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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는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행복」까지도 선사할까? 그것은 인간이 활용하기 나름이다. 다른 문명의 이기와 마찬가지로 컴퓨터에도 빛과 그늘 양면이 공존한다.

전자계산기라는 다소 둔중한 느낌의 단어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컴퓨터'를 '전자계산기'라고 애써 번역해서 부르지 않는다. 학과의 명칭이 '컴퓨터공학과'라고 해서 누가 시비를 걸 수 없을 만큼 컴퓨터는 우리 생활에서 토착화된 보통 명사가 되어버렸다.

중세에는 너댓자리 곱셈을 할 수 있는 능력이면 대단한 것으로 대접을 받았다. 중세 영국에서는 최첨단의 곱셈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까지 자식을 유학보내곤 했다. 이후 발달된 인쇄술로 인하여 문자문화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비밀스런 과학적 지식들은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첨단의 교양은 시대마다 달랐다. 중세에는 성직자 계급이 가진 라틴어 해독능력이나, 몇자리수의 곱셈이나 나눗셈을 시원스레 해보일 수 있는 능력이 최고 지성의 척도로 설정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 이전에는 한시 몇구절을 술술 외거나, 주위의 사건 하나하나마다 사서삼경을 참고문헌으로 활용하여 해설하는 능력이 교양인의 척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그것은 한차례 크게 변화한다. 마카오산 양복에 커피 한잔을 마시는 풍경이 근대 이후 그려진 문명인이 모습이었다.

현대 첨단 문명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은 지금의 세태에서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디스켓 몇통 정도는 들고다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는 도중에 '386DX 머신'이니 '한글 윈도우'니 '전자메일이 어떠하니' 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때면 우리는 약간 별종의 인간과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별종의 인간군(群)은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현재 각 나라의 문명화 정도를 측정하는 문맹률은 공립교육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이제는 차라리 컴퓨터 문맹률(컴퓨터를 다룰 수 없는 사람의 비율)로서 국민의 지식정도를 측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훈민정음이 통치의 효율을 위해 국가적 차원으로 보급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국가행정의 효율화를 위해 컴퓨터교육을 공적인 교육 기관을 통해 실시할 날이 멀지않은 것 같다.

액정화면 위로 시를 「친다」

정보사회(information society)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조금씩, 그리고 갈수록 그 속도를 빨리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은 어쩐지 새롭고 두렵기조차 하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다가올 정보사회를 그리는 모습이 다르다. 20세기초부터 시작된 전자기술의 발달은 곧바로 이어진 세계대전으로 가속화되어 현재의 컴퓨터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기술의 발달은 동서 냉전체제와 선진제국들이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무한경쟁에도 힘입은 바가 크다.

이제까지 '과학동아'를 통해 연재한 컴퓨터 역사를 살펴볼 때에도 기술의 발달에는 과학적 지식과 그 외적인 요소가 두가닥의 실과 같이 꼬여서 나감을 보았다. 어떤 요소가 더 선도적인가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다. 베비지의 미분기관에서 보여지듯이 과학적 원리의 발견이 곧바로 가시적인 결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 안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부분도 있고, 그 시대 대중들의 심성에 일정 정도 부합해야 하는 면도 있다.

우리나라 한글코드체계의 쟁점인 '완성형'과 '조합형' 문제와 같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정치적인 위세에 밀리는 예는 어느 나라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경로로 빨리 시정되는가에 있다.

보수화한 관료들이 항상 주장하는 그들의 표어가 있다. "그런 것 없을 때에도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 바꾸어 말하면 "컴퓨터없을 때도 잘 살았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이 공포에서 나오는 절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컴퓨터의 등장은 우리 일상 생활 뿐만 아니라, 그 상위에 있는 문화와 관습까지도 변화시키고 있다. 그 속도는 인류의 역사시대 가운데 가장 빠르다.

시인은 액정화면위로 시를 '친다', 그리고 주부는 가계부를 '켠뒤'에 이항목 저항목을 '두들긴다'. 또 기차표 판매창구에서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는 풍경은 10년내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대신 자동판매기를 주먹으로 두들기다 50볼트 전류의 짜릿한 응징에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전자화폐의 등장으로 탈세를 하거나 마누라 몰래 봉급을 빼돌려 술집에서 향략비로 즐기게 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월말이면 한달간 사용한 돈과, 그 돈의 행방으로 전철역 구간구간까지 낱낱이 찍혀 나오게 되는 우울한 시대가 올는지도 모른다.

정보흐름이 서서히 역류

앞으로 전개될 정보사회의 특징으로 몇가지가 있다. 컴퓨터와 결합한 통신기기의 발달로 뉴미디어의 시대가 열린다. 뉴미디어의 특징은 단순히 기존 아날로그 정보가 디지털로 바뀐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통될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E. M. 로저스는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번째는 통신의 상호성(intractivity)을 들 수 있다. 현재 대중매체는 신문이나 라디오 방송과 같이 한 방향으로만 정보가 흐른다. 그러나 앞으로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신 수신자가 능동적으로 정보의 이동에 관여하고 그 방법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된다.

요즘 TV에서도 인기가요 순위를 정하는 데에 전화를 이용한 텔레리서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수신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 전화선에 연결된 컴퓨터에 좋아하는 곡을 입력하고 입력되는 과정은 생생히 화면으로 보여진다. 앞으로 전화와 TV가 완벽히 결합되면 이러한 과정은 보다 쉬워지리라 보인다. 현재 연구되고 있는 쌍방향 유선TV와 화상응답시스템(video response system)은 이러한 좋은 예다.

둘째로는 통신의 비대중성(demassification)을 들 수 있다. 즉 정보는 개별화되어 전달되지만 그 효율성을 극대화시킨다. 이전의 미디어는 말 그대로 매스미디어였다. 거대한 대중의 평균치를 향해 뿌려지는 정보는 이제는 보다 차별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유선TV의 보급으로 지방에서는 무덤덤한 서울 소식보다는 알찬 자기 고장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야구 소식을 TV에서 보기 위해 TV앞에서 채널을 돌려가면서 막연히 기다릴 필요는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 다양해진 TV채널은 특정 시청자그룹을 겨냥해 스포츠라든지, 음악프로만 집중적으로 보낸다.

또한 미래에는 멀티미디어가 확립되어 프로야구 특정팀의 경기모습을 컴퓨터를 이용해서 불러내어 TV에서 보게 될 것이다. 한 경기의 모습이 데이터베이스의 한 항목이 될 것이다. 이제 정보의 선택권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로 이동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음성다중방송이나 비디오텍스는 비대중성을 실현시키는 좋은 예다. 앞으로 모든 TV외화가 음성다중으로 나온다면 질리게(?) 들어온 배한성씨의 더빙된 주인공 목소리에서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의 마지막 특성으로는 통신의 비동시성(asynchronicity)이다. 요즘 나오는 자동응답전화기나 팩시밀리가 기존 전화와 다른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수신자가 메시지를 받기 위해 전화기옆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즉 수신자와 송신자 사이의 시간적 일치가 필요없게 되었다. 자동응답전화기가 더 발달하면 걸려오는 사람마다 차별적으로 응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정보의 흐름이 서서히 역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정보의 가치는 어느 시대보다 커지고 있다. 정보의 가치가 가장 높았을 때는 바로 원시시대다. "이런 모습의 버섯을 먹으면 죽는다" "저 뒷산에는 덩치 큰 곰이 두마리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건너 강의 상류에는 물고기가 많다" 등등의 정보는 그 자체가 생존과 결부된 것이었다. 그 시대에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었으므로 인간들 사이의 정보유통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자본의 축적이 시작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성립함에 따라 정보는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게 되었다. 그것은 정보를 재화 그 자체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정보의 흐름을 방해하여 피지배계급의 세력화를 막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로 오면서 특허제도와 같이 지적 지식이 재화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알 권리」와 정보공개

과학기술은 정보가 그 어떤 재화보다도 값비싼 재화라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주지시켰다. 근대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을 통해 인간의 근력을 몇십배 확장시켰다. 이것의 의미는 인간 노동능력의 척도가 더 이상 근력의 강도에 있지않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힘센 근육질의 노동자를 많이 소유하는가로 자본의 정도가 측청되는 것이 아니라 기관이 몇마력짜리인가로 공장의 생산량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기계를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는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보사회에서 주된 거래물은 정보이고, 그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통신망이 시장으로 항상 열려 있다. 미래에는 정보를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계급이 나누어 진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정보사회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그 누구도 분명히 예측치 못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살기에 보다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원칙이 고수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 언론인 마에다 도시로 가 주장한 세가지 권리인 '알고 싶은 권리' '알리고 싶은 권리' '알리고 싶지않은 권리'가 조화롭게 각 개인에게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의미다.

먼저 '알 권리'와 '알릴 권리'는 우리 시대에서 가장 시급히 확보되어야 할 권리다. 일본에서 1968년에 발생한 미나마타병은 정보의 비공개가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대중들에게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일본 통산성은 '기업비밀의 보호'라는 미명하에 수은과 질소의 방출량을 1/7로 줄여서 보고했다. 그동안 탐욕스런 기업가와 관료적인 행정가 그리고 어용학자들의 3중주로 인하여 사망자 8백45명, 장기간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2천1백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정보공개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운동이 대중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히 불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정보의 차단에 오랫동안 잘 단련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알 권리 '를 법적으로 보장해주고 있다. 1966년에 공표된 정보자유법(FOIA, Freedom Of Information Act)이 있으며, 이는 1974년에 더욱 강력하게 개정되었다. 그리고 의회자료를 공개하는 선샤인템(Sunshine Act)이 1976년에 제정됐다. 이 덕택에 닉슨대통령은 워트게이트 앞에서 코가 깨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 사건은 신문(워싱턴포스트지)기자를 보호해 주는 미국의 여론과 법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유교사회라서 그런지 내부고발자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가혹하고 국민들의 정서도 일률적으로 그런 행위에 찬동하지 않기 때문에 알 권리는 크게 제한받고 있다.

대기업의 비업무용부동산에 관련된 정보를 외부에 알렸다고 해직된 이문옥 감사관의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한다. 우리는 1만원 짜리 화장품의 원가가 3백원 미만이라는 사실도 알 권리가 있다. 특히 의약품의 부작용과 피해에 대해 소비자라면 누구나 알아야한다.

1960년대 서독과 일본에서 일어난 탈리도마이드(임신중 복용하면 기형아가 태어나는 수면제)사건은 정보은닉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서독 소아과의사인 렌츠박사의 경고가 알려지지 않은채 탈리도마이드는 판매되었고 절반 정도의 피해자는 렌츠박사의 경고후에 증세가 나타났다.

정보공개제도는 북유럽의 모든 나라와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에 이어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도 1983년경에 제도화한다. 그중 스웨덴은 정보공개의 전통을 2백여년이나 가지고 있다. 스웨덴 국민은 진정한 의미의 외교와 군사정보를 제외한 모든 정부의 문서를 읽거나 복사할 수 있다.

한때 우리 정부가 금서목록을 만들어 친절히 공표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알 권리'를 크게 제한받았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설 컴퓨터통신망(BBS)의 확대로 알 권리는 크게 확대되고 있다. 코텔(Kortel)이나 PC서브(PC-serve) 등 통신망에 들어가보면 비록 정리는 되지않았지만 풍성한 정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누구든지 나이나 성별에 제한받지않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10대 학생이 40,50대 성인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의견을 무례하게(?) 펴기란 쉽지않다. 그러나 통신망에서는 충분히 익명성이 보장되므로 모두 평등해진다. 모두들 꼬박꼬박 존댓말로 통신망에서 알리고 편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익명성이 지나치다 보니 그것을 역이용해 상스런 욕지거리를 하는 악동들도 더러 눈에 띈다.

첨단기기를 이용한 「엿보기」

'알리지 않을 권리'도 정보사회에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다. 만일 이런 편지를 받았다고 해보자.

"귀하의 자녀인 김판철군의 입시 실패를 진심으로 애통해마지 않습니다. 본 재수 전문학원에서는 판철군이 합격하는 그날까지 모든 선생님들이 도와줄 것입니다."

뭔가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보다 더한 편지도 있을 수 있다. 이혼한 남녀에게 재혼을 권유하는 일이란 법원이나 동사무소의 파일을 조금만 뒤지면 쉽게 해낼 수 있다. 통신망에 들어가보면 이런 숙덕공론이 많이 널려있다.

정보시장에 우리가 참여하면 할수록 우리의 알리고 싶지않은 정보는 더 노출된다. 이제는 특별한 스타가 아닌 사람의 행태도 좋은 눈요기감이 된다. 첨단기기를 이용해 인간의 엿보기 취미를 만족시키는 사업이 번창하게 될 것이다. 충격적인 사진(시체나 음란한 모습)만 찍어파는 신문이 이미 아르헨티나와 일본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다.

평범한 사건의 주인공을 매스컴에서는 꾸며서 크게 보도한다. 얼마전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AIDS에 걸렸다는 여자 모델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요즘 인기 있는 '몰래 카메라'는 대중의 이러한 호기심을 최대한 충족시켜준다. 매스컴은 점점 사건의 본질보다 사생활로 파고 든다. 사회정의를 빙자해 아무 심야술집이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들어가 인터뷰를 강요하는 행위는 심야퇴폐영업만큼이나 불법이다.

모든 수신자가 정보의 송신자가 되는 정보사회에서는 정제되지 않는 정보의 유통도 큰 문제가 된다. 정보의 과중현상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오히려 전체 정보의 유통을 크게 방해하여 파국으로 몰고간다. 두개의 시계보다 한개의 시계가 더 유용하듯이, 무제한의 정보는 사실상 정보가 아니다. 인위적으로 자신의 정보만을 보호하기위해 쓰레기정보를 흘리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알리지 않을 권리'는 대중의 합의에 의해서만 확립되는 것이므로 정보에 대한 통제권(정보보호법)을 담당하는 자치기구에게로 권한이 넘어가야만 한다.

"왜 컴퓨터를 안 살 것인가"

비관적인 미래의 모습에만 빠져서 정보사회의 긍정적인 면까지 모두 부정해서는 않될 것이다.

컴퓨터와 정보기기를 모두 없애야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박한 자연주의자들이 있다. 한 생태주의모임에서 발행한 잡지인 '녹색평론' 최근호에는 "나는 왜 컴퓨터를 안 살 것인가'라는 수필이 있다.

웬델 베리라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문필가는 켄터키의 오두막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오직 펜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그가 컴퓨터를 사지않는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연장은 먼저 것보다 값이 싸야 한다. (2) 그전보다 크기가 작아야 한다. (3) 그전보다 현저히 나은 일을 해야 한다. (4) 그전보다 에너지를 적게 써야 한다. (5) 신체에너지같은 태양에너지를 써야 한다. (6) 보통사람이 고칠 수 있어야 한다. (7) 집 근처에서 고칠 수 있어야 한다. (8) 그것은 가족관계나 사회관계를 포함하여 이미 좋은 것을 대신하거나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주장에 한번쯤 귀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베리의 주장은 '나는 왜···" 이므로 "우리는 왜 컴퓨터를 사지 않아야 하는가" 라는 주장에 비해서 건전하고 애교있다. 그러나 베리의 글이 필자의 눈에 띄어 필자가 그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공감하기까지 컴퓨터가 필수적으로 사용됐음은 사뭇 모순이다.

대형 비행기사고가 있어도 덩치 큰 비행기를 증오하지는 않는다. 컴퓨터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서로 도와주는데 꼭 필요한 도구다. 그리고 나무막대가 인간의 팔을 대신해서 높은 곳의 열매를 따고, 증기기관이 인간의 다리를 대신하여 철로를 달리듯, 컴퓨터는 우리의 부족한 상상력을 확장하고 지적능력을 확대해주는 획기적인 기계다.

기계는 편리함을 주는 것이지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편리함에서 어떻게 행복을 추출할 것인지는 우리의 과제다. 모든 문제는 항상 인간의 문제로 귀납된다. 인간이 없으면 악은 없다. 또한 선도 없다.
 

나무막대가 인간의팔을 대신해 놓은 곳의 열매를 다고 증기가관의 다리를 대신해 철로를 다리듯이 컴퓨터는 우리의 부족한 상상력을 메꿔주고 지적 능력을 확대해 주는 기계다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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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조환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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