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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이 만든 잔혹한 스릴러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11시

시간여행은 언제나 드라마나 영화로 다루기 좋은 소재다. 과거를 건드렸을 때 나타나는 엄청난 파급력과 예상치 못한 틈새가 가져오는 반전의 짜릿함이 있다. 기자도 올 봄을 뜨겁게 달군 드라마 ‘나인’에서 9개의 초로 주인공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장면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11시’는 그동안 판타지 시간여행만 있었던 우리나라 영화계에 처음으로 과학적 가능성에 기반한 시간여행을 선보였다. ‘11시’에 나온 웜홀을 통한 시공간 여행은 1997년 개봉한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콘택트’와 설정이 비슷하다. 영화는 같은 이름의 소설에서 타임머신 아이디어를 빌려왔는데, 바로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그의 오랜 친구이자 캘리포니아공대 이론물리학과 교수인 킵손에게 조언을 얻어 쓴 소설이다. 킵 손 교수는 ‘아인슈타인-로젠다리’에서 얻은 불안정한 웜홀에 주목했다. 그리고 웜홀을 안정시키는 특별한 조건에서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11시’에서 천재과학자 정 박사도 이 웜홀에 주목한다. 그는 지구내부에 있는 강한 미지의 에너지인 코어에너지를 이용해 입자가속기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증폭시키면 웜홀이 닫히는 것을 막고 24시간 뒤로 시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과학적으로 타당할까?
 


영화 ‘11시’는 국가핵융합연구소의 협조를 얻어 핵융합실험로 K-STAR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영화 속에서 K-STAR는 타임머신의 동력원으로 등장한다.


 

팬텀에너지와 강한 중력 있으면 가능할 수도

웜홀을 지탱할 에너지가 있어야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혀 엉뚱한 설명은 아니다. 영화 제작에 조언을 주었던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은 “웜홀은 안정성이 낮아서 금세 붕괴할 수 있다”면서 “웜홀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음의 중력과 팬텀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질량을 가진 물질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중력이 작용한다. 웜홀은 공간 사이에 뻥 뚫린 공간이라 주변 물질끼리 중력이 작용하면 금세 메워지는 게 정상이다.

웜홀이 열린 상태를 유지하려면 ‘음의 중력’이 필요하다. 무언가가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힘을 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암흑에너지의 가설 중 하나인 팬텀에너지가 이런 조건을 만족한다. 팬텀에너지는 물질 장력이 에너지 밀도보다 강한 상태로, 물질이 서로를 끌어당겨 웜홀구멍이 닫히는 것을 막아준다. 팬텀에너지가 영화에서 등장한 ‘코어에너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에너지지만, 웜홀을 유지하는 데 미지의 에너지 후보가 될 수 있다.

또 웜홀을 이용해 시간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힘이 하나 더 필요하다. 웜홀 한쪽 입구에서 ‘시간 팽창’을 일으키는 중력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큰 물체는 주위 시공간을 뒤틀고 휘어지게 해서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한다. 실제로 지구의 중력도 시공간에 약간이나마 영향을 미친다. 인공위성을 이용한 GPS 시스템은 지구 중력이 만드는 시공간 왜곡 때문에 매일 시간이 달라진다. 그래서 시간보정을 한다. 지상에서 2만km떨어진 인공위성은 지구 중력의 영향이 덜 미치기 때문에 지구 표면보다 하루에 100만 분의 45.7초씩 시간이 빨리 간다.

김성원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는 “영화에서처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시간팽창이 일어나려면 태양 정도 중력으로도 모자란다”며 “중성자별이나 블랙홀 정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성자별의 중력은 지구 중력의 2000억 배에서 3조 배에 이른다. 이런 중성자별을 웜홀 입구에 가져다 놓으면 시공간이 급격하게 왜곡되면서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이론적으로는 24시간 이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웜홀을 이용한 시간여행의 좋은 점은 미래와 과거 양방향 여행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선 웜홀의 한쪽 입구(A)에 중성자별을 갖다 놓아 시간팽창을 일으킨다. 그런 다음 반대쪽 입구(B)에서 출발해 정상적인 시공간 길로 A 입구까지 도착한 후 다시 웜홀을 통과하면 출발하기 전보다 과거로 도착할 수 있다. 거꾸로 중성자별이 있는 쪽(A)에서 왕복여행을 시작하면 미래로 갈 수 있다. 단, 중성자별을 끌고 와 시간팽창을 일으키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영화 속 대사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타임머신을 만들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는 없다는 말이다.


웜홀 입구를 직접 움직이는 방법도 있다. 웜홀의 한쪽 입구를 아주 빠르게 움직이면 시간팽창이 일어나면서 다른 쪽 입구에 비해 시간이 지연된다. 이제 지연된 입구에서 출발해 정상적인 시공간 길로 다른 쪽 입구까지 여행한 다음, 웜홀을 통해 처음으로 돌아오면 미래로의 여행이 성립하게 된다. 거꾸로 지연되지 않은 쪽에서 출발하면 과거여행이 성립한다.

한 가지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웜홀의 안정성이다. 물질이 웜홀을 통과하면서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는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안정성까지 고려해서 설계를 한다면 웜홀은 훌륭한 시간여행 장치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양자세계에서는 웜홀이 가능하지만 거시세계에서는 웜홀이 불가능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시간여행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해가며 ‘11시’를 제작한 김현석 감독은 “배우들과 연출진이 ‘아인슈타인 시간여행을 떠나다’와 같은 과학서적을 함께 읽고 세미나를 했다”면서 “제작비와 시간의 한계 등으로 더 구체적인 연출은 못했지만, 최대한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김성원 교수는 “과학적 상상력이 SF 소설과 영화를 만들고, 다시 현실을 창조했듯,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는 과학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면서 이번 영화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가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자칫 잘못하면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지식을 대중에게 심어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11시’에서 ‘웜홀을 통해 시간여행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시간여행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영화의 핵심이다. 웜홀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처음 제안한 킵 손 교수는 시간여행에서 인과율을 깨뜨리는 일은 물리 법칙이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나 미래에서 자신을 살해하려고 하면 물리적으로 어긋나거나, 행위 뒤에도 변화가 없을 것이란 말이다. 영화에서 정 박사와 영은(김옥빈)이 미래에 머무는 15분 동안 겪는 일도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럼 미래를 바꾸는 일은 가능할까. 정 박사와 동료들은 24시간 뒤에 벌어질 끔찍한 일을 막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점점 CCTV 속 모습과 똑같이 변해간다. 미래를 본 것 때문에 현재가 점점 그 미래 속 모습처럼 변해가는 것이다. 인과율로 따지면 역시 모순이다.

하지만 현대과학이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는 것처럼, 당장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CCTV에 나오는 처참한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사람들의 공포와 이기심에 따른 인과 법칙이 만든 결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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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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