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야동을 모아놓은 슈퍼컴퓨터’. KTX를 타고 지란지교소프트 대전본사로 향하는 길에 상상했던 장면이다. 지란지교소프트는 음란물 필터
링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엑스키퍼’를 개발한 업체다. 사전취재에서 음란물 필터링에 필요한 데이터베이스(DB)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지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DB라 하면 그동안 수집한 음란물들을 말하는 거겠지…, 혼자 추측하고 떨리는(?)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다.
엑스키퍼 | 청소년들의 PC·스마트폰 사용을 관리해주는 프로그램. 게임시간을 조절하거나 유해·음란물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다. |
막상 도착하고 보니 슈퍼컴퓨터는 없었다. “야동은 다 어디 있나요?” 두리번거리는 기자를 보며 박철우 지란지교소포트 엑스키퍼개발팀 팀장이 피식 웃었다. “그 많은 야동을 어떻게 다 보관합니까. ‘해시값’만 뽑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실망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박 팀장이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여기 처음 오시는 분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해시값은 해시(hash)라는 암호화 기법으로 만들어 진 값이다. 영상마다 각각 다르다. 박 팀장은 해시값을 기반으로 한 음란물 필터링 기술이 이 회사의 특허라고 말했다. “음란물에서 32바이트만 뽑으면 모든 음란물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DNA 염기서열에서 사람마다 구분되는 특정구간을 분석하는 것과 같다. 어느 구간인지는 밝힐 수 없다고 박 팀장은 말했다. 그걸 밝히면 엑스키퍼가 무력화되므로.

[PC방 아니다. 지란지교소프트 직원들이 음란물을 모니터링하는 공간이다. 이곳을 거쳐가지 않은 ‘야동’이 있을까. 매일 수천 편에 이르는 야동이 이곳에서 유해물로 분류된다.]
음란물마다 ‘염기서열’ 뽑는 기술
음란물 한 편당 32바이트(알파벳 32개 분량) 정보만 있으면 ‘빨간 딱지’를 붙일 수 있다. 130만 건에 이르는 음란물 DB의 총 보관용량이 19MB밖에 안 되는 이유다. ‘슈퍼컴퓨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 핵심DB는 현재 철통보안이 갖춰진 서울 IDC센터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이 DB로 어떻게 음란물을 차단하는 걸까. 음란 동영상 파일을 더블클릭 해보자. 윈도우 같은 운영체제(OS)가 ‘파일을 가져가 실행하라’는 명령을 사방으로 뿌린다. 그러면 곰플레이어 등 응용프로그램이 접근해서 영상을 틀기 시작한다. 엑스키퍼는 윈도우의 실행명령을 포착해 곰플레이어보다 먼저 파일에 도착한 다음, 해시값이 음란물 DB와 일치하는지 분석한다. 분석시간은 0.1초. 음란물로 밝혀지면 실행을 막고 경고창을 띄운다. 백신 프로그램 작동원리와 비슷하다.
웹하드나 P2P에서도 해시값 DB를 이용해 음란물을 차단할 수 있다. 업로드·다운로드 시점에 파일을 검사해서 음란물을 막을 수도 있고, 서버에 저장된 영상들을 주기적으로 검사해서 음란물만 걸러낼 수도 있다. 박 팀장은 “우리나라 전체 웹하드 업체 중 약 40% 가량에 우리 기술을 적용한 모듈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야동트렌드는 ‘셀카’
한여름 논밭의 잡초처럼, 음란물은 아무리 막아도 하루만 지나면 무성하게 싹을 틔우고 올라온다. 매일 DB를 업데이트해야 하는 이유다. 지란지교소프트에는 ‘야동 받는 로봇’이 있다. 웹하드에 ‘포르노’ 같은 키워드를 자동으로 입력해 음란물을 내려 받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 5대가 24시간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매일 음란물 6000~7000개를 받는다. 아무도 없는데 마우스가 저절로 움직여 ‘다운로드’를 클릭해대는 모습은 조금 괴이했다.
웹하드별로 음란물을 가려내는 키워드가 조금씩 달랐는데, 다 합쳐 수백 개가 있다고 박경순 서비스운영팀 대리는 말했다. “일본 영상이 워낙 많아 키워드도 일본어가 많습니다.” 박 대리가 보여준 키워드 목록에는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즐비했다. 이런 키워드로 검색하면 도대체 어떤 영상이 나올까 싶었다. “요즘엔 ‘셀카’란 단어를 넣은 야동이 많이 올라옵니다.”
로봇은 키워드만 가지고 음란물을 분류하기 때문에, 자칫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음란물이 아닌데 잘못 분류했다가는 큰 욕을 먹을 수 있어요. 그래서 로봇이 받은 음란물 중에서 중복되는 건 빼고 사람이 전수조사합니다.” 옆에선 아르바이트생들이 열심히 음란물을 보고 있었다. 1명이 하루에 1500~2000개에 이르는 영상을 봐야하니 바빴다. 화면 속 배우들도 숨 가빴다. 한 편당 10초면 판별 끝. 한 아르바이트생은 “친구들한테 ‘야동 보는 일한다’고 장난삼아 말하는데, 잘 안 믿는다”며 “처음엔 이상했는데 시간 지나니까 그냥 일”이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최종적으로 하루에 음란물 400~500개의 해시값을 DB에 신규등록한다. 이런 식으로 10년 동안 쌓아온 DB가 이 회사의 재산이다. 박 팀장은 “음란사이트 DB를 가진 회사는 많지만, 음란 동영상 DB를 가진 회사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기자의 지인들은 법 시행 이후에도 ‘프록시 서버(Proxy Server)’를 통하면 음란물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프록시 서버는 일종의 우회로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편지를 보낼 때, 일부러 중국 베이징의 우체국으로 보내서 차단망을 피하는 식이다. 음란물도 막힌 경로를 피해 다른 사이트로 돌려서 받으면 되지 않을까.
“우회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박 팀장은 과거 프록시 서버를 이용해 음란물에 접근하려했던 ‘엑스키퍼 무력화 카페’ 청소년들과 벌였던 일전을 소개했다. 프록시 서버를 생산해주는 프로그램이나 웹페이지 자체를 차단해버리면 기술적으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현재 엑스키퍼도 이런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개정된 법에는 프록시 서버에 변지민규정이 따로 없다. 정일선 방송통신위원회 사무관은 “프록시 서버까지 하나하나 확인해서 차단하지는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음란물이 가장 많이 오고 가는 토렌트 역시 이번 개정안에 해당사항이 없다. 사업자가 없어 따로 처벌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심하라는 말은 아니다. 불법 음란물 공유는 애초부터 불법이다.
청소년은 스마트폰을 통해 음란물을 보기 어렵게 됐다. 이동통신사업자가 청소년과 계약할 때 스마트폰에 유해정보 차단수단을 설치할 것이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만든 유해물DB를 이용해 유해사이트와 유해앱을 자동차단한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음란물 공유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역시 완벽차단은 아니다. 온라인에 올라와있지 않은 음란 동영상을 SNS로 직접 전송하는 경우 막기 어렵다.

4월 16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에 ‘방주(외장하드)’를 마련한 사람도 있고,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며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온라인에 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란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건, 올리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필터링하고 법을 만드는 사람도 알고 있다. 다만 앞으로 음란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줄어들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