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1만 km 넘게 날아가면 나오는 남극 대륙. 같은 북반구에 있지도 않은 남극을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할까. 정말 호주의 두 배에 달하는 대륙 아래 잠들어 있는 지하자원을 미리 조사하기 위해서일까. 수천m가 넘는 두꺼운 얼음을 뚫고 자원을 개발하는 작업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현재 남극 연구의 대세는 지구온난화 이슈를 포함한 기후다.
기후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20세기 후반부터 대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남극을 주목했다. 당시 가장 ‘핫’한 이슈는 오존층이었는데, 남극에 거대한 오존구멍이 생겼던 것이다. 오존층 파괴의 주범인 냉장고나 스프레이의 냉매로 쓰이는 염화불화탄소(CFC)는 원래 공기보다 무거워 성층권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CFC는 상승기류를 타고 남극 상공에 모인 뒤 성층권 대기 순환에 갇혀 다른 지역으로 퍼지지도 못하고, 이곳 오존층을 ‘구멍’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얇게 만들었다. 남극 오존구멍을 보고 사람들은 지구 전체에서 일어나는 오존층 파괴를 실감하게 됐고, 결국 1989년 몬트리올의정서를 맺으며 CFC 감축에 합의했다. 그 결과 감축 이래 가장 두터운 오존층이 2012년 관측됐다. CFC 감축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피부암 등을 일으키는 자외선 폭격을 맞고 있을지 모른다.
혹한이나 폭염의 단골 원인으로 등장하는 엘니뇨와 라니냐도 남극 바다에서 시작된다. 두 현상이 발생하는 지역은 남아메리카 서쪽, 즉 적도 부근의 동태평양이다. 적도 근방에서는 동쪽에서 무역풍이 분다. 무역풍이 표층해수를 서태평양으로 밀어내면 빈자리는 해저 깊은 곳에서 차가운 심층수가 올라와 채운다. 바로 남극에서 출발한 심층수다. 무역풍이 약하게 불어 심층수가 잘 올라오지 못하면 엘니뇨가 일어나 바다가 평소보다 따뜻하고, 무역풍이 강해 심층수가 너무 많이 올라오면 차가운 라니냐가 발생한다.
심층수는 심해 1000~4000m에서 밀도차를 따라 천천히 순환하는 거대한 물 덩어리(수괴)다.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일부만 수면으로 올라와도 지구에는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하지만 심층수의 성질이나 순환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매우 적다. 남극이나 북극 등 극지에서 차갑게 식어 밀도가 높아진 수괴가 해저로 침강하면서 온 바다를 순환하는데, 지구 전체를 도는 데 약 2000년이 걸린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만일 남극 심층수에 대한 정보가 쌓이면 우리는 지구 기후를 훨씬 더 자세하게 알게 될 것이다.
남극 전체 기후 모델 아직 없어
오존층과 심층수에서 보듯 ‘남극은 지구 기후를 지배하는 숨은 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온난화로 남극에서 녹아내리는 빙하는 전체 해수면 높이를 결정한다. 적도에서 상승한 더운 공기는 양 극지방에서 하강해 지구 전체에 태양 에너지를 분배한다. 하지만 관측에 의존해 거대한 흐름을 파악하고 있을 뿐 이들이 지구 기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다.
지구 기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기후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작게는 우리나라 장마철에 비가 오는 경향을 모델로 만들 수 있으며 크게는 전지구 기후모델을 만들 수도 있다. 전지구 기후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지역에 대한 작은 기후모델이 빠짐없이 완성돼야 한다. 이러려면 구석구석 오랫동안 관측 자료를 모으고 의미를 찾는 작업이 필수다.
그러나 기후모델 중 유독 빠져 있는 지역이 있다. 바로 남극이다. 사람이 사는 다른 대륙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차례 관측을 하지만 남극은 너무 추워 관측소조차 세우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1400만km2로 호주의 2배쯤 되는 ‘대륙’이라 너무 넓다. 멀고 고된 길이지만 과학자들이 직접 남극으로 갈 수밖에 없다. 기후모델의 마지막 퍼즐조각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과학자들이 남극에 진출한 지 수십 년, 여전히 남극 전체를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십 개의 기지를 중심으로 작은 기후모델은 하나둘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남극 해안에는 ‘폴리니아(빙호)’라고 불리는 바다 지형이 있다. 해빙과 육지 사이에 어째서인지 얼지 않은 바다가 있다. 연구 결과 남극의 높은 중심부에서 불어 내려온 강한 바람이 얼음을 밀어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크고 작은 모델이 나와 합쳐지면 언젠가는 남극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기후모델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동남극(장보고)과 서남극(세종)에 각각 하나씩 기지를 짓는 이유도 남극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다. 서남극과 동남극은 미국의 워싱턴과 LA만큼이나 기후가 다르다. 한 쪽 빙하는 녹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데, 반대 쪽 빙하는 천천히 녹을 수도 있다. 두 기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남극에 대한 더 큰 기후모델을 만들 수 있다
지구 기후 변화의 비밀을 풀 남극권 시나리오
드넓은 남극이지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모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고도가 높은 남극대륙 중심에서 해안 방향으로 빙하가 흐른다. 해안에 다다른 빙하가 바다 위로 뻗은 부분이 길어지면 무게를 못 이기고 부러져 빙산이 된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하면서 빙하의 녹는 속도도 점점 빨리지는 현상은 남극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모델이다.
하지만 기본 모델에 맞지 않는 빙하도 많다. 서남극 아문젠 해에 인접한 파인아일랜드 빙하는 2010~2012년 녹는 속도가 도리어 느려졌다. 이상훈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팀은 최근 그 이유를 밝혀 ‘사이언스’ 1월 3일자에 발표했다.
바다를 수직으로 잘라보면 수십 m까지는 위아래 물이 잘 섞여 온도가 비교적 일정한 혼합층이다. 그 아래로는 수심 1000m까지 지속적으로 온도가 떨어지는 수온약층이 있다. 그 아래로는 온도가 1~4℃로 계속 일정하게 유지되는데, 이곳을 심해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남극은 이 구분이 의미가 없다. 애초에 해수면 부근이 0℃ 안팎으로 온도가 낮기 때문에 혼합층부터 심해층까지 수온이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남극 해수보다 수온이 높은 해류가 들어오는 곳은 수온약층이 존재하는데, 파인아일랜드 빙하가 바로 이런 지역에 있다.
연구팀은 파인아일랜드 빙하의 녹는 속도가 줄어든 이유를 이 수온약층이 2010년 이전보다 250m 가량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온약층이 낮아진 이유는 당시 발생한 라니냐 때문에 남극으로 와야 할 따뜻한 물이 서태평양으로 밀려갔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언론에 ‘빙하 녹는 속도가 느려졌고, 이는 지구온난화가 생각만큼 빨라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진짜 의의는 남극의 빙하와 대기, 해수의 관계를 연결해 ‘남극권’을 설명해냈다는 데 있다. 지난해 여름, 한참 논문을 준비하던 이상훈 연구원 역시 기자에게 “남극 빙하가 일반적인 경로와 다르게 녹는 과정에 대한 모델을 처음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극을 이해하려면 남극권을 보라
지구는 여러 영역으로 구성돼있다. 대기권, 지권, 빙권, 생물권, 수권과 같은 각 권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모여 지구라는 ‘계’를 만든다. 이 권들이 서로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단일 권역만 보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만든다.
예를 들어 NASA가 2012년과 2013년 8월에 각각 인공위성을 이용해 찍은 북극 을 보면 2013년에 빙하가 더 늘어났다. 기존에 알려진 지구온난화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빙하기가 다시 온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많이 녹은 만큼 강설량이 늘어났으며, 새로 내린 눈이 빙하와 외부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아 예전보다 덜 녹게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놨다.
남극에서도 이와 비슷한 복합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초기에 남극 기후 연구는 빙하가 녹는 속도를 관측해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강해지는지를 파악하는 일에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구온난화로 녹은 빙하가 거꾸로 온난화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도 하고 있다.
빙하는 얼어있으면 태양에너지를 반사해 지구로 들어오는 에너지를 줄이지만, 녹으면 태양에너지를 덜 반사하기 때문에 온난화를 가속한다. 반면 흰 구름은 태양에너지를 많이 반사한다. 구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증기 말고도 구름 결정의 중심이 될 입자(DMS, DiMethyle Sulfide)가 있어야 한다. 이 입자는 식물 플랑크톤이 많이 배출하는데, 식물 플랑크톤은 빙하가 녹아 바다가 된 지역에서 살아간다. 김현철 박사팀은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빙하가 녹은 곳에 식물 플랑크톤이 늘어나 DMS를 많이 배출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연구가 발전하면 남극 생물과 바다, 대기, 빙하가 서로 주고받는 거대한 관계를 남극권 차원에서 해석하게 될 것이다.이원상 책임연구원팀은 장보고과학기지 근처에 있는 데이비드 빙하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데이비드 빙하는 빙하가 흐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둥둥 떠다니는 빙산을 만들지 못하고 바다 위로 길게 뻗어나와있다. 연구팀은 빙하가 평균보다 빠른 속도로 흐르는 이유가 빙하 아래쪽의 지열에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지하 깊은 곳에서 열이 발생해 빙하 밑바닥을 녹인다면 스케이트 날에 물기가 살짝 있어야 잘 미끄러지는 것처럼 빙하와 지면사이의 마찰력이 줄어 빙하가 더 빠르게 미끄러진다. 실제로 남극에는 에레부스산 같은 활화산이 있다.
연구팀은 데이비드 빙하가 빠르게 흐르는 이유를 파악해 모델을 만든 뒤, 이 가설을 남극 전역으로 확대해 남극권을 해석할 계획이다. 여기에 남극 생물, 대기 등 각종 영역에 대한 내용을 더해 ‘남극종합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다. 물론 연구팀 홀로는 택도 없다.
데이비드 빙하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데만 3년 넘게 걸렸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팀은 해외 과학자들과 ‘EGG(Extreme Geophysics Group)’라는 협력체를 조직했다. 이 협력체에는 지질학자, 대기학자, 생물학자 등 다양한 과학자가 참가했다. 남극종합시스템이 완성된다면 ‘아시아 기후 모델’ ‘북아메리카 기후 모델’ 같은 남극 모델이 만들어지게 되며, 이제까지 비어있었던 마지막 기후 퍼즐 조각이 맞춰질 것이다. 한 때는 거대한 녹지였다가 이제는 얼음으로 뒤덮인 하얀 대륙은 과연 지구 기후의 비밀을 풀 마지막 열쇠를 우리에게 안겨줄까. 세종과학기지와 북극다산과학기지에 이어 세 번째로 생기는 극지 기지이자, 남극대륙에 세우는 첫 번째 기지인 장보고과학기지가 앞으로 해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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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남극 2.0
PART 1. 응답하라,장보고과학기지
PART 2. 한 눈에 보는 남극 탐험
PART 3. 지구 기후의 마지막 퍼즐 남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