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외로운 왕, 늑대

태초에 왕이 있었다. 대륙을 발 아래에 둔 채 산하를 누비고, 생명이 있는 것들을 두루 다스리는 생태계의 왕이었다. 서슬이 퍼런 무서운 지배자였지만 한편 뭇 생명 다스리기를 초봄의 살얼음 다루듯 하는 어진 통치자기도 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살기에 좋았다. 왕의 치세엔 치우침이 없었기에, 작은 육식동물부터 초식동물, 곤충, 나무와 풀에 이르기까지 불만을 품는 자는 없었다. 단 하나의 종만 빼고.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던 왕, 늑대를 위험에 빠뜨린 건 바로 인류였다.
 
인상파, 암컷 회색늑대 한 마리가 동생의 장난에 이를 드러내며 짜증을 내고 있다.
 

사나운 왕

왕은 왕이로되, 늑대는 사나운 왕이었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냥 실력으로 뭇 동물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늑대는 개과 동물 중 가장 덩치가 컸다. 수컷의 경우 몸무게가 최대 50kg, 암컷도 45kg에 달해 상당히 육중했다. 귀는 둥글고 코는 뭉툭했으며 몸 길이는 1.5m에 달했다. 발은 뭉툭하고 커서 폭이 10cm나 됐다.

먹이에 관한 한, 왕은 좋게 말하면 적응력이 뛰어났고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였다.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먹이의 종류가 달랐다. 영역 안에서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록키산맥 북부지역이나 캐나다에서는 엘크를 가장 많이 잡아먹었고, 작은 사슴류도 일부 먹었다. 알래스카 해안이나 브리티시콜롬비아 지역에서는 사슴류를, 그 이남은 말코손바닥사슴(무스)을 주로 먹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물고기나 설치류(다람쥐 등), 심지어 식물을 먹기도 했다. 설치류와 식물이라니, 사나운 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 걸까. 하지만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게 가장 강력한 생존 비법인 세계가 생태계다. 늑대가 전세계에 두루 퍼져 살 수 있는 것도 이런 적응력 덕분이다.


 
피맛을 본 왕. 사슴 고기를 뜯는 암컷 늑대의 눈빛이 매섭다(➊).
피맛을 본 왕. 사슴 고기를 뜯는 암컷 늑대의 눈빛이 매섭다(➊).


커다란 발자국. 늑대의 발은 뭉툭하고 크다. 폭이 10cm나 된다(➋).
커다란 발자국. 늑대의 발은 뭉툭하고 크다. 폭이 10cm나 된다(➋).

피범벅이 된 얼굴은 그가 사나운 왕임을 보여준다(➌).
피범벅이 된 얼굴은 그가 사나운 왕임을 보여준다(➌).

 
정겨운 한 때, 새끼 늑대가 재롱을 떨자 암컷 늑대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장난을 받아주고 있다.

애틋한 왕

왕은 왕이로되, 늑대는 애틋한 왕이었다. 사람에게는 위험한 동물이지만, 새끼를 키우는 왕 부부의 모습은 그런 편견을 싹 가시게 한다. 왕은 소규모로 무리를 이뤄 살며 소리로 신호를 주고 받거나 함께 사냥하는 등 사회 생활을 했다. 무리는 보통 암수 한 쌍에 새끼들이 그 뒤를 따랐다. 새끼들은 어린 개체만 있는 게 아니어서, 먼저 태어나 이미 성년에 가깝게 자란 것부터 갓 태어난 젖먹이까지 다양했다. 사람으로 치면 대학 간 큰 언니부터 유치원도 못 간 막내까지 한 집에 사는 확장된 핵가족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육아를 분담하기도 했고 사냥도 함께 했다. 미국 아이다호와 몬태나, 와이오밍 주에 사는 늑대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무리를 이루는 왕의 수는 평균 5마리에서 9마리로 천차만별이었다. 흥미롭게도, 먹이가 클수록 무리도 커졌다. 작은 사슴류를 먹는 무리보다는 엘크를 먹는 무리가 구성원 수가 많았고, 그보다는 바이슨을 사냥하는 무리가 컸다. 무리에 들지 못하는 외톨이 왕도 있었다. 홀로 돌아다니는 이런 떠돌이 왕은 전체 개체의 10~15%를 차지했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날, 늑대가 길게 하울링(소리 높여 우는 일)을 하고 있다. 틀림없이 귀 기울여 듣는 누군가를 염두에 뒀으리라(➊).
눈보라가 치는 겨울날, 늑대가 길게 하울링(소리 높여 우는 일)을 하고 있다. 틀림없이 귀 기울여 듣는 누군가를 염두에 뒀으리라(➊).
 
[짝을 이룬 늑대. 늑대는 암수가 쌍을 이루고 딸린 식구까지 5~9마리 정도가 한 무리를 이뤄 다녔다(➋).]
[짝을 이룬 늑대. 늑대는 암수가 쌍을 이루고 딸린 식구까지 5~9마리 정도가 한 무리를 이뤄 다녔다(➋).]
 


[가죽을 위해 사냥 당한 늑대. 폴란드에서 찍은 사진이다. 늑대는 전세계 북반구에 흔히 분포하는 성공한 동물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사냥감이 되기도 쉬웠다.
[가죽을 위해 사냥 당한 늑대. 폴란드에서 찍은 사진이다. 늑대는 전세계 북반구에 흔히 분포하는 성공한 동물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사냥감이 되기도 쉬웠다.
이미 늑대를 볼 수 없게 된 한반도가 대표적인 예다(➊).
]


외로운 왕

왕은 왕이로되, 늑대는 외로운 왕이었다. 유라시아부터 북미까지 늑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드물었다. 하지만 자신과 견줄 대형 육식 포유류가 하나 둘 사라져 버리자 금세 외로움을 느꼈다. 호랑이가 줄어들고 곰이 사라졌다. 표범도 자취를 감췄다. 한반도는 이들이 한꺼번에 모두 멸종해 버린 드문 곳 중 하나였다. 왕 역시 운명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한반도에서도 야생 늑대는 1980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야생동물 전문가 겸 작가엔도 기미오의 조사에 따르면, 늑대는 딱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 흔한 동물이었다. 1914년 한 해에 사람에게 사냥 당한 수만 122마리였다. 이 해에는 또다른 맹수인 곰도 261마리가 인간에게 잡혔다. 사람은 맹수를 피할 수 있게 돼 좋았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재앙이었다. 한국의 사정만은 아니었다. 가죽을 얻기 위해, 혹은 위험한 동물을 없앤다는 미명 아래 늑대를 잡는 사냥이 성행했다. 왕은 이제 영원히 쫓겨났다.

왕이 쫓겨난 일부 지역은 무너진 생태계 균형 때문에 일부 동물이 과잉번식하는 등 문제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늑대를 다시 도입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옐로스톤국립공원에서 늑대를 복원해 들소 무리 수를 제한하고, 그 덕분에 숲까지 살아난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도 최근 환경부가 늑대 복원을 검토할 뜻을 밝혔다. 물론 늑대는 사나운 왕이므로 위험하다는 우려도 있다. 과연 이 땅에서 생태계의 외로운 왕을 다시 볼 날이 올까.

 
[늑대는 추운 지역에서도 잘 적응해 살았다. 털이 흰 북극늑대(회색늑대의 아종) 한 마리가 미국 미네소타의 얼어붙은 강가를 거닐고 있다. 야생에서, 생존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다(➋).]
[늑대는 추운 지역에서도 잘 적응해 살았다. 털이 흰 북극늑대(회색늑대의 아종) 한 마리가 미국 미네소타의 얼어붙은 강가를 거닐고 있다. 야생에서, 생존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다(➋).]
 

[몽골의 건물 입구에 늑대 가죽이 걸려 있다(➌).]
[몽골의 건물 입구에 늑대 가죽이 걸려 있다(➌).]

 

2015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 기자
  • 사진

    REX
  • 자료출처

    워싱턴야생동물보호국 보고서 ‘늑대복원관리계획’ 외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환경학·환경공학
  • 도시·지역·지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