡은 마치 조각가가 해초를 본떠서 정교하게 빚어놓은 걸작품 같다. 조각가가 실제로 있을 리 만무하다. 어쨌든 그가 그렇게 빚은 ‘목적’은 주변 해초를 흉내 내서 포식자의 눈을 피하기 위함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계의 생물들을 찬찬히 뜯어 보면, 어떤 목적을 잘 달성하게끔 정교하게 계획된 특질, 곧 적응(adaptation)을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날개는 하늘을 날기 위함이다. 눈은 세상을 보기 위함이다. 심장은 혈액을 내보내기 위함이다. 눈, 귀, 팔, 다리, 심장, 날개, 더듬이, 아가미, 뿌리, 열매처럼 분명한 기능을 수행하게끔 설계된 생물학적 적응들은 우리 주변에 널렸다. 너무 흔한 나머지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탁월하게 설계됐는지 그 진가를 종종 잊는다.

일례로 손을 살펴보자. 그리스의 의사였던 갈레노스는 사람의 손은 사물을 조작하는 도구로 그야말로 완벽하게 설계됐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마법처럼, 손은 쉴 새 없이 변신한다. 갈고리 모양 손잡이(들통을 들 때), 가위 모양 손잡이(담배를 쥘 때), 다섯 가락 집게(잔 받침을 잡을 때), 세 가락 집게(연필을 쥘 때), 조임 손잡이(망치를 쥘 때), 원형 손잡이(병뚜껑을 열 때), 그리고 구형 손잡이(공을 집을 때)로 손은 현란하게 탈바꿈한다. 바구니 안에 있는 날달걀을 하나 집어서 다른 바구니로 옮겨야 한다고 하자. 사람에겐 식은 죽 먹기다. 로봇에겐 끔찍한 난제다. 너무 세게 잡으면 달걀을 깨뜨린다. 너무 살살 잡으면 달걀을 떨어뜨린다. 게다가 달걀을 손가락으로 잡기 전에 어느 정도의 강도로 잡을지 이미 결정을 해야 한다! 이처럼 공학적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과제를 우리의 손은 별다른 노력 없이 척척 해낸다. 다시는 손을 무시하지 마시라.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처럼 보이는 적응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858년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그 해답을 제시했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다. 자연 선택은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일어난다. 첫째, 변이다. 한 종에 속한 개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나는 내 가족들, 내 이웃들, 다른 나라 사람들과 키, 성격, 지능, 다리 길이 등에서 다르다. 둘째, 유전이다. 변이 가운데 어떤 것들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해진다. 셋째, 차별적인 번식이다. 개체들이 후대에 남기는 자식 수는 각기 다르다. 이 셋만 성립하면 자연 선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어난다. 예외는 없다. 그저 논리적인 귀결이다.

한 마디로, 개체의 번식 성공도(평생 낳는 자식 수, 이를 ‘적합도(fitness)’라 한다)를 높여주는 유전적 변이가 개체군 내에 점차 흔해지는 과정이 바로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다. 예컨대 어떤 종의 생태적 환경에서 먹이를 잘 찾게 하거나, 포식자를 잘 피하게 하거나, 전염병에 잘 안 걸리게 하는 등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형질은 점차 개체군 내에 널리 퍼지게 된다.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핏(fit)이 좋다’고 흔히 표현하지 않는가. 바로 그거다. 유전적 변이들 가운데 개체의 번식에 도움이 되는 변이만을 여러 세대에 걸쳐 우직하게 골라내는 자연 선택 과정이 결국 그 종이 계속 접해온 환경에 딱 맞는, ‘핏한’ 개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사자는 황량한 사막이나 빽빽한 열대 정글에 적응하지 않았다. 사자의 형태와 습성은 탁 트인 아프리카 초원에 딱 들어맞는다. 요약하자.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는 꼭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처럼 보이는 생물학적 적응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잘 설명해준다.
 

다윈과 멘델의 의기투합

주위를 둘러보라. 확실히 자식은 부모를 닮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키, 성격, 언행 등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았다. 자연 선택이 작동하려면 변이가 유전돼야 한다는 두 번째 전제는 따라서 신빙성 있다. 그러나 이 자체는 왜 자식이 부모를 닮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한다. 1858년 다윈과 월리스가 영국의 린네 학회에서 논문을 각자 발표한 지 8년 후에야, 수도승 그레고어 멘델이 수도원 정원에서 기른 완두콩들로부터 유전 법칙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멘델에 따르면, 유전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일종의 입자가 고스란히 전해져서 일어난다. 이렇게 유전되는 입자를 오늘날 우리는 ‘유전자(gene)’라 한다. 한 유전자는 자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 전해지든가, 않든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섞이는 일은 없다. 이를테면, 완두콩 색깔을 지정하는 유전자는 노란 유전자와 푸른 유전자다. 그래서 노란 콩 아니면 푸른 콩만 있다. 누르께한 푸른 콩은 있을 수 없다.


멘델의 유전학은 완전히 묻혀 있다가 1900년대 초에 이르러 몇몇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됐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에서 빠져 있던 퍼즐 한 조각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진화학자들이 새로 등장한 유전학자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맞이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다윈은 키, 몸무게, 지능처럼 물 흐르듯 연속적인 변이를 강조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변이가 충분히 있어야 자연이 이 중에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멘델이 주로 연구한 변이는 콩 색깔(노랑, 푸름), 콩의 껍질(둥금, 주름), 꽃의 색(흰색, 붉은색)처럼 단속적이고 불연속적인 변이였다.

초창기 멘델 유전학자들은 돌연변이가 한 유전자를 다른 유전자로 일거에 바꾸고 이에 따라 진화가 된다고 생각했다. 즉, 진화는 돌연변이가 성큼성큼 내딛는 도약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연속적인 변이에 자연 선택이 작동해 가랑비에 옷깃 젖듯 서서히 진화가 이뤄진다는 발상은 당치 않다며 비웃었다. 다윈을 떠받들던 진화학자들이 발끈한 건 당연하다. 20세기 초반 유전학자들과 진화학자들은 서로 치고 받으며 무려 30년을 싸웠다.

1930년대 초반 로널드 피셔, 슈얼 라이트, J.B.S. 할데인 세 사람이 다윈과 멘델의 대화합을 끌어냈다. 단단한 입자 같은 유전자들이 키, 몸무게 같은 연속적인 변이도 만들며, 여기에 자연 선택이 작동함이 수학적으로 입증됐다. 자연 선택은 개체의 번식에 도움이 되는 유전자가 세대를 거치며 점차 흔해지는 과정이다. 즉, 다윈 당시에는 없었던 유전학적 토대를 드디어 진화론이 얻게 된 것이다. 이를 가리켜 진화 이론의 ‘현대적 종합(Modern synthesis)’이라 한다.

혹시 여러분이 멘델의 법칙이나 완두콩 껍질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정신이 혼미해져 온다면, 위에서 한 말은 지금 즉시 잊어도 좋다. 오늘 기억해야 할 사항은 딱 하나다. (밑줄 칠 준비가 되셨는지?) ‘자연 선택이 복잡한 적응을 만든다. 달리 말하면, 자연 선택은 개체의 번식 성공도(=적합도)를 늘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왜 이 결론을 다음 달까지 기억해야 하냐면, 이 명제는 사회적 행동의 진화에 대해서는 완전히 틀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뭐라고?
 

 
전중환_evopsy@gmail.com
서울대 생물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텍사스대 심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진화심리학 전문가이며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전중환 경희대 교수
  • 에디터

    윤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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