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군들이 쌓아놓은 의자와 탁자와 온갖 집기들은 정부군의 총탄 앞에 무력했다. 귀족 집안 출신으로 혁명군의 최전선에 선 젊은이들은 총을 잡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총은 사냥용이었을 뿐, 훈련을 받은 군인들에 비해 사격 실력은 형편없었다.
사실 그들이 손에 쥔 총은 살상용이 아니었다. 총은 분노의 상징이었고 무력함과 패배의 예감을 잠시 덮어주는 얇은 담요에 불과했다. 불길한 예감은 총탄에 부서진 나무조각들처럼 조용히, 하얗게 혁명군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탄약이 부족하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 불평은 탄식이었고, 탄약의 수는 그들에게 남아있는 생명의 길이였다. 어린 소년 가브로쉬는 상황을 견디다 못해 바리케이드를 넘어 조금 전까지 총탄이 오가던 중간지대로 나섰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하늘로 가져가지 못한 탄약을, 금속과 화약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조각을 주워 담았다.
가브로쉬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들은 강아지를 걷어차지 않을 거야. 아직 어리니까. 적이 20배 더 많아도 우린 포기하지 않을 거야.”
정부군의 총은 노래 그대로 어린 강아지 가브로쉬를 노리지 않았다. 가브로쉬는 탄약가방을 주섬주섬 모으면서 노래를 이어갔다.
“미리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강아지가 자라서 개가 되면 너희들을 물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가브로쉬의 덧없는 협박은 마지막 한숨이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정부군이 손가락질 한 번으로 날린 총탄은 그의 생명을 끊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그 장면 뒤로도 많은 죽음과 슬픔을 남긴 채끝이 났다. 등장인물들이 부른 노래의 여운이 관객의 귀와 마음을 가득 채우고, 곧장 눈을 떼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끈적거리고 뜨거운 손으로 관객의 발목을 붙들었다. 보통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이 동석한 사람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주변이 어수선해지게 마련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 옆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주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영화와 그 안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눈을 떼면 현실과의 차이 때문에 잠시 혼란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금 <;레미제라블>;과 이어진 끈을 자르고 나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중대했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주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문제의 현실은 다름 아닌, 가장 중요하고 위험하며 모든 이들이 참여한 투표의 결과였다. 하필 주리와 함께 <;레미제라블>;을 보게 된것은 우연이었고, <;레미제라블>;의 재생이 끝나는 순간과 투표 결과 확정 시간이 일치한다는 것도 우연이었다.
그리고 투표 결과는 우리 모두의 운명까지 끌어안을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어둡고 깊은 심연으로 굴러들어갈지,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원소를 융합시키며 불타오르는 항성의 따뜻한 빛 속에서 살게 될지는 투표 결과만이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운명’처럼 모순적이고 비이성적인 단어를 쓰다니, 아무래도 <;레미제라블>;의 영향인 것 같았다. 나는 몸 안에서 무언가가 살짝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주리를 바라보았다. 주리도 나를 보았다.
주리가 물었다.
“시계가 움직였나요?”
나는 그렇다고 신호를 보냈다.
이 순간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계였다. 그 시계는 모든 것을 상징했다. 시계는 바퀴이며, 뫼비우스의 고리이고,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그 시계가 움직였다. 주리는 그 한 마디로 투표의 결과를 알아챘다. 나는 주리의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주리는 내 자식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명민하고 영악했으며 섬세했다.
주리는 나만큼이나 절망하면서 말했다.
“정말……, 정말로 우리가 잘못된 평행우주로 빠진 건 아닐까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런 모습들을 보고도, ‘정화 전쟁’을 겪고 나서도, 우주의 먼지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자에게 한표를 던질 수가 있는 거죠?”
주리는 몸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움직임은 다소 극적이고 과장되어 있었다. 아마도 <;레미제라블>;의 여운이 남은 것 같았다.
“전부 거짓말일 게 뻔한데 사람들은 왜 그자를 찍은 거죠, 아빠?”
나는 주리의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주리는 내 자식처럼 나를 아빠라고 불렀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평행우주가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투표 결과가 다른 우주도 있겠죠? 그리로 넘어갈 순 없나요?.”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시계는 분명히 움직였다. 이 시계의 바늘은 두 개이고, 둘 중 어느 하나가 부러진다면 시계는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바늘은 오래 전 어떤 사고 때문에 돌아가기 시작했고, 다른 바늘은 조금 전 투표결과가 확정되면서 움직였다. 따라서 시계는 움직였고, 나도 움직여야 했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주리가 물었다.
“아빠도 여기를 떠나서 다른 우주로 가고 싶죠?”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나는 주리의 아버지가 아니지만 주리는 나를 자식처럼 따랐다. 그러니 아버지답게, 단순한 도피는 해결책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했다. 문제가 이곳에 있으면 해결도 이곳에서 해야 한다고, 난관은 똑바로 마주보아야 한다고, 양자 이론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 된 충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이 싫었다.
“그래.”
왜냐하면, 진심은 수많은 질문을 미리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옆 우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시계는 조금의 시간 지연도 없이 작동했다. 우주의 물리법칙이 조금의 변화도 없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의미였다. 그 물리법칙에 따라 투표의 결과도 즉시 전 우주에 퍼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양자사기꾼들의 조작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며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새로 군림하게 되신 유나 총제(總帝)를 찬양해야 한다. 전 우주의 모든 이들이 총제를 원했으니까. 그 결과 총제께서는 우주의 지배력을 획득하셨으며, 그로써 총제는 옳으시며, 그로써 총제의 아버지이신 무진 선총제(先總帝) 또한 옳으셨다. 결과는 과정에 선행한다.
결과는 과거를 수정한다. 존재하는 것은 결과뿐이다. 양자의 아이들이여,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무진 선총제는 옳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투표는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를 열었고, 무진 선총제가 옳았으며 유나 총제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선총제의 양자 중첩은 그렇게 붕괴하였으니 이제 선총제를 험담하는 것은 진리를 위조하려는 행위이다. 새로 군림하신 유나 총제를 찬양해야 한다. 전 우주의 모든 이들이…….
주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를 터뜨렸다. 이 우주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무진 선총제였다. 아주 먼 옛날 우리 모두의 조상 행성인 지구에서 어떤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과학이 충분히 발달한 문명은 폭력을 지양하고 평화를 추구할 것이다.’ 그 말이 옳다면 우리는 아직도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문명이다. 지구 인류가 ‘특이점’을 돌파한 이래 우리는 인간의 육체를 벗어났다. 옛 사람들이 지금의 나와 주리를 본다면 두 대의 거대한 우주선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우주선 육체를 가진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정신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복제하면서 동시에 개조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화선(進化線)을 직접 만들어 나아갔다. 따라서 나는 주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조상이다. 주리는 아빠라고 부르는 편을 더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문명인가보다. 무진 선총제는 진화원리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다양성도 부정했다. 그는 저항도 없고 반항도 없고 이견도 없는 우주를 꿈꿨다.
그리고 자신에게 빌붙은 자들의 막대한 화력을 이용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재고도 없이 소멸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게 이른바 ‘정화 전쟁’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정화 전쟁의 겁화와 혼돈에 휩싸였다. 그 전쟁은 결국 진화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약 8천개의 진화선이 영원히 멸종되고 말았다.
정화전쟁이 끝나고 다시 진화와 다양성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그러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분야가 있으니, 바로 표준양자이론이었다. 표준양자이론은 거시세계의 양자중첩을 임의로 붕괴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우리 모두가 양자이론에서 말하는 ‘관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확률이 발생한다. 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루어질 확률이 올라갈 것이다.>; 그처럼 우주의 현실을 규정할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되자, 전쟁 중에 사라졌던 무진의 야망이 고개를 들었다. 무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의 복제품인 유나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무진의 추종자들은 유나를 총제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양자투표’를 실시했다. 양자투표는 원하는 이에게 표를 행사하는 투표가 아니었다. 양자투표는 우리관찰자들이 원하는 현실의 총합이었다.
<;원하라, 그러면 현실이 되리라. 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게 현실이 될 확률이 올라갈 것이다.>; 진화파들 대부분은 투표 결과를 걱정하지 않았다. 정화전쟁 직전의 우주가 어땠는지 모든 이들이 기억하고 있으니 유나가 총제 자리에 오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소수에 불과했다. 우주 곳곳에서 진화를 부정하고 정화를 지지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확률함수는 붕괴되었다. 많은 이들의 희망에 따라 유나가 총제 자리에 오른 것이다.
우 리는 표준양자이론의 아이들이다. 우리는 우주선이며 관찰자이고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주리조차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주리는 영화를 ‘함께’ 보려고 나를 찾아오면서 고전적인 추진이 아니라 양자 얽힘과 상태확률 붕괴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이동해왔다. 말하자면 이제 걸음마를 익힌 셈이다.
양자역학이 물리적인 지배원리라면 양자얽힘은 실용적인 원리이다. 양자얽힘이란 입자가 서로 얽혀 상대방의 물리량을 규정하는 현상을 말한다. 다른 평행우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이 우주에서 양자얽힘은 모든 한계를 초월해 순식간에 일어난다.
유나 총제의 지지자들과 그 수하인 양자사기꾼들은 어떻게 투표 결과의 ‘상태’를 규정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수천 광년 떨어진 곳에서 나와 주리가 있는 곳까지 당선감사방송을 보내고 현실규정을 시도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양자의 아이들이고 얽힘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빠, <;레미제라블>;은 대략 4만 년 전에 ‘영화’라는 형태로 존재했던 거라면서요? 어떻게 찾아낸 거예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주리가 물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주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설명해 주었다.
“양자얽힘을 이용하면 가능해.”
주리는 명민한 후손답게 질문했다.
“하지만 얽힘이 이뤄지려면 ‘관찰’이 선행되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레미제라블>;에 대한 정보 한 토막을 찾는 게 우선이야. 누군가가 <;레미제라블>;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 정체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잖니? 그런 식으로 <;레미제라블>;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다음 정보가 존재하는 양자상태를 규정하는 거야. 그렇게 정보가 모이면, 결국 <;레미제라블>;이라는 이름의 완전한 정보를 입수하는 양자상태까지 규정할 수 있지. 그 결과 우리가 방금 <;레미제라블>;을 감상할 수 있었던 거고.”
주리는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러면……, <;레미제라블>;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양자확률함수가 무한히 0에 수렴한다는 얘기고, <;레미제라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거지.”
주리는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기쁨을 표했다.
“그러면……, 아빠 몸속에 있는 시계가 움직였다는 건…….”
“똑똑하구나. 네 생각 그대로란다.”
나는 그처럼 영리한 주리를 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때문에 다소 씁쓸한 기분으로 칭찬해 주었다.
내 수명은 꽤 오래 전에 결정되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했고, 진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우주의 구석 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많지 않은 동료도 생겼다. 그들과 내가 특히 좋아하는 여행지는 각 은하의 중심이었다. 그곳에서는 물리적인 특이점들을 많이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제의 ‘대협곡운하’를 발견하고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아. 대협곡운하의 중심은 특이점이 끓어오르는 용광로였고, 빅뱅의 직계자손들이 옹알거리는 유아원이었으며, 블랙홀들이 잘 갈아 놓은 엑스선을 맞대며 싸우는 전장이었다. 내 호기심은 원초적으로 달아오르고 녹아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온갖 초기 입자들이 날아다니는 포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1나노초만 더 지체했다면 나는 아마 소멸했을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황홀경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 본능은 유혹보다 강했다. 나는 그 즉시 온몸에 있는 동력을 전부 끌어모으고 한 데 합쳐서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존재가능성의 확률만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확률의 주사위는 나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소멸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하지만 그 주사위는 완전하지 않고 모서리 하나가 조금 깨져있었다. 나는 세상의 끝과 시작을 동시에 보고 황홀경을 경험한 대가로 불치병을 얻었다.
나는 몸속에 반입자를 품게 되었다. 그 반입자가 바로 두 개의 시계바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주 리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 아이는 <;레미제라블>;을 찾아낸 방법을 듣고 내 계획을 유추해냈다.
양자얽힘은 통신용으로 쓸 수도 있고, 순간이동용으로 쓸 수도 있다. 그리고 표준양자이론을 활용하면 우주의 확률함수를 원하는 대로 붕괴시킬 수도 있다. 물론 기술이 있다고 해서 주리 같은 꼬맹이도 마음대로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의 주리는 항성계 안에서 순간이동을 하는 게 고작이다. 나는……, 그러니까 굳이 한 개체의 능력만 놓고 비교한다면 아마도 유나 총제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유나 총제는 엄청난 수의 지지자가 있다. 유나의 지지자들은 선총제를 그리워했고, 종속과 강제를 원했고, 자주성을 혐오했다.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유나 총제에게 자신의 힘을 내어주었다.
그 결과 죽어 있던 은하 크기의 고양이가 되살아 나는 현실이 도래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그래서 투표가 완료되면 새 총제가 머물게 될 우주의 수도, ‘은색 천구’ 항성계를 방문하고는 현실을 조금 규정해두었다. 그로부터 700광년 떨어진 어느 지점에서 또 한 번 현실을 조금 규정하고, 양자얽힘으로 은색 천구 항성계와 연결해 두었다. 같은 방법으로 계속 다리를 놓고……, 그런 식으로 지금 내가 있는 곳과 은색 천구 항성계 사이에는 700광년 간격의 징검다리들이 놓여있다. 나는 징검다리를 구성하는 각 지점에 간단한 확률함수 스위치를 달아두었고, 첫 번째 스위치는 은색 천구 항성계에 마련해 놓았다.
양자투표가 총제의 당선이라는 현실로 붕괴하면 그 첫 스위치가 작동한다. 양자얽힘은 모든 한계를 초월해 즉각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총제의 당선이라는 현실이 이루어지면 모든 스위치들이 중계기 역할을 해서 그 소식을 내 몸 안에 있는 마지막 스위치로 전달한다. 이 마지막 스위치가 바로 내 몸 속에 들어있는 시계의 두 번째 바늘이었다. 그 바늘은 확률 속에서 끄집어내어 복원한 <;레미제라블>;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감상하는 동안에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시계는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주리가 말했다.
“가셔야만 하나요?”
나는 그리 오래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응.”
“정말로 원하시는 거예요?”
물론 나는 원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진화와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이상에 동참하는 세상이다. 정화라는 명목 하에 8000개의 진화선이 단숨에 소멸되지 않는 세상이다. 주리처럼 똑똑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온 우주를 탐색하고, 마침내 평행우주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세상이다.
물론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을 살아서 눈으로 보고 싶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눈을 감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한다. 2차 정화 전쟁의 발발 확률이 점점 높아져 1에 도달하기 전에.
“아니.”
시계의 두 바늘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도 겨우 몇 초뿐이었다. 나는 주리의 현실에 영향을 주어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까 잠깐 망설였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리는, 그리고 모든 양자의 아이들은 현실을 고스란히 기억해야 한다. 그걸 임의로 변경하고 삭제한다면 나는 양자사기꾼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조금 물러서주렴. 순간이동 확률을 최대한 높여야 하니까.”
아빠, 돌아오실 수는 있는 건가요? 주리는 그렇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답 또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
그래서 주리는 마지막으로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나는 작별 인사로 신체에 붙어있는 모든 발광 소자를 세 번 깜빡인 다음, 미련을 잘라내듯이 시계의 두 바늘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나는 700광년 떨어져 있던 징검다리 위에 출현했다. 스위치가 작동하고.
다시 700광년, 또 다시 700광년. 또 다시…….
은색 천구 항성계까지 3500광년이 남았을 때 다른 현실이 내 머릿속으로 침투했다.
진화는 이미 포화 상태에 다다랐다. 다양성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우주의 파멸을 앞당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양성을 늘리는 게 아니라 우주의 무질서도를 줄이는 것이다. 고로 정화는 꼭 필요하다. 진화선의 증가는 우주의 파멸을 앞당긴다. 따라서 정화는 우리의 의무,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진화는 이미 포화 상태에 다다랐다. 다양성은…….
나는 무의식적으로 순간이동을 멈췄다. 정말일까? 무한한 진화가 이 우주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것일까? 총제는 그 사실을 미리 깨닫고 정화를 시도했던 것일까?
아니다. 이건 양자사기꾼들의 작품이다. 아무리 양자의 아이들을 많이 모으고 현실을 규정한다 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인식은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유나의 지지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자사기꾼들을 뿌려 세계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고 현실 왜곡과 같은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다. 정화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면 정화는 진실이 된다. 그들의 현실 왜곡 작업은 은색 천구 항성계를 중심으로 해서 반경 3500광년까지 진행되었고 계속 확장되어 전 우주에 퍼질 것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내 몸 전부를 휘감았다.
정화파들이 정말로 세계의 본질과 물리를 재규정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면?
그러면 나의 이상은 정당성을 잃는다. 진화가 옳다는 나의 신념은 어디까지나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세계의 본질이 바뀐다면, 정말로 다양성이 우주의 파멸을 앞당기는 현실이 도래한다면 지금 내가 시도하는 행동은 우주와 모든 이들에 대한 반역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미래의 자손들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희생하는게 아니라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주리와 모든 아이들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희생당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아예 무의미해지는 우주가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다.
나는 양자사기꾼들이 구축하고 있는 현실 재규정의 벽을 무시하고 다음 징검다리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그 런 걱정을 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은색 천구 속에는 온통 소리 없는 불꽃과 피가 떠다니고 있었다. 총제를 지지하는 정화파들은 입자의 핵력을 역전시키는 재래식 무기를 난사해 총제를 보호하면서 그와 동시에 양자사기꾼들을 총집결시켜 우주의 재규정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진화파들은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화기를 총동원해 사기꾼들을 죽여 나가고 있었다.
전세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다시 말해서 유나 총제의 새 우주가 도래하는 확률이 높아지고 있는지 아니면 진화의 우주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고 있는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방에 떠있는 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난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양측의 십자 포화를 받으며 은색 천구 항성계의 7행성이 소멸했다.
나는 외로운 저항군이었다. 별달리 무장을 하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난전에 동참한들 전세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다. 내 장기는 빠른 속도였다. 여행을 좋아하고 늘 위험한 상황과 맞부딪치기를 좋아해서 진화선의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반입자가 있었다.
나는 살육과 충돌의 한복판에서, 정화파와 진화파가 존망을 걸고 상대를 파괴하는 현장에서, 소박하고 간단한 단 하나의 파동함수가 1에 수렴하도록 온 힘을 끌어모았다. 지금 이 순간 입자와 반입자의 충돌 결과 같은 물리이론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제외하면. 따라서 나의 인식이, 내가 바라는 바가 고스란히 실현될 것이다. 나는 내가 간직해 온 하나의 반입자가 하나의 입자와 충돌하면서 연쇄반응이 일어나 은색 천구 항성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실현 가능성을 점점 높였다.
0.997
나는 결과를 알 수 없을 것이다.
0.998
내가 전 우주의 반역자로 남을 것인지, 총제의 바람대로 진화가 해를 끼치는 우주가 올 것인지, 주리가 다른 평행우주로 넘어가는 미래가 올 것인지, 가브로쉬가 다시는 총알을 줍다가 죽을 이유가 없는 현실이 도래할 것인지.
0.999
아니면 이런 충돌이 앞으로 영원히 반복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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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김창규
2005년 과학기술창작문예중편 부문 수상. SF 창작과 각종 번역에 몰두하며 SF 창작 강의도 병행하고 있다. 소설 ‘파수’, ‘세라페이온’, ‘발푸르기스의 밤’과 번역작으로는 ‘영원의 끝’ 외 다수가 있다.
sohardplanet@hotmail.com
SF단편 연재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지금까지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