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형은 길이,부피,질량을 나타내는 표준을 뜻한다. 전통시대 우리의 표준은 대나무 대롱에 담긴 기장 1천2백알이었다.그런데 전통과학의 표준은 단위의 표준일 뿐만 아니라 음악의 표준이기도 했다.기장과 대나무가 나타내는 우주의 음악.우리 조상들은 왜 그것이 가장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했을까.
(사례1)
어느 고등학교 국악 합주반에서 연습이 한창이다.곡조는 점점 흥겨움을 더해가지만 선생님은 어디선가 거슬리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그만!○○이 기분음을 불어봐요" "황~임~~."그러자 선생님은 말한다. "음이 틀려요. 악기를 만들 때부터 기준음이 약간 낮게 맞춰졌어요"
(사례2)
지리산 골짜기에 사는 김씨는 가을에 준비해두었던 약재를 한 짐 싸들고 약재시장에 나왔다.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집에서는 정확히 무게를 달아 한근씩 포장한 도라지가 약재상에서는 죄다 근수가 모자라는 것이다. "표준저울을 안 쓰고 옛날 저울을 쓰니까 이런 일이 생기잖아요?"
오늘날 서양 음악의 기준주파수는 440Hz(A음)로 약속돼 있다. 원래 서양 음악에서는 C음이 기준이지만,국제 표준을 정할 때 A음의 주파수를 기준으로 정했다.악기를 만들 때는 이 주파수를 기준으로 비례에 맞게 다른음들을 조율해준다.만일 어떤 악기 제조자가 기준음을 잘못 맞추었다면 이에 따라 모든 음이 달라지게 돼 관현악 합주를 할 수 없게 된다.국악기도 마찬가지다.기준으로 하는 음인 황종이 정확하지 않으면 이에 따라 다른 음들이 모두 틀려 관현악 합주를 할 수 없다.(사례1)이 바로 이런 경우다.
한편 질량의 표준은 1889년 제 1회 국제도량형 총회에서 정해졌다.가로,세로,높이 각10cm인 공간에 물을 채운 후,이 질량을 백금 분동으로 만들어 1kg의 기준으로 삼았다.이것이 유명한 '킬로그래 원기' 이다.이 백금 분동은 지름39mm,높이39mm이다.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저울은 킬로그램원기에 맞춘 다양한 질량의 추를 이용해 잰다.그런데 사용하는 저울추에 오차가 생기면 다른 저울과 맞지 않아 (사례2)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질량은 길이에서 출발
음악의 기준음과 질량의 표준.알다시피 이들은 모두가 약속으로 정한 값일 뿐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하지만 우리 전통과학에서 이들은 똑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그리고 거기에는 전통의 독특한 자연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에서 질량의 표준을 정하는 방식을 다시 보자.물을 담는 표준 용기의 가로,세로,높이는 10cm라고 했다.단위로'cm'가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결국 질량의 표준은 길이의 표준에 기원을 두는 셈이다.현재 쓰는 길이의 표준은 수많은 논란을 거친 끝에 1983년 국제 도량형 총회에서 정해졌다.빛이 2억9천9백79만원2천4백58분의 1초 동안 이동한 거리를 1m로 하기로 약정한 것이다.1m를 1백등분 한 것이 1cm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전통과학에서도 질량의 표준은 길이에 기원을 두고 있다.중국에서부터 전해지는 방법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서 잘 볼 수 있다.곡식으로 재배하는 기장을 수확해 평균적인 크기의 낱알을 취한다.원주의 길이가 9분(分)인 대나무관을 준비한다(엄밀하게는 분 단위가 먼저 정해져야 하지만 관습적인 값을 따른다).이 관 속에 기장 알을 채운다. 1천2백알을 채우고 나머지를 잘라 버리면,그 대나무 관의 길이가 9촌이다.이 관을 음의 기본인 황종율관으로 삼는다.그리고 황종율관의 9분의1을 원래의 길이에 더한 것을 황종척 1척(尺)으로 삼는다.
기장,대나무,황종율관
이렇게 황종율관과 황종척으로 길이의 기준이 정해지면 이어서 부피와 질량의 기준을 정할 수 있다.황종척을 10등분 한 간격을 1촌(寸)으로,1촌을 10등분한 간격을 1분(分)으로,1분을 다시 10등분한 것을 1리(釐)라고 한다.위로는 10분을 1촌(寸),10촌을 1척(尺),10척을 1장(丈)으로 하면 길이를 재는 단위를 만들 수 있다.
부피는 황종율관에 들어가는 기장 1천2백 알을 기준으로 한다.이에 해당하는 기장의 부피를 1약이라 하고,2약을 1홉(合)으로 정한다.10홉을 1되(升),10되를 1말(斗),10말을 1섬(斛)으로 삼는다(박흥수 교수의 이론을 따름).
마지막으로 질량은 황종율관에 물을 채워 물의 질량을 기준으로 한다.황종율관에 채운 물의 질량을 88분해 한 간격이 1분(分)이다.1분을 10등분 하면 1리(釐)이다.위로는 10리를 1분,10분을 1전(錢),10전을 1량(兩),16량이 1근(斤)이 된다.
한편 여기서 모든 도량형의 표준을 정하기 전에 기장 1천2백 알을 담는 표준 중의 표준이 바로 전통 음악의 기준음인 황종을 내는 율관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현대 서양에서는 아무 상관 없는 기본음과 물리량의 표준을 왜 똑같이 음의 기본을 뜻하는 황종율관에서 시작해야 했을까.악학궤범의 서두에 이런 말이 있다.
"대나무로 율관을 만드는 이유는 율관이 천연의 그릇인 때문이고,기장으로 율관을 채우는 것은 기장이 천연의 물건이기 때문이다.천연의 물건을 천연의 그릇에 채우면 율관의 길이와 용량,성음의 고저,율관의 무게가 모두 자연에서 생긴 것이고 사람이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전통과학의 자연관을 잘 볼 수 있는 설명이다.모든 제도는 자연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야 우주의 질서를 가장 잘 반영하고,그 우주의 질서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라야 길이,부피,질량은 물론 소리의 고저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기장 알이 작으면 음 높아져
하지만 자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표준은 달라지기 마련이다.늘 원래의 표준에 맞추어 도량형을 잴 수 없고,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척도에 오차가 생기는 것이다.결국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표준과 달라졌고 우리 식의 표준을 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세종 때 박연은 아악을 정리한 음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그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우리나라의 기본음이 중국의 기본음과 다르다는 사실이었다.기본음이 달라졌다는 것은 중국의 표준과 우리나라의 표준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연은 세종 7년에 해주산 검은 기장 1백알을 나란히 쌓아 그 길이를 황종척 1척으로 삼았다.즉 기장 한 알의 길이를 1분으로 하고 10알의 길이를 1촌으로 삼은 것이다.전통에 따라 황종율관은 황종척의 10분의9인 9촌으로 정해졌다.그러나 황종척을 정할 때 기장이 완전히 둥글지 않기 때문에 세로로 세울 때의 길이와 가로로 세울 때의 길이가 달라진다.
박연은 더욱 면밀한 조사로 중국에서 전래된 악기의 황종 높이와 정확히 일치할 수 있는 길이의 황종율관을 만들기 위해 기준이 되는 기장 알의 크기를 찾았다.우리나라 경기지방에서 나는 기장 알은 작아서 이를 기준으로 하면 음이 높아졌다.그런데 삼남지방에서 나는 기장중 중간 것이 정확히 일치했다.박연은 이 크기에 해당되는 납 기장알을 만들어 오차를 없애고 황종율관을 만들어 불었더니 중국의 음과 완전히 일치했다.
기준음인 황종율관이 만들어지고 나면 각 음 사이의 진동수 비율에 따라 다른 음들을 만들 수 있다.하지만 진동수를 기계적으로 측정할 수 없었던 전통시대에 진동수 비례에 따라 정확히 일치하는 음 간격을 어떻게 만들수 있었을까.우리 조상들이 진동수를 모르고도 순전히 귀에 들리는 음감만으로 만들어낸 진동수 비례법칙이 바로 '삼분손익법' 이다.
황종에서 나오는 12음
전통음악에서 한 옥타브 안에서 구별되는 음은 12개이다.12개의 음은 황종(C),대려(C#'),태주(D),협종(D#'),고선(E),중려(F'),유빈(F#),임종(G),이측(G#),남려(A),무역(B),응종(B#)이다.하지만 실제 악곡에서는 이 12음 중에서 황종-태주-중려-임종-남려 혹은 황종-태주-중려-임종-무역 등 5개만 취해서 쓰므로 5음계로 구성된다(궁중제례약에서는 7음계를 씀).
삼분손익법에서는 황종율관의 음,즉 황종을 기준음으로 삼는다.그런 다음 황종율관의 길이를 3등분 해서 이 중1/3을 손(損,잘라 냄)하면 임종의 율관이 된다.다시 임종율관의 길이를 3분해서 이것의1/3을 익(益,덧붙임)하면 태주율관이 된다.연속적으로 1/3을 더하고,1/3을 빼면서 남려,고선,응종,유빈,대려,이측,협종,무역,중려까지 12음을 얻게 된다.
관악기로 보면 율관의 길이는 관의 길이에 해당하고 현악기로 보면 기본파장의 길이로 볼 수 있다.그러므로 기준음관을 1/3씩 줄이고 늘이는 데에 따라 음이 높아지고 낮아지면서 새로운 음이 생성되는 것이다.서양의 7음계가 C음을 기준으로 진동수의 비율에 따라 생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다.다만 한 옥타브의 길이를 7개의 음으로 나눌 것인가 12개의 음으로 나눌 것인가에서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12음들 사이의 진동수 비능 1:1.067 혹은 1:1.053으로 일정하다.음차이를 나타내는 센트(cent)단위를 쓰면 서양의 음계는 온음 차이 200센트,반음 차이 100센트의 간격으로 배열돼 있다.이에 비해 전통음악에서는 90센트와 114센트 간격으로 배열된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12개의 음 중에서 조에 따라 5개의 음을 선택하면 모두 60가지의 조의 음악을 만들 수 있다.모든 음들이 진동수의 비율에 따라 서로 연관돼 있기 때문에 기준음인 황종이 변하면 이에 따라 소리가 다 변해야 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물리량의 표준을 바꾸면서 음악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불합리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전통시대 사람들은 우주 자연이 모두 서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제도는 자연의 질서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어야 했다.가장 좋은 표준과 가장 좋은 음악,그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똑같은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