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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서 취미를 찾은 ‘기상의 달인’

인터뷰

 류상범 국립기상연구소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이 지난 4년간 수집한 기상과 관련된 우표와 우편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직업과 관련된 취미를 가지면 서로 상승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책임감을 느껴 즐거워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류상범 국립기상연구소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은 직업에서 취미를 찾았다. 그는 하루 종일 기상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도 모자라 주말에는 기상을 테마로 한 우표를 수집하고 책을 쓴다. 기상과 우표에 ‘미쳐 있는’ 그를 만나러 경기 안양시에 있는 집을 찾았다.

 



“이렇게 큰 게 우표라고요?”


미리 말해두지만 기자는 ‘우표 수집’에 ‘ㅇ’도 모른다. 가로, 세로가 2~4cm인 보통우표만 봐 왔지 A4 용지만 한 우표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다행히 류상범 국립기상연구소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이 우표 지식이 없는 기자를 이해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멀레디 커버에요. 우표 값이 선납된 일종의 엽서이자 우편봉투죠. 여기 우정당국이 발행한 요액인면(우표 값)이 보이죠? 예전에는 이렇게 지정된 봉투에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기상과 관련이 있을까. 참을성 없는 기자가 또 물었다. 이번에는 말없이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을 가리킨다. 한번 읽어보라는 거다. ‘가벼운 여름 비옷’이라고 영어로 쓰여 있다.

“멀레디 커버 뒷면은 일종의 종이광고로 사용됐어요. 이건 여름용 비옷을 파는 광고고요. 여기 가볍고, 땀이 차지 않으며 완벽하게 방수가 된다는 말이 있네요.”

그렇다면 류 과장은 비옷 광고 때문에 이 멀레디 커버를 모았다는 얘기다. 수많은 멀레디 커버를 찾고 거기에 쓰여 있는 깨알 같은 광고문을 모두 읽어 찾아낸 것일 테다.



우편 봉투 속 비옷 광고에 담긴 의미

확실히 비옷은 날씨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생활물품이다. 1840년 6월에 제작된 이 멀레디 커버를 통해 우리는 당시 영국에 비가 많이 내렸고, 우편물에 광고를 실을 만큼 우편물이 고급 서비스로 활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류 과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비옷을 통해 습도와 패션을 설명한다.

“열대 지역이라도 습도에 따라 옷의 종류가 달라지죠.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바람이 잘 통하는 얇고 짧은 옷을 입지만 건조한 사막에서는 체온을 잘 발산시킬 수 있는 헐렁한 옷으로 몸을 감쌉니다.”

이처럼 그의 엽서 컬렉션에는 이야기가 있다. 중심은 언제나 날씨다. 그는 우표를 가지고 구름, 비, 눈, 바람, 토네이도 같은 기상 현상을 이야기 한다. 수식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왜 태양에서 지구가 가장 가까울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기온이 높은지, 우주선을 타고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서 하늘을 바라보면 무슨 색을 띠는지 설명한다. 구름 그려진 우표를 가지고 권운, 적운, 층운 같은 구름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와 같은 역사의 한 페이지도 소개한다. 단어의 뜻과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구름을 이해하게 된다.

“우표 수집이라는 게 마냥 수집한다고 다 인정받는 게 아니더군요.

우표에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그걸 풀어내는 이야기가 담겨야 해요. 설명할 지식도 필요하고요. 기상학 박사지만 우표 수집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류 과장은 주로 인터넷 경매를 통해 우표를 구입하고 있다. 경매 책자를 통해 나올 물건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수집할 가치가 있는지 분석한다. 그렇게 모은 것이 어느새 80장, 커다란 앨범 2권 분량이 나왔다. 이 컬렉션이 지난해 대한민국 우표전시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책으로도 나왔다. 책 제목이 ‘날씨는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다. 여기서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은 글씨가 작아서 언뜻 보면 ‘날씨는 미쳤는가’로 보인다. 제목 한번 기가 막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욕하면서도 필요할 땐 꼭 찾아보는 서비스가 기상 서비스라고 하더군요. 출판사에서 지은 제목인데, 이중적인 의미가 잘 담겨 재밌게 나온 것 같아요.”


 

 

 

 

[➊ 1840년 6월 10일에 사용된 멀레디(Mulready) 커버.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여성용 비옷 광고가 실려 있다.]

 

 

 

[➋ 제2차 세계대전 때 해외에 파견된 영국군은 편지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찍어 필름만 운송한 뒤 이를 현상해 배달하는 에어그라프(airgraph)를 사용했다.]

 



기상학 박사에게 우표수집이 특별한 이유

그는 “옛 우표와 우편물을 찾고 글을 쓰면서 새롭게 알아낸 사실도 많다”고 말했다. 류 과장은 “1894년 미국 우편물을 보면 다음 날 날씨 예보를 도장으로 우편물에 찍어 알렸다”며 “깃발로 날씨를 알렸다는 방식은 알고 있었지만 우편물로 날씨를 예보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배달물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카메라로 편지를 찍어 필름만 운송한 뒤 이를 현상해 목적지에 배달하는 신기한 형태의 엽서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엽서 컬렉션에서는 과거의 기상 기록뿐 아니라 우편물의 발전 과정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직업과 관련된 취미를 가지면 서로 상승효과가 있습니다. 일과 관련해 더 많은 상식을 갖게 되고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어떤 식으로 발달했는지 공부하게 되죠.”

전문가가 될수록 깊은 지식을 가질 수 있지만 반대로 관심범위가 좁아진다. 직업에서 취미를 개발한 류상범 박사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아직도 기상이 재밌다는 그의 모습에서 기상의 ‘달인’의 한면을 볼 수 있었다.
 

 

201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윤미 기자│이미지 출처│류상욱, 황금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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