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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중이온가속기, 펨토 사이언스의 문을 연다


5월 초. 기자는 부산에서 열린 국제가속기콘퍼런스(IPAC 2016) 현장을 찾았다. 각국의 가속기 개발 및 운용 현황을 전하는 IPAC은 전세계 과학자 1300여 명이 모이는 대규모 국제 행사다. 행사장에서 만난 정순찬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은 “학회에 참가한 과학자들이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에 큰 관심을 보였다”며 “일부 학자들은 세부 진행 내용에 대해 단장인 나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정 단장은 학회 마지막 날 참가자 전원을 대상으로 라온의 개발 현황을 설명했다.

학회에서 만난 미국 토머스제퍼슨 국립가속기연구소 유홍 장 수석연구원은 “한국에서 중이온가속기를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가속기 건설이 한국 과학을 국제화하는 도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한국은 다국적 연구자가 적은 편인데, 새로운 아이디어나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며 “가속기가 완성되면 세계 곳곳의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펨토 세계 문 여는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나노 과학’은 이제 상품 광고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대중에 익숙한 용어가 됐다. 하지만 펨토라는 단어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다. 펨토미터(fm)는 10억 분의 1m를 뜻하는 나노미터(nm)의 100만 분의 1밖에 안 되는 짧은 길이다. 나노미터와 펨토미터의 차이는 10km 길이의 도로 위에 길이가 약 1cm인 땅콩 한 알이 떨어져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나노 과학이 길이가 나노미터 단위인 분자의 세계를 다룬다면, 펨토 과학은 원자의 중심부에 있는 펨토미터 단위의 원자핵과 그것을 구성하는 양성자, 중성자의 세계를 탐구한다. 다양한 원자핵을 만든 뒤 환경에 따라 이들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정 단장은 “인간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이루는 원자핵에서 시작해 원자가 모인 분자, 분자가 모인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며 “나노 과학으로는 기껏해야 분자보다 큰 세계만 연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펨토 과학의 의의에 대해 “펨토의 세계까지 다룰 수 있게 되면 물질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LHC는 원자핵보다 더 작은 입자의 세계를 다루는 기초연구에 특화된 장비다. 반면 중이온가속기는 원자핵에 대한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를 모두 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다. 많은 과학자들이 중이온가속기에 주목하는 이유다.

올해 초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 연구팀의 새로운 원소(원자번호 113번) 발견은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한 대표적인 기초연구 성과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모리타 고스케 연구원(규슈대 교수)팀은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해 113번 원소를 발견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에서부터 신소재와 신약 개발, 암 치료, 핵폐기물 처리, 농작물 육종 등 실질적인 활용처가 매우 다양하다(다음페이지 참고).



깨고, 부수고, 새로 만드는 원자핵 놀이터

중이온가속기는 펨토미터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현미경’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원자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성장치다. 대전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만난 권영관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연구위원(RI 실험장치팀장)은 “이론적으로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동위원소(핵종)의 종류는 약 1만 개인데(현재까지 자연계와 실험실에서 발견된 것 포함), 라온은 그 중 80% 이상을 만들 수 있다”며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중이온가속기가 새로운 원자핵을 만들고, 원자핵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 볼 수 있게 해 주는 원리는 ‘가속’과 ‘충돌’, ‘분열’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무거운(重) 원자를 이온 상태로 만든 뒤, 전자기력을 이용해 광속의 50%에 가깝게 가속시킨다(우라늄-238 기준). 이때 원자핵이 받는 전자기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전자를 많이 떼어내 이온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라늄의 경우, 한두 개 떼어낸 +1이나 +2 정도가 아니라 +33, +34로 이온화시킨다.

이렇게 이온화된 원자는 전자기장 속에서 빠르게 날아가 표적이 되는 원자핵과 충돌한다. 원자의 종류는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수에 따라 구분되는데, 이 충돌로 원자핵이 분열하면서 여러 종류의 새로운 원자핵이 만들어진다. 충돌하는 원자핵의 조합에 따라 생성되는 원자핵도 다양해진다. 여기서 새로운 원소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핵 내부의 구조를 볼 기회도 생긴다.

미래창조과학부 주도로 구축 중인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은 ‘온라인동위원소분리장치(ISOL)’와 ‘비행파쇄동위원소분리장치(IF)’를 동시에 이용해 희귀한 원자핵을 만들어 충돌시킬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기존 중이온가속기들은 자연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원자핵을 가속·충돌시키거나, ISOL 또는 IF 중 한 가지 방식만을 이용해서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었다. 반면 라온은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활용해서 수명이 아주 짧은 희귀한 원자핵을 인위적으로 만든 뒤, 이들을 가속해 충돌시킨다. 그 결과 이전보다 다양하고 희귀한 원자핵을 만들 수 있다. 권 연구위원은 “ISOL과 IF를 동시에 적용한 방식은 라온이 세계 최초”라고 말했다.


‘빅뱅 후 3분’에서 차세대 암 치료법 개발까지 중이온가속기는 활용할 분야가 많다. 생물학자, 재료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등이 가속기에서 나온 원자핵을 이용해 원하는 펨토 연구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온에 설치될 ‘되튐분광장치(KOBRA)’라는 연구 시설은 빅뱅 후 3분 뒤부터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한다. 학계에서는 빅뱅 뒤 3분 이내에 물질을 이루는 재료인 양성자와 중성자가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3분 이후부터 이들이 뭉치는 ‘핵융합’ 과정이 일어나면서 헬륨(He)과 리튬(Li) 등의 더 무거운 원자핵이 생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천체핵합성과정’이라고 부르는 이 과정은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탄생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중 특히 철(Fe)보다 무거운 원소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수수께끼다. 학자들은 무거운 원소들의 합성이 초신성이나 감마선 폭발처럼 폭발적인 천체환경에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하면 이런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핵반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직접 살펴 볼 수 있다.

중성자별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연구시설도 만들어진다. 중성자별은 중성자들이 높은 밀도로 뭉쳐 있는 무거운 별이다. 즉, 핵을 구성하는 중성자와 양성자의 조성비 차이가 매우 큰 극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라온에서는 이런 환경에서 핵물질의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중이온충돌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대수용다목적핵분광장치(LAMPS)’라고 부르는 이 시설에서는 두 개의 무거운 중이온을 충돌시킨 뒤 지름이 2m에 이르는 원통형 검출기를 이용해서 충돌로부터 나오는 입자들의 물리량을 측정한다. 이를 이용하면 중성자별과 같은 극한 환경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김상철 한국천문연구원 광학천문본부 선임연구원은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하면 우주에서 온 천체의 정보와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를 비교하고 검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소재와 반도체 개발 등에도 응용할 수 있다. 동위원소를 기존의 물질에 주입해 새로운 특성을 갖는 물질을 만들 수 있다. 반도체의 경우, 현재 삼성전자에서는 해외 가속기 시설을 사용해 방사선에 대한 반도체의 안정성 평가를 실시하고 있는데, 라온이 생기면 국내에서 평가를 할 수 있다.

암을 치료할 차세대 방사선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한 기초연구도 중이온가속기의 중요한 활용처다. 현재 부산 기장에 중이온가속기와 유사한 중입자가속기가 건설 중인데, 이 장치는 이미 임상에서 환자 치료에 쓰이는 탄소 동위원소를 생성한다. 탄소 동위원소가 표적이 되는 암세포와 충돌해 암세포를 파괴하는 방식이다. 반면 중이온가속기는 새로운 원소들을 방사선 치료에 적용해 탄소 동위원소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지 여부를 연구할 예정이다. 예컨대 헬륨(He)과 붕소(B), 산소(O), 실리콘(Si) 등의 동위원소를 만들어 이들이 목표 위치에서 암세포를 파괴하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세포 혹은 동물실험으로 확인해 보는 식이다. 정원균 한국원자력의학원 중입자임상연구부장은 “새로운 입자를 이용한 방사선 치료를 환자들에게 적용하려면, 효과와 유해성에 대한 세포실험 및 동물실험 자료가 필요하다”며 “독일에서는 현재 헬륨을 이용한 방사선 치료를 실제 환자에게 적용하기 위한 전임상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INTERVIEW 

“중이온가속기는 한국 기초과학의 새로운 출발점”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부산 국제가속기콘퍼런스(IPAC 2016) 현장에서 중이온가속기 건설을 총괄하는 정순찬 단장을 만났다. 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KEK)에서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정 단장은 “가속기가 완성되면 국내 과학자들이 중요한 기초과학 연구를 주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Q : 현재 가속기 구축 상황은 어떤가.

A : 가속기에 들어가는 장치의 시제품(프로토타입)의 성능 실험을 올해 모두 완료할 계획이다. 또 올해 말까지 전체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시설을 구축한다. 직선형 가속관을 만드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일인데, 올해 연구 결과가 무척 중요할 것 같다.

Q : 완성되면 어떤 연구를 가장 먼저 할 예정인가.

A : 새로운 원소를 찾는 연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의 기원과 합성 과정에 핵심이 되는 핵반응을 확인하는 연구를 할 것이다. 신성(nova)이 폭발하면서 가속된 입자들이 충돌해 무거운 원소가 탄생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Q : 가속기로 다룰 펨토 과학이 무엇인가.

A : 빅뱅 후 3분 뒤부터 일어나는 일들을 탐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대의 연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펨토미터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와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파악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산업계에 필요한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그건 나노 과학만으로는 불가능하다.

Q : 응용연구에서 가장 기대되는 분야는 무엇인가.

A : 재료과학 분야다. 중이온가속기가 만든 희귀 동위원소는 안정한 원자핵으로 변하면서 방사선을 방출한다. 희귀 동위원소를 특정 물질에 주입한 뒤 동위원소가 붕괴하면서 나오는 방사선 방출 패턴을 조사하면 그 물질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또 탄소 하나와 산소 두 개가 결합한 이산화탄소(CO2)가 아닌 탄소 하나에 산소 4개가 결합한 CO4 등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화합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물질들이 만들어진 뒤 어떻게 변하는지 불과 1초 안에 일어나는 과정까지 모니터링 할 수 있다. 연구자가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무궁무진한 응용연구를 할 수 있다.

Q : 가속기는 한국 과학계에 어떤 의미인가.

A : 세계적인 기초과학 연구 성과들은 주로 외국 연구진이 주도해 왔다. 국내 연구자가 참여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아이디어가 있어도 시설이 없기 때문에 해외에 요청을 해야 연구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일본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처음부터 국내 연구자가 연구를 주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초과학 연구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한국이 첨단 연구의 중심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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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대전, 부산=최영준 기자
  • 사진

    남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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