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장이들의 신이자 화산의 신인 헤파이스토스는 여러 신 중에서 가장 손재주가 좋은 신이다. 자신의 의족에서부터 다리 셋 달린 식탁로봇, 생각처럼 빠른 돛배, 심지어 최초의 여성 판도라까지. 만능재주꾼 헤파이스토스를 만나보자.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는 말을 아세요? 생긴 그릇(뚝배기)은 보잘 것 없는데 그 내용물인 된장의 맛(장맛)은 기가 막힌다, 이런 뜻이랍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바로 그런 신입니다. 생긴 것은 정말 보잘 것 없었나 봐요. 하지만 오늘날의 공업은 헤파이스토스의 상상력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공업의 여신 아테나와 관계는?
자, 헤파이스토스라는 신이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신화를 쓰는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상상력으로 헤파이스토스라는 신을 빚어낸 것일까요. 아무래도 헤파이스토스라는 신은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 같지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는 이 신의 신전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해마다 제사를 버젓하게 얻어 잡수시던 신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 신을 섬겼을까요? 대장장이들, 질그릇 굽는 사람들, 청동이나 쇠붙이 다루는 사람들이었을 테지요. 헤파이스토스의 시대, 그것은 곧 공업의 시대입니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엘레우시스’라고 불리던 고대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 엘레우시스는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데메테르’(Demeter)는 ‘땅’(de)의 ‘어머니’(meter)라는 뜻입니다. ‘메테르’라는 말이 오늘날의 영어 ‘마더’(mother)와 너무나 비슷한 게 신기하지요? 영어의 상당수는 고대 그리스 어에서 왔으니 신기할 것도 없지요. ‘땅의 어머니’, 그러니까 데메테르는 농업과 곡식의 여신입니다. 사람들이 땅만 파먹고 살던 시절,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이 있던 도시 엘레우시스는 신전에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사람들의 관심은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쏠립니다. 엘레우시스에서 아크로폴리스에 이르는, 약 20km 정도 되는 길은 ‘히에로드로모스’, 즉 ‘거룩한 길’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불렸을까요.
기원전 5세기, 도시국가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아크로폴리스(우뚝 솟은 바위산)에다 아테나 여신의 신전을 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페리클레스가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전을 짓지 않고 공업의 여신이자 베짜기의 여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테나의 신전을 지은 것이 실로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파르테논 건설은 도시국가 아테네의 산업 형태가 농업에서 공업으로 가파른 중심 이동을 한 증거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길’은 고대 그리스 산업이 걸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아테나 여신은 전쟁중일 때는 전쟁 영웅들의 수호여신이자 평화주의자들의 수호여신, 평화 시에는 베짜는 사람들과 그릇 만드는 사람들의 수호 여신입니다. 그런데 아테나 여신의 신전 파르테논에서 아고라(옛날의 시장)를 내려다보면 꽤 웅장한 고대의 석조건물이 하나 서 있습니다. 바로 ‘헤파이스테이온’, 즉 ‘헤파이스토스 신전’입니다.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이, 아테나 여신전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아테나 여신은 ‘테크네’ 종사자들의 수호여신입니다. ‘테크네’(techne)라는 그리스 말은 예술과 기술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영어 ‘테크닉’(technic)과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여기에서 온 말입니다.
감쪽같이 만든 황금의족
헤파이스토스는 불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수호신입니다. 그는 대장장이들의 수호신이자 화산의 신이기도 하지요. 그의 로마식 이름 ‘불카누스’(Vulcanus)는 바로 ‘화산’(volcano)이라는 뜻입니다. 고대의 도시국가 아테네에는 ‘케라미코스’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케라미코스’(Keramikos)는 ‘질그릇 만들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을 쓰지 않고는 구울 수 없는 게 질그릇이지요. ‘질그릇’을 뜻하는 영어 ‘세라믹스’(ceramics)는 여기에서 온 말입니다.
제우스에게는 아내 헤라의 몸을 빌지 않고 낳은 딸이 있습니다. 바로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 무장한 채 튀어나왔다는 아테나 여신입니다. 아테나 여신은 아버지 제우스의 벼락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여신입니다.
남편인 제우스가 자신의 몸을 빌지 않고 아테나 여신을 낳았으니 헤라 여신으로서는 화가 났을 수밖에요. 그래서 헤라 역시 제우스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도 아들을 하나 낳지요. 이 아들이 바로 헤파이스토스입니다. 헤파이스토스는 비상한 손재주에 비해 생긴 것은 ‘별로’였던 모양입니다. 오죽했으면 어머니인 헤라 여신이 인간세상으로 내던져 버리기까지 했을까요. 못생긴 죄로 한차례 인간세상으로 버려진 경력이 있는 헤파이스토스는 의붓아버지 앞에서 말참견하다가 또 한차례 제우스의 발길에 차여 인간세상으로 떨어집니다. 이때 헤파이스토스는 다리가 부러지지요. 하지만 손재주 좋은 헤파이스토스는 황금으로 가짜 다리를 만들어 달았는데,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어떤 신도 그가 의족을 달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지요.
올림포스에서 가장 못생긴 신 헤파이스토스가 하늘과 땅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삼았다는 얘기는 지난번에 한 적이 있지요. 헤파이스토스의 손재주 덕분입니다.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황금 옥좌와 벼락, 태양신 헬리오스의 황금 태양마차,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활과 화살통, 헤라클레스의 갑옷 등, 신화시대의 보물이라는 보물은 모두 헤파이스토스의 작품입니다. 추남 헤파이스토스와 미녀 아프로디테의 결합은 ‘미녀와 야수’의 신화시대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다리 셋 달린 탁자는 ‘서비스로봇’
헤파이스토스는 오늘날의 ‘로봇’ 개념을 창시한 신이기도 합니다. 그의 걸작품 중의 하나가, 금 바퀴가 셋 달린 세다리 탁자입니다. ‘트리포도스’(Tripodos)라고 불렸다고 하지요. ‘다리가 셋인 탁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진찍을 때 쓰는 삼각대, 즉 트라이포드(Tripod)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가 만든 트리포도스 술상은 신들의 잔치자리를 혼자서 굴러다녔다고 합니다. 구동 에너지로 무엇을 썼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만든 신도 헤파이스토스입니다. 인류 최초의 여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거의 창조주의 기술 수준입니다. 하지만 아테나 여신이 영혼을 불어넣었고, 아프로디테 여신이 아름다움을, 헤르메스가 꾀를 불어넣었다고 하니 헤파이스토스가 단독으로 제작한 작품은 아닙니다.
헤파이스토스가 제작한 또 하나의 걸작품은 ‘파이아케스 인들의 돛배’입니다.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걸작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늘날의 기술로도 꿈꿀 수 없는 돛배입니다. 호메로스의 ‘허풍’에 따르면 이 배에는 키잡이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자동항법장치와 자동운항장치가 딸려있는 돛배입니다. 호메로스는 한술 더 떠서 이 돛배를 ‘생각보다 더 빠른 배’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그런 돛배가 어디에 있겠어요.
헤파이스토스의 최고 걸작품은 바로 완벽한 로봇입니다. 그의 대장간에는 그가 손수 금으로 만든 여자 조수가 둘 있었다고 하는데, 주인이 맡기는 일을 척척해낼 뿐만 아니라 말할 줄도 알고 알아듣기도 했다는군요. 기원전 8세기 사람인 헤시오도스의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들이 바로 ‘퀴베르네테스’(Cybernetes), 즉 ‘키잡이’(steersman)가 내장돼 있어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장치’라는 뜻입니다.
인공두뇌학을 아시지요? 1948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의 노오버트 위너 교수가 제창한 이론입니다. 생물 구조와 기계 구조의 공통 원리를 구명하는 학문입니다. 초기 인공두뇌학자들은 이 학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꽤 고심했을 테지요. 그러다 바로 이 ‘퀴베르네테스’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입니다. 그리스어로 ‘키잡이’라는 뜻이지요.
신전이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고대 그리스에 실제로 헤파이스토스라는 신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헤파이스토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기술에 대한 고대인들의 상상력 아니었을까요. 고대인들은 헤파이스토스에 이어 희대의 발명가 다이달로스를 발명해내는데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