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무형문화유산 되다!
11, 12월이 되면 어머니의 전화기가 바빠진다. 윗집 하늘이네 아는 사람의 사촌이 농약을 안 치고 배추 농사를 지었으니 이번에 우리집 배추도 50포기 빼달라거나, 앞동에 사는 하얀이네 시골집에서 고추를 햇볕에 잘 말려서 색이 예쁘게 뽑혔다거나.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던 어머니는 최선의 재료를 선별해 주문한다. 밤늦게까지 수십 포기나 되는 배추를 씻고 다듬고 소금을 쳐 채반 위에 올리고 꼬박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다음날 윗집 아랫집 할 것 없이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으로 몰려온다.
씻고 썰고 다듬고 무치고…. 아주머니들의 왁자지껄한 수다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문을 닫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가족을 부른다.
“주황아, 와서 김치 간 좀 봐라!”
고춧가루에 파와 무, 마늘, 생강, 젓갈을 녹말풀과 섞어 만든 속(양념)과 배추를 버무리는데, 배추에서도 유난히 노란 가운데 부분은 따로 양념해 빼둔다. 결을 따라 길쭉하게 찢은 배추잎을 돌돌말아 간을 본 뒤에는 아무래도 시장에 심부름을 가야할 듯하다. 저녁에 갓 담근 새 김치는 누가 뭐래도 생굴과 돼지고기를 삶은 수육을 함께 먹어야 한다. 일단은 우리 집 김장을 담그는 데 도와주신 이웃집 아주머니들께 한 포기씩 들려 보낸 뒤에 말이다.
다 담근 김치를 곧장 김치냉장고에 넣지는 않는다. 하루 묵힌 다음에 넣는다. 어머니 말이 ‘이래야 김치가 맛이 잘 든다’나. 어쨌든 김치냉장고 옆에 가득 쌓인 김치 용기를 보면 뿌듯하다. 김치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김치볶음밥과 김치찌개는 소중하니까.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던 김장은 그 다음 날도 계속된다. 다행히(?) 오늘은 윗집이다. 아침에 올라간 어머니는 돌아올 때 어제 아주머니께 들려 보냈던 것처럼, 새로운 김치 한 포기를 들고 오셨다. 저녁상에 그 김치를 올리며 은근히 한 마디 건네신다. “하늘이 엄마는 멸치젓을 아주 국그릇으로 퍼넣더라. 우리 집 김장이 훨씬 맛있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반복되는 아파트 김장 품앗이는 아랫집 노랑이네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지금이야 김치냉장고가 있어서 비교적 간략하게(?) 끝났지만,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어야 했던 옛날은 아버지까지 동원되는 거대한 행사였다고 한다. 지금처럼 한 가족이 30~50포기를 담그는 것이 아니라 동원되는 배추 포기 수가 백 단위였다고도 하고. 김장은 1년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1년을 준비하는 축제였다. 이젠 김장의 의미가 옛날만큼 크진 않지만, 그럼에도 ‘김장’이란 단어에는 여전히 가족과 이웃을 묶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
10월 23일,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심사소위원회는 한국의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넣도록 등재 권고했다. 12월 2~7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리는 제8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24개국의 투표를 통해 최종결정된다. 지금까지 등재 권고를 받은 뒤 실패한 사례가 없는데다, 3월에 있었던 심사에서 베스트 5에 뽑혔기 때문에 무난히 등재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김치’가 아닌 ‘김장 문화’가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다는 점이다. ‘김치’라는 음식이 아닌 ‘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다. 2년을 발효시켜 만드는 젓갈, 수 년을 묵혀 간수를 제거해 쓴 맛을 줄이는 소금, 1년을 정성들여 기른 뒤 햇볕에 말려 곱게 빻는 고춧가루 등 김치를 담그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온가족이 1년을 먹을 김치를 만들어야 하기에 가족과 이웃집까지 동원된다. 유네스코는 이 점에 주목했다. 유네스코에 등록한 신청서의 영문명도 ‘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김장: 김치를 만들고 나누는 문화)’이다.
우리나라에 김치가 전해진 과정을 보면 유네스코가 ‘김치’가 아닌 ‘김장’에 주목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지금 먹는 빨간 배추김치의 역사는 400년이 채 안됐다. 그러나 김장은 그 이전부터 있었고, 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인의 겨울은 물론 1년을 책임지는 거대한 축제였다. 재료와 방법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만들고 나눈다’라는 김장의 기본 취지는 변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대로, 새로운 재료가 들어오면 수백 년간 누적된 경험을 응용해 새로운 김치와 문화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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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1 김치를 만들고 나누는 문화 김장
PART2 물 건너 온 한국 음식 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