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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서 ‘실록’ 보존하는 과학

조곤조곤 풀어보는 문화재의 수수께끼 ➎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 얽힌 전통 과학은 그랬습니다. 실록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세계기록유산이자 대표 기록문화유산입니다. 조선시대의 역사서로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학문 등 전 분야에 대해 자세한 자료를 남기고 있는 보고입니다. 때문에 왕의 업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도, 옛 하늘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도, 기후를 연구하는 공학자도 다 실록을 읽고 있습니다. 실록은 임진왜란 등 숱한 전쟁을 거치면서도 2124권이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도 이겨낸 실록이 하나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세월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당연하지, 세월에 이기는 존재가 있나’하고 자못 철학적인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생물이 나이가 들듯, 모든 사물도 세월이 지나면 낡게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실록은 고급 한지로 만들어졌고, 한지는 ‘1000년을 간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말 빛도 바래지 않게 보존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조선시대 때 일부 실록에 한 추가 조치입니다. 벌레나습기 피해를 방지하고 보다 잘 보존할 목적으로 밀랍을 입힌 것입니다. 밀랍은 원래 벌의 배에서 나오는 노란 물질인데, 이걸 가공해서 투명한 광택제(왁스)를 만듭니다. 밀랍을 칠했다는 건, 요즘 말로 하면 ‘코팅’을 한 셈이지요. 당시로서는 최고의 보존 기술을 적용한 것입니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부 실록은 밀랍 때문에 오히려 보존 상태가 나빠졌습니다. 밀랍은 주성분이 지방인데, 지방은 오랜 시간 공기와 접촉하면 산화됩니다. 이 때문에 희던 종이가 검거나 노랗게, 때론 붉게 변했습니다. 밀랍이 녹았다가 딱딱하게 굳으며 종이를 파손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밀랍을 입힌 실록(밀랍본)을 제대로 보존할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밀랍을 이용해 종이 문화재를 보존한 사례는 드뭅니다. 한국에서는 책 중에서 달리 예를 찾기 힘들고,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극히 일부 사용한 정도입니다. 따라서 연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국내외 다른 연구팀과의 협력으로 체계적인 실험 결과가 쌓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 결과를 모아서 2013년 12월,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복원기술 연구’라는 보고서를 완성했습니다.



연구는 밀랍본이 얼마나 훼손됐는지, 훼손된 물리·화학·생물학적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문제의 ‘원흉’인 밀랍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없앨 기술이 있는 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방법이 동원됐습니다. 아주 적은 양의 성분까지 분석할 수 있는 화학 분석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종이와 밀랍의 산화가 얼마나 일어났는지 밝히고, 종이의 손상 정도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연구 결과 밀랍본은 전체적인 분자량이 원본의 20~23%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심한 것은 거의 10분의 1 수준인 11%였습니다(세종실록 일부). 종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죠. 밀랍을 쓰지 않은 종이가 50~60%수준인 걸 볼 때 밀랍본의 종이 조직 손상은 그만큼 심했습니다. 산화와 습기에 의한 분해(가수분해) 역시 심각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되는 밀랍을 종이에서 깔끔히 제거할 수 있을까요. 연구팀은 여러 가지 방법을 후보로 제시하고, 직접 실험을 통해 효율성과 안전성을 꼼꼼히 점검했습니다. 이 연구는 참 신기합니다. 화학의 묘미라고 할까요. 밀랍 역시 하나의 화학물이므로 종이에 피해가 가지 않게 감쪽같이 녹여버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열이나 압력을 이용해 밀랍을 녹여내는 방법인데, 효율이 높지 않고 종이에 손상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용매를 이용해 녹여내는 방법도 있지만, 다양한 용매로 실험해 본 결과 종이 위에 용매가 남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연구팀이 꼽은 최고의 방법은 이름도 어려운 초임계 유체 추출 방식입니다. 이산화탄소를 액체와 기체의 중간 상태(초임계유체)로 만든 뒤 여기에 밀랍을 녹이는 방식인데, 실험해보니 종이의 변색도 바로잡고 밀랍도 안전하게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은 실제 실록에 보존 기술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박종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학예연구관은 “밀랍본 중 상태가 아주 나쁜 것은 10권 내외로 소수”라면서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지는 않기 때문에 보다 신중을 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혜영 학예연구사도 “현재는 기술을 확보해서 관련 기관에 제공한 단계”라며 “실록을 소장한 곳에서 추가 연구를 통해 적용 여부를 타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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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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