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새벽 월드컵 최종 예선 쿠웨이트전 승전보로 붉은 악마의 열정과 함성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독일월드컵이 펼쳐지는 2006년 6월, 거리는 붉은 열정과 함성으로 가득찰 것이다. 온 나라가 붉은 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 옛날 중국 황제의 복장에서 붉은 악마의 유니폼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지배했던 붉은 색의 힘은 무엇일까.
붉은 유니폼이 승리를 부른다
10년전쯤이다. 스포츠지 기자가 전화를 걸어 “붉은 색 유니폼을 입으면 오히려 불리하지 않는가”라고 물어왔다. 우리 팀 선수가 입은 붉은 색 유니폼이 상대 선수의 공격성을 자극해 도리어 불리하다는 의견이었다. 국가대표 축구팀 유니폼 색이 너무 부담스러우니 바꾸자는 의견이 제기되던 때였다. 실제로 그 직후 대표팀 유니폼이 흰색으로 잠시 바뀌었다.
현재 한국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 색깔은 붉은 색이다. 과연 스포츠 경기에서 붉은 유니폼이 유리할까. 최근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붉은 색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실렸다. 스포츠 경기에서 유니폼의 붉은 색이 승패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영국 듀햄대 러셀 힐 교수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격투기 종목의 승패와 유니폼 색깔을 분석했다. 권투, 태권도,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은 선수를 구별하기 위해 붉은 색과 파란 색 유니폼을 입힌다.
두 선수에게 할당되는 색은 임의로 결정되기 때문에 파란 색과 붉은 색 경기자의 승패는 50:50이 돼야 한다. 그러나 연구 결과 붉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의 승률이 55%로 파란 색 유니폼 선수보다 우세했다. 실력이 비슷한 선수끼리는 붉은 유니폼 선수의 승률이 60%로 올라갔다.
야생 동물 세계에서 붉은 색은 상대를 위협하는 신호다. 야생의 습성이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인간은 붉은 색을 보면 상대의 공격성을 과다하게 느끼고 기가 죽게 된다. 예를 들어 비비원숭이의 경우 다른 수컷을 위협할 때는 얼굴이 붉어진다. 공격본능과 분노로 혈압이 올라가고 얼굴 혈관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화가 나고 흥분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짝짓기 철이 됐을 때 군함새 수컷들이 붉은 가슴을 부풀려 다른 수컷을 위협하는 것도 같은 사례다. 사나운 맹수가 힘껏 벌린 입 속도 붉은 색이다. 이런 이유로 붉은 색을 보는 이는 위협을 느낀다. 승패를 겨뤄야 하는 스포츠에서도 붉은 색은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일으킬 것이다.
물론 붉은 색 유니폼을 입는다고 꼭 이기는 것은 아니다. 러셀 교수의 연구에서도 두 선수의 실력이 크게 차이나면 붉은 유니폼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붉은 색은 맛있다
붉은 색은 식욕을 자극한다. 식당의 테이블보나 냅킨, 벽지 등에 붉은 색을 사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청색이나 녹색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업들은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붉은 색을 교묘히 사용한다. 광고를 위해 음식을 촬영할 때 붉은 빛을 비춘다. ‘스팸’이라는 햄 통조림 포장에는 청색을 고기 사진의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붉은 색과 보색인 청색을 함께 대비해 서로의 색을 더 강하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파란 배경 덕에 붉은 고기는 더 붉게 느껴진다. 푸른 채소로 만든 김치가 빨개야 맛깔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붉은 색은 공격성 이외에도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예컨대 정복, 열정, 남성성, 잔인성, 식욕, 욕망 등이 그것이다. 붉은 색에 관한 이와 같은 인문학적 통찰은 최근 밝혀지고 있는 뇌과학의 발견과도 맞아 떨어지는 구석이 있다. 우리 뇌의 측핵이라는 곳은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 성욕, 마약, 식욕, 탐욕 등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별도의 신경회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기돼 홍조를 띤 여인의 얼굴, 붉은 입술, 홍등가의 붉은 불빛과 같이 성적 흥분을 야기하는 빨강이라는 신호는 이 신경회로를 활성화하는 자극일 것이다. 뇌의 작용이 대개 그렇듯이 이 회로가 식욕과 성욕을 구분해서 정보를 처리하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성욕의 신경회로를 활성화하는 붉은 색이 더불어 식욕도 왕성하게 할 수가 있다.
아직 붉은 색의 식욕증진 효과에 대한 신경학적 원리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빨강이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라는 것은 눈치 빠른 디자이너나 식당주는 모두 아는 사실이다. 식당의 간판과 음식 포장재에 유독 빨강이 많다.
중국사람은 맛으로 먹고 일본사람은 눈으로 먹으며 우리는 배로 먹는다고 했다. 이 말에는 음식의 맛이 미각, 시각, 후각 등 모든 감각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빨강의 미각적 효과에 더 관심을 기울여 볼만하다.
빨강 색깔의 왕
색깔어의 발생 순서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 말은 어느 문화권이든 가장 먼저 생겨나는 단어는 검정과 흰색 그리고 붉은 색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붉은 색이 색 중의 색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붉은 색이 색 중의 색으로 나타나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뇌 손상으로 잠시 시각을 잃었다 회복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흐릿한 흑백의 상이고 점차 회복되면서 붉은 색을 보게 된다. 그 밖의 색들은 거의 회복될 때쯤 돼야 지각할 수 있다.
어떤 사물의 성질을 색깔과 연관짓는 일은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고대 사람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고였다. 예컨대 태양이 붉다는 사실에서 붉은 색에 태양의 정기가 스며 있고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유추가 많은 문화권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붉은 색이 다른 색보다 눈에 잘 들어오고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망막에는 단파장, 중파장, 장파장의 빛에 각기 민감한 세 종류의 감광세포(간상체)가 있다. 중파장에 민감한 감광세포는 낮에 장파장의 빛, 즉 붉은 빛에 대해서도 중복해서 반응한다. 즉 붉은 색을 볼 때는 파란색을 볼 때보다 거의 2배 가까운 감광세포들이 활성화되는 셈이다. 그래서 붉은 색은 청색에 비해 눈에 잘 띈다.
또 장파장인 붉은 색은 다른 색에 비해 초점이 망막보다 조금 뒤쪽에 맺힌다. 붉은 색의 사물을 정확히 보려면 초점이 망막 위에 맺히도록 수정체를 조금 두껍게 만들 필요가 있다. 수정체를 두껍게 하기 위해서는 수정체를 조절하는 눈 근육이 더욱 긴장을 해야 하고 오랜 시간 이런 상태로 있게 되면 근육이 피로해질 것이다.
작위까지 받은 영국의 저명한 색채학자 페버 비렌은 피를 많이 봐야 하는 수술환경에서 의사가 시각적 부담을 덜기 위해 붉은 색의 보색인 녹색 가운을 입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붉은 색을 오래 보면 어지러움을 느끼고 심하면 구토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붉은 색을 오래 본다고 실제로 어지러움과 구토에 이르는 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녹색 가운에 피가 묻으면 짙은 갈색으로 보여 시각적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레드 우울증을 깨우다
정신병원이나 대학 심리학과에서 사이코드라마를 공연할 때 우울증이 심한 환자에게는 붉은 색 조명을 비춘다. 이렇게 하면 각종 감각이 둔해져 반응이 더딘 환자의 민감성이 증가한다. 동공은 수축되고 근육이 긴장하며 호흡이 빨라진다. 반응이 없던 신체가 조금씩 움직이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읽을 수가 있다. 붉은 빛이 과연 어떤 마술을 부린 것일까. 감각 중에 공감각이 있다. 하나의 자극을 받으면 동시에 다른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예컨대 붉은 색을 보고 따뜻하다는 온도감을 느끼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거에는 공감각이 학습 효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뇌 변연계의 한 부위, 예컨대 여러 감각기의 통로들이 모이는 해마 같은 곳에서 한 감각기의 정보 일부가 다른 감각기로 흘러 들어가 공감각이 생긴다는 의견이 우세해지고 있다.
붉은 색은 다른 색보다 많은 감광세포를 활성화시킨다. 즉 붉은 색은 다른 색보다 강한 자극이다. 강한 자극의 속성이 공감각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른 감각통로에 영향을 주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우울증 환자는 각성 수준이 낮다. 잠을 자거나 멍한 상황과 비슷해 감각이 둔해져 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모든 것이 귀찮고 주변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상태의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자극을 준다. 흔들거나 말을 거는 방식으로. 같은 맥락에서 붉은 색은 다른 어떤 색보다도 탁월한 각성효과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두 배 가까운 감광세포를 흔들고 말을 걸고 있으니.
빨강 색을 좋아하는 이유
스위스 색채심리학자 젠스는 일조량이 많은 곳에 사는 사람은 붉은 색을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추운 곳에 살던 유럽인이 일조량이 많은 남쪽으로 이동하면 강한 태양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의 홍채에 있는 멜라닌 색소가 늘어나 눈동자 색이 짙어진다. 젠스는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이 적시(red-sighted)가 되며 이들은 장파장의 빛, 즉 붉은 빛을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라틴 족들은 붉은 색을 좋아한다. 반면 북유럽처럼 춥고 일조량이 적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녹시화돼 있다. 이들은 청색이나 녹색을 선호한다.
스위스의 색채심리학자 뤼셔는 병원 진단용으로 ‘색채 심리테스트’를 개발했다. 이 테스트는 8개의 색채 칩을 늘어놓고 아주 짧은 시간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8번을 반복하면 8개 색의 순서가 정해진다. 8개 색의 순서는 피검사자의 정신적 피로도를 알려주는 지표다. 붉은 색은 정복, 열정, 남성성, 잔인성, 식욕, 욕망 등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테스트에서 붉은 색을 회피하는 것은 사회, 경제적 자신감의 상실이나 성욕의 감퇴, 육체적 또는 심리적 피로, 심장 이상 등의 징후로 해석한다.
붉은 색을 첫번째로 선호한 사람은 의욕이 넘치고 강렬한 자극을 경험하고 싶으며 과장되고 외향적인 행동욕구를 갖고 있는 상태로 진단된다. 이 테스트는 나름대로 진단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진단 해석의 종류만도 무려 320개가 넘을 정도다. 독일어권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의 강물 속에는 과학의 모습을 한 가짜과학도 함께 흘러 다닌다. 붉은 색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가짜과학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중한 자세가 중요하지만, 확실한 경험 자료가 부족하다고 일관되게 관찰되는 현상들을 가벼이 보는 것도 좋지는 않다. 물론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