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외치며 손을 들면 그 뒤로 다른 사람들이 차례차례 줄을 선다. 마찬가지로 온도를 재려면 기준이 있어야 했다. 특정 온도 몇 개로 기준을 정한 뒤 그 사이를 잘게 쪼개 눈금을 만들면 훌륭한 온도계가 된다. 온도 측정의 역사는 더 정확하고 편리한 기준을 만드느냐의 역사였다.
서양에서 가장 먼저 나온 정밀한 온도체계는 화씨온도(℉)다. 1724년 네덜란드의 유리세공업자 화렌하이트는 두 개의 온도 기준을 잡았다. 1기압에서 물이 어는점을 32 ℉, 끓는점을 212 ℉로 정하고 두 점 사이를 180개의 눈금으로 나눴다.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정교해졌지만,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스웨덴의 물리학자 셀시우스가 지금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섭씨온도를 만든다. 1기압에서 물의 어는점을 0 ℃, 끓는점을 100 ℃로 정하고 두 기준사이를 100등분했다. 미국과 몇 개의 작은 나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섭씨온도를 쓴다.
하지만 온도에 대한 국제 표준 단위는 섭씨(℃)가 아니라 절대온도로 불리는 켈빈(K)이다. 절대온도가 나온 배경을 알아보자.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0 ℃ 이하가 중요해졌다. 가장 낮은 온도는 어디일까. 과학자들은 모든 원자가 진동하지 않는 영하 273.15 ℃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곳을 절대 영도, 즉 0 K로 새로운 기준을 잡았다. 물의 어는점은 자연스럽게 273.15 K가 됐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동안 취재했던 다른 단위에 비해 온도는 참 쉽고 직관적이다. kg처럼 변하는 원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기준을 바꾸려는 걸까.
“우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도를 물이라는 자연물의 성질을 이용해 정의한다는 점에 만족하지 못하는 거죠. 물이 동위원소 비율에 따라 미묘하게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도 문제고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온도센터의 양인석 책임연구원은 온도의 기준을 바꾸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다른 단위를 취재하면서 ‘우아하게 바꾸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핵심은 기준이다. 우주가 두 동강이 나도 변하지 않는 기준으로 단위를 정할수 없을까.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역시 ‘상수’가 으뜸이다. 볼츠만 상수(k)가 온도의 파트너가 됐다. 마찬가지로 질량은 플랑크 상수(h), 전류는 전자 하나의 전하량, 몰은 아보가드로 상수가 새 파트너가 된다. 정교한 실험으로 상수를 정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단위의 기준이 바뀌지 않는다.
온도, 단위의 제국에 편입되다
양 연구원은 “볼츠만 상수는 열에너지에 대한 상수”라며 “0 ℃와 100 ℃의 열에너지를 각각 그래프로 표시하고 직선을 그으면 그 기울기가 바로 볼츠만 상수”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볼츠만 상수를 재는 위치는 0 ℃가 아니라 0.01 ℃다. 이곳은 물의 삼중점으로 불리는데 물과 얼음, 수증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온도다. 0 ℃보다 훨씬 안정적이어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기준이다. 먼저 0.01 ℃에서 볼츠만 상수를 측정한 뒤 이를 온도의 새 기준으로 못박아 버린 것이다. 한 번 정해진 상수값은 달라지지 않는다.
“새 온도 기준이 나와도 물은 여전히 0 ℃에서 얼고 100 ℃에서 끓습니다.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새 기준을 정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하 200 ℃보다 더 차갑거나 영상 800 ℃보다 더 뜨거운 온도를 잴 때는 좀더 정밀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극저온 실험이나 초전도체를 이용하는 실험, 양자컴퓨터와 핵융합연구, 금속 합성 실험 등이 좋은 사례죠.”
지금 기술로 볼츠만 상수를 가장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온도계가 음향기체온도계다. 온도가 달라지면 소리의 속도, 즉 음속이 달라지는데 이 성질을 이용해 온도를 잴 수 있다. 현재까지 나온 볼츠만 상수의 값은 1.3806AA × 10-23 J/K다. AA라는 두 개의 숫자를 2018년까지 정해야 한다. 양 연구원은 “2년 전연구를 주도하고 있던 프랑스와 영국팀이 각각 측정한 값이 100만분의 3 크기로 서로 달라 문제가 됐다”며 “우리 연구팀이 영국팀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 바로잡았다”며 기술력을 뽐냈다.
“그동안 온도는 다른 단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과 같았어요. 기준이 다른 단위와 관계가 없었거든요. 이번에 볼츠만 상수를 기준으로 삼게 되면서 질량이나 시간 등 다른 단위와 연결되는 지점이 생겼어요. 마침내 온도도 단위의 제국에 들어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