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 가수 ‘엠블렉’의 멤버 지오가 자신이 기면증을 앓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는 “노래를 듣다가 잠들 뿐만 아니라 고음 부분을 노래하다가 잠들기도 한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기면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잠에 빠지는 질환이다. 정신을 집중해서 공부나 일을 해야 하는 낮에 수시로 잠이 쏟아진다. 수업시간에 잠깐 졸았을 때 노트나 책에 알 수 없는 글자를 지렁이 그림처럼 그려 놓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학창시절에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혼나본 경험이 있다. 늘 고단한 직장인들도 회사에서 꾸벅꾸벅 존다. 그냥 졸린 것과 기면증은 어떻게 다른 걸까.
“기면증 환자가 졸린 정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잠에 마구 빠져들지요. 정상인은 리듬을 되찾으면 졸린 증상이 사라지지만, 기면증 환자는 치료받지 않으면 평생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수면의학 전문가인 신홍범 코모키수면의원 원장의 말이다. 신원장은 기면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다.
“기본적으로 뇌가 각성 상태여야 인지, 판단, 기억, 창조, 학습 같은 수준 높은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면증 환자의 뇌는 무너지려는 집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것과 같지요. 조금만 다른 데 집중하려고 하면 와르르 무너져버립니다.”
8분 만에 꿈꾸는 잠에 빠지는 기면증
기면증은 순식간에 잠드는 것이 특징이다. 낮잠 검사를 했을 때 8분 이내에 잠들면 기면증일 확률이 높다. 낮에 수시로 자는 바람에 피로가 누적되지 않고, 밤에 잠이 오게 하는 멜라토닌 호르몬도 정상인보다 늦게 분비되기 때문에 정작 밤에는 불면증상이 있다. 기면증 환자들도 늦게 잤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낮에 졸린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각성을 흰 돌, 수면을 검은 돌이라고 했을 때 색깔별로 모아 놓은 게 정상인의 수면 패턴입니다. 하지만 흰 돌, 검은 돌이 서로 섞여 있는 게 기면증 환자지요.”
기면증 환자는 얕은 잠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꿈꾸는 잠 단계인 렘(REM) 수면에 빠지기 때문에, 잠이 들 때쯤 꿈을 꾸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온 몸의 근육에서 힘이 빠진 렘 수면 단계에서, 갑자기 잠이 깨는 현상인 ‘가위눌림’을 겪기도 한다. 물론 정상인도 꿈을 꾸고 가위눌림도 겪을 수 있지만, 기면증 환자들은 빈도가 훨씬 잦다.
긴장하거나 감정적으로 흥분할 때 근육에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은 가장 잘 알려진 기면증의 특징이다. 그러나 의외로 탈력발작을 겪는 환자는 드물다. 영화나 방송에 나오는 것처럼 길을 걷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잠을 자는 환자는 상위 1% 안에 드는 극심한 경우다. 신 원장은 미디어가 만든 이런 이미지 때문에 기면증 환자들이 병원에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졸린 증상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나는 저 정도로 쓰러져 잠을 자지는 않으니까 기면증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청소년 환자들의 부모가 그렇게 말합니다. 이 때문에 대다수 환자가 사각지대에 있어요.”
기면증은 드문 질환이 아니다. 미국의 역학 조사에 따르면 인구 100만 명 가운데 기면증 환자는 500명이며 매년 환자 14명이 추가로 생기고 있다. 2000명 가운데 1명이 기면증 환자인 셈이다. 이를 우리나라에 단순 적용하면 현재 환자는 2만 5000명이고, 매년 750명의 새로운 환자가 생기고 있다. 반면 기면증 확진을 받은 환자는 2500명 정도에 불과해, 나머지 90%는 자신이 기면증인 줄도 모른채 하루하루 힘겹게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뇌 구조 바뀌는 사춘기에 발병률 높다
기면증은 뇌에서 각성을 유도하는 하이포크레틴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해서 생기는 병이다. 더 정확하게는 하이포크레틴을 만드는 뇌 시상하부의 신경세포체가 정상인보다 현격히 부족하다. 신 원장은 “‘기면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증후군이 아니라, 생물학적 원인이 분명한 ‘질환’ 입니다”라고 말했다. 1880년 프랑스의 젤리노 박사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졸음’에 ‘narcolepsy(기면증의 영어 이름)’라는 이름을 붙인 뒤, 1950년대 미국의 디멘트라는 학자가 기면증 증상이 있는 개를 순종교배시켜 연구하면서 기면증연구가 획기적으로 확대됐다.
현재 학계는 기면증을 면역세포가 자기 몸의 정상세포를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면역계 이상으로 우리 몸속의 면역세포가 하이포크레틴 세포체를 파괴하는 바람에 기면증에 걸린다는 것이다.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시기에 유럽에서 신종플루 백신을 맞은 청소년에서 기면증 발병률이 급증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백신에 이상이 있어서 면역계에 교란이 일어났지요. 면역계 이상과 기면증의 상관관계를 시사한 사건이었습니다.”
기면증은 주로 15~16세의 청소년 시기에 처음 발병한다. 바이러스성 질환인 감기나 신종플루에 걸리면 몸 안에서 항체를 만드는데, 사춘기에는 뇌 조직과 구조가 급격히 바뀌기 때문에 이런 항체가 엉뚱하게도 뇌의 특정 부위를 공격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자가면역질환이 이런 이유로 사춘기 때 처음 발병한다.
서 기면증이 함께 나타날 확률은 30%에 불과하다. 선천적으로 하이포크레틴 세포체를 절반만 갖고 태어난 일란성쌍둥이라도 졸린 증상이 없으면 기면증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쌍둥이 가운데 한 명이 사춘기 때 독감에 걸려 면역계에 이상이 생기면 세포체 수가 훨씬 줄어들면서 기면증에 걸릴 수 있다. B형 간염 환자의 가족이 모두 보균자여도, 음주나 흡연 같은 나쁜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에서만 간암으로 발전하는 것과 같다.
도파민 분비하는 약으로 정상생활 가능
사실 기면증은 건강을 꾸준히 관리해 면역력을 높이고 일정한 시간에 충분히 자는 것 외에는 예방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다만 발병 초기에는 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하이포크레틴 세포체를 다 파괴하기 전에 면역치료를 할 수 있다. 신 원장은 “스테로이드 같은 면역억제제를 썼을 때 기면증이 완치됐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병 초기에 병원을 찾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미국에서 500명의 기면증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증상이 처음 나타난 시점에서 실제로 진단받을 때까지의 기간이 평균 15년이나 걸렸다. 기면증 자체가 심한 통증이나 다른 합병증을 유발하지 않고 졸음이 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면증은 유전되지만, 환경 요인이 더 중요하다. 일란성쌍둥이에 “우리 병원에 온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발병에서 진단까지 평균 7년이 걸렸습니다.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진단 기간이 짧은 것은 최근 기면증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국내 인식도가 높아졌고, 교육열이 높아 졸음으로 성적이 떨어진 중고생이 병원을 찾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 원장은 진단을 늦게 받는 환자는 수년간 졸음 때문에 못 견디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우울증을 겪기도 하고, 잠을 자면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활동량이 부족해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하이포크레틴은 식욕을 조절하기도 해 이 호르몬이 부족한 기면증 환자는 폭식을 하는 경향이 있다. 정상인보다 과체중이 될 위험이 두 배 정도 높다. 따라서 청소년기에 갑자기 심각하게 졸린 증상이 3개월 이상 지속되면 빨리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발병한 지 수 년이 지나 확진을 받을 때면 세포체가 모두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더 이상 면역치료는 불가능하다. 현대 의학으로 기면증을 완치하는 방법은 줄기세포 외에 없지만, 그래도 약물을 이용하면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하다. 현재 기면증 치료제로 이용하는 ‘모다피닐’은 도파민 세로토닌 히스타민 같은 각성물질이 분비되도록 돕는 약물이다. 매일 약을 챙겨만 먹어도 졸리지 않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신 원장은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한 환자들은 하루하루 자기 평생 최고의 날들을 살고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