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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바이러스 ‘공존’가능할까

박쥐 몸 안에는 수많은 바이러스가 산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200종이 넘는다. 그 중에는 에볼라, 메르스, 사스, 한타, 광견병 바이러스 등 인간이 걸리면 죽을 수 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도 있다. 하지만 박쥐는 이런 바이러스에 감염되고도 멀쩡히 살아 있다. 낙타와 사람은 메르스 사망률이 천지 차이고, 물새와 닭도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사망률이 다르다. 똑같은 바이러스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바이러스의 생리, 모르는 게 많아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아직 아무도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숙주 몸속에서 병원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연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 초 ‘셀(Cell)’에 발표된 논문➊(goo.gl/HYHQIG)을 보면 이유는 세 가지다. 먼저 실험실처럼 통제된 조건 아래 숙주를 장기간 연구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 박쥐가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도록 통제한 다음 필요할 때만 바이러스를 주입해야 한다. 엄청난 설비가 필요한 일이다. 야생동물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해 실험실에서 키우는 일만도 만만치 않다.

두 번째로 숙주 몸속에 존재하는 병원균의 양을 시간 순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처음 주입한 양, 접종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의 양, 최고 수준일 때의 양, 감염 기간 전체의 병원균 양을 측정해야 한다. 이 과정은 어려울 뿐 아니라 위험하다. 에볼라에 감염된 박쥐와 가까이 지내며 지속적으로 접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병원균을 정밀하게 측정할 도구가 부족하다. 다행히 이 문제는 개선되고 있다. 셀 논문의 제1저자인 캐나다 맥길대의 주디스 맨들 교수는 e메일 인터뷰에서 “유전자가 전사될 때 나오는 물질들을 파악할 수 있는 ‘RNA시퀀싱’ 등 새로운 기술이 발달하면서 연구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작년 에볼라 유행 이후로 자연숙주와 병원균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레서스원숭이(➊)가 SIV(➋)에 감염되면 에이즈를 앓는다.
반면 아프리카녹색원숭이(➌)는 SIV에 감염돼도 별다른 증상이 없다. 두 종이 가진 관용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우리 몸을 지키는 T세포(녹색)와 백혈구(파란색)가 병원균을공격하고 있는 모습(➍).
 

전쟁 대신 타협하는 ‘관용’

맨들 교수는 ‘질병 관용(Disease Tolerance)’이라는 용어로 박쥐가 괜찮은 이유를 설명했다. 숙주인 박쥐가 침입자인 바이러스와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이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먼저 ‘저항(resistance)’과 ‘관용(tolerance)’이라는 용어를 이해해 보자.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면역학 개념은 이렇다. 외부에서 병원균이 침입하면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힘을 합쳐 적과 싸운다. 먼저 선천면역 체계가 병원균을 식별하고 잡아먹는 등 1차적으로 대응하고, 뒤이어 T세포, B세포 등 적응면역 체계가 가동된다. 전쟁은 양단간에 결정이 난다. 우리가 건강을 잃든지 바이러스가 제압되든지. 면역세포와 병원균이 치르는 이 치열한 전쟁을 저항(resistanc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저항만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현상이 있다. 숙주와 병원균이 서로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 것이다. 긴꼬리원숭이의 일종인 수티 망가베이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원숭이면역 결핍바이러스(SIV)에 감염돼도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가까운 친척인 레서스원숭이가 SIV에 감염됐을 때, 또는 인간이 HIV에 감염됐을 때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앓는 것과 대조적이다.

수티 망가베이는 왜 에이즈로 고생하지 않는 걸까. 맨들 교수는 수티 망가베이에서 레서스원숭이(또는 인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발견했다. SIV에 감염돼도 인터페론자극유전자군(ISGs)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ISGs는 인터페론의 자극을 받아 T세포를 증식시키고 활성화시켜 면역을 강화하는 유전자들이다.

면역계가 바이러스와 전투에 나서지 않았으니 꼼짝없이 앉아서 당하겠다 싶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오히려 수티 망가베이가 멀쩡하고 레서스원숭이(또는 인간)가 에이즈로 고통 받는다. 이유는 이렇다. SIV나 HIV에 감염된 개체에서는 목표를 벗어난 엉뚱한 T세포들이 활성화되면서 면역시스템을 붕괴시킨다. 수티 망가베이는 T세포 활성화를 원천봉쇄해 에이즈 발병을 막은 것이다.

비슷한 면역억제반응이 아프리카녹색원숭이에서도 나타난다. SIV에 감염된 아프리카녹색원숭이에서는 항염증유전자가 발현돼 면역세포들이 모이는 걸 억제한다. 덕분에 수티 망가베이처럼 아프리카녹색원숭이도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숙주가 병원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피해 스스로를 지키는 현상이 관용(Tolerance)이다.

미국 솔크생물학연구소의 자넬레 에리스 교수와 스탠퍼드대의 데이비드 슈나이더 교수는 식물 생태학에서 쓰이던 저항과 관용이란 개념을 동물의 감염병에 처음 적용했다. 이들이 2008년 ‘네이처 리뷰 이뮤놀로지’에 발표한 논문➋(goo.gl/BGgbNp)를 보면, 미생물이 증식할 때동물숙주가 받는 건강영향을 통해 관용의 크기를 알수 있다. 바이러스가 많이 증식해도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관용이 높다고 보는 식이다.

왜 미생물을 살려둘까?
몸 안에 들어온 미생물을 왜 활개치도록 내버려 둘까. 그게 오히려 나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본 SIV의 사례처럼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이 우리 면역계에는 종종 있다. 사스, 인플루엔자 A, 에볼라등에 감염됐을 때 인간의 면역계는 다량의 염증성 사이토카인과 케모카인 등을 내보내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터트리거나 자살시킨다. 심하면 호흡기장애나 출혈열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물론 미생물을 죽이지 않고 놔뒀을 때는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원생생물 등이 몸에 기생하면서 영양분을 가져가는 걸 감내해야한다. 정용석 경희대 생물학과 교수는 “숙주는 죽지않는 대신 건강 비용을 지불한다”며 “관용은 숙주와미생물 간의 일종의 협상”이라고 표현했다.

관용은 미생물을 가만히 놔두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에리스와 슈나이더 교수는 2012년 ‘에뉴얼 리뷰 오브 이뮤놀로지’에 발표한 논문➌(goo.gl/7MrU5O)에서 관용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무시와 침묵이다. 면역계가 장내 미생물을 공격하지 않는 사례, 뇌․눈․생식세포에서 염증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례가 여기 포함된다. 둘째는 병원균이 내뿜는 독성이나 숙주의 면역물질이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게 하거나, 손상되더라도빠르게 복구하는 현상이다.

도움이 되는 미생물을 배양하는 것도 관용에 해당한다. 여성의 질은 강한 산성(pH 3.5~4.5)으로 유지된다. 인체는 산성 물질을 내뿜는 젖산균을 관용함으로써 성병을 일으키는 다른 미생물에 적극 저항한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재분배가 있다. 면역반응은 에너지 소모가 많다. 여기에 들어갈 에너지를 다른 곳에 투자하면 생존력을 더 높일 수 있다. 슈나이더 교수와 공동연구를 한 송경한 미국 스탠퍼드대 미생물면역학과 박사는 “숙주의 건강은 저항과 관용이라는 두메커니즘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난 결과”라고 말했다.

에리스와 슈나이더 교수는 관용을 잘 이해하면 새로운 약을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말라리아원충은 자기복제를 위해 글라이코실포스페티딜이노시톨(GPI)을 내뿜어 숙주의 적혈구를 용해시킨다. 만약 GPI를 억제하는 백신을 만들면 말라리아로 인해 생기는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말라리아원충을 직접 공격하진 않으므로 말라리아를 근절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말라리아원충으로 하여금 면역을 피하기 위한 변이를 덜 일으키게 하고, 백신을오래 사용할 수 있다.


 
미생물을 보는 시각을 바꾸다

정용석 경희대 생물학과 교수는 몇 해 전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연구하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뇌염 바이러스는 보통 숙주세포에 짧게 머물면서 유전자를 복제한 뒤, 세포를 터뜨리면서 퍼져 나갑니다. 게릴라처럼요. 그런데 드물게, 바이러스가 세포에 오래 머무는 쪽으로 유전자 발현을 바꿀 때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 숙주세포도 물질대사와 관련된 유전자 발현을 바꾼다는 점이죠. 전 이걸 ‘세포와 바이러스의 협상’이라고 부릅니다.”

숙주세포와 바이러스는 유전자 발현을 바꾸거나, 변이된 유전자를 선택해 마치 휴전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뇌염 바이러스는 증식속도를 늦추는 대신 숙주의 몸속에 장기간 증식할 수 있고, 숙주는 최소한의 바이러스를 허용하는 대신 세포의 손상을 줄일 수 있다.

“관용 또는 협상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구제역이나 메르스 같은 급성 바이러스성 전염병을 볼 때 흔히 이분법으로 생각합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고통 받는 상태나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있습니다. 숙주와 바이러스가 어떻게 관계 맺는지 우리는 아직 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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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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