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초원의 늦여름은 풍요로웠다. 멀리서 내려다보면 시선이 머물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는 가난한 초원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초원 안에 몸을 맡기면 하루에 한 뼘씩 쉬지 않고 자라나는 대지의 풍요로움에 이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풍요를 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양과 염소, 야크와 말, 그리고 소.

오래된 대지는 선이 부드러웠다. 어디로 시선을 던져도 온화한 파도 같은 굴곡뿐이었다. 꽤 높은 언덕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눈에 거슬리게 삐죽 튀어나온 선은 하나도 없었다. 완만하게 서서히 높아지는 언덕을 올라 이제 내리막이 나타나겠다 싶을 즈음이면 새로운 오르막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결국 꽤 높은 언덕 위에 올라서게 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지레 겁먹게 할 만큼 위압적인 봉우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곳 사람들에게 그 너그러움은 곧 신의 마음이었다. 하나같이 만만한 언덕 맨 꼭
대기에는 어김없이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초원은 일렁이는 신성한 바다였다. 전쟁이 초원을 뒤흔들기 전까지는.

초원에 휴전이 선포되었다.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날아온 전투기들이 성스러운 하늘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침범하곤 했다. 대지에는 폭탄 구덩이가 푹푹 패이고 놀란 가축들은 무리를 이탈해 목적도 없이 한참을 내달리곤 했다. 그 잔인했던 한 달여가 지나고, 전폭기가 뜨지 않는 평화의 시간이 돌아왔다.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겨우겨우 얻어낸 결코 길지 않은 유예기간이었다.

차라리 가을이 왔다는 소식이라면 모를까, 협상을 위한 휴전 소식 따위는 전해질 길이 없는 태고의 초원 위, 국경을 넘어온 차 한 대가 그 일대에 나 있는 유일한 포장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폭격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은 민간국제조사단 차량이었다. 열흘간의 휴전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지금 당장 협정이 파기되고 전폭기 편대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날아와 초원 어딘가를 불바다로 만들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위태로운 하늘. 윤희나는 손에 든 보고서 초안을 흘끗 내려다 보았다.

몇 개 있지도 않았지만 도시라고 할 만한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음. 유목민 게르까지 공격목표가 된 흔적이 있음. A국이 군용 보급차량으로 추정되는 차량이라고 밝힌 폭격목표 중 상당수가 현지 유목민들이 천막을 옮길 때 쓰는 트럭으로 보임. 말이나 염소 떼에 대해서도 저공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한 흔적이 있음.

그 요약 보고를 전해 듣자마자 본부에서는 곧장 이런 지시를 내렸다.

실제 휴전 기간이 얼마나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 즉시 철수할 것. 이동 중에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즉시 차량에서 나와 최대한 먼 곳에서 몸을 숨길 것.

윤희나는 그런 지시가 내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움직이는 건 뭐든 공격목표가 되는 상황이니, 유엔 깃발을 차 천장 위에 달았든 무슨 표시를 했든 일단 차에 타고 있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탄 차는 국경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조사관 중 하나인 라베아 유수프의 요청 때문이었다.

“네? 누굴 만나러 간다고요? 천재소년이요?”

전날 밤, 라베아 유수프 박사의 말을 들은 윤희나가 큰 소리로 물었다.

“하루면 돼요. 윤희나 씨, 일정을 그 이상 지연시킬 생각은 저도 물론 없어요. 다만 경로를 조금만 수정하자는 거예요. 특별히 봐야 할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요.”

라베아 유수프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윤희나는 숨도 쉬지 않고 반문했다.

“특별히 봐야 할 게 없다면요? 그 아이가 더 특별하다는 건가요? 다른 아이들은요? 폭격 피해를 당한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데요? 그 수많은 아이들보다 그쪽 기관에서 관리하고 있던 영재아동 하나가 더 특별하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으세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조사 일정이 다 취소되고, 어차피 지금 우리끼리 새 일정을 짜야 하니까 꺼낸 말이에요. 그냥 최단경로로 국경을 향해 달려갈 건 아니잖아요. 돌아가는 길에도 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보고 가야 될 거 아니에요. 다들 다른 의견이 없으시니 철수 경로를 그쪽으로 변경한다고 해서 뭐가 크게 잘못되는 건 아니잖아요.”

윤희나는 끝내 수긍할 수 없었지만, 결국 조사단은 라베아 유수프 박사의 말대로 어느 천재소년이 산다는 작은 도시 주변의 어느 목초지를 향해 벌써 몇 시간째 달려가고 있었다. 조사단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유수프 박사의 말과 같았다. 어차피 어딘가를 보고 가야 한다면 누군가 목적이 있는 사람의 의견을 따르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원에서 무슨 수로 애를 찾아.통신망도 다 차단된 마당에.’ 그러나 폐허가 된 도시에 차가 도착하자 유수프 박사는 현지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능숙하게 소년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물론 유수프 박사는 현지인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서구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복잡한 대중교통 노선은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지만, 난로에 불 지피는 일은 절대 못할 것 같은, 딱 도시형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 순간 그렇게나 능숙해 보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아이를 꼭 찾아내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 적극적인 모습에 윤희나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유수프 박사가 말했다.

“학교가 터만 남은 지경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애는 방학 내내 부모님 있는 곳에 가있었나 봐요.”

“다행히요?”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일찍 대피를 한 것 같아요. 지금 보이는 사람들은 휴전 기간이 되니까 잠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고 나온 사람들인 것 같고요. 학교 관계자 도움으로 우리가 찾는 아이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을 만났는데, 안내해 주겠대요.”

“위치를 안대요?”

“유목이라고는 해도 진짜 아무 초원에나 가는 건 아니래요. 그 집 어른이 늘 다니던 데를 안다네요.”

윤희나는 라베아 유수프와 함께 다시 차에 올랐다. 조사단장 하마드 사마니의 요청 때문이었다. 제일 반대했던 윤희나가 직접 동행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조사관 세 명이 그곳에 남아 피해 주민들의 진술을 채록하기로 했다. 차량 연료를 구하는 일도 함께였다. 주유소 체계가 거의 망가진 상태라 마을에서 직접 연료를 수급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차는 50분 정도를 더 달렸다. 그렇게 먼 곳은 아니라고 했지만 도로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서 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멀미가 났다. 늦여름 비가 내린 비포장도로 곳곳에는 차가 지나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만큼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개울물이 불어나 정말로 물에 떠가는 듯 위태롭게 자갈바닥을 가까스로 헤쳐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신이 머무는 게 분명한 어느 완만한 언덕 아래, 작은 꽃들이 만발한 어느 목초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염소 떼와 양 무리를 만났다. 전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늦여름의 한없는 풍요 위에서였다.

윤희나는 열 살쯤 된 소년이 말을 타고 가축을 몰고 오는 모습을 보았다. 안장도 없이 두 다리로만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사뭇 초원의 아이다웠다.

“저 아이일까요?”

통역이 먼저 차에서 내려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모두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손된 게르가 보였다. 둥근 모양이어야 할 하얀색 천막이 어딘지 애처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동생이라네요.” 유수프 박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동생은 건강한 것 같은데.”

목소리에서 근심이 느껴졌다. 동생은 괜찮은데 이 아이는 왜 게르에 있을까 하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유수프 박사와 통역의 뒤를 따라 허리를 숙여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윤희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막 안쪽에 놓인 세 개의 침대 중 하나에 유수프 박사가 찾고 있던 문제의 천재소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걸터앉아 있었는데, 아이의 머리에 피 묻은 붕대가 감겨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라베아 유수프를 대신해 통역이 먼저 아이의 부모에게 아이의 상태를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부모의 대답을 우리에게 전했다.

“머리를 다친 것 같지는 않다네요. 충격을 받은 것 같긴 한데, 붕대는 귀 때문에 감은 거랍니다. 40미터 거리에서 폭탄이 터졌는데 아무래도 청력을 잃은 것 같다고요.”

유수프 박사는 근심 어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유수프 박사를 바라보는 부모들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애절해 보였다.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고, 또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윤희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갔다. 부모는 아이를 맡기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함께 두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아이였으니까. 윤희나는 부모의 눈빛이며 말투, 손짓에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메시아만큼 소중했던 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선물.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윤희나는 아이에 관한 라베아 유수프의 설명을 떠올렸다. 그런 천재가, 초원의 풀처럼 홀로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띈 건 행운이라고 했다. 수학적인 재능이 남다른 아이이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자유로운 발상으로 의외의 문제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였다. 선행학습으로 만들어진 가짜 영재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 놔뒀어도 결국 언젠가는 스스로 존재를 드러냈을 진짜 천재라는, 본인 말과 다소 모순되는 설명이 덧붙었다.

“타임머신을 만드는 게 꿈이래요. 농담이었지만, 아이를 평가했던 수학자 한 분은 아이한테 푹 빠져서 이 아이라면 진짜로 그런 걸 만들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행복한 얼굴로요.”

하지만 유수프 박사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유수프 박사가 속한 기관이 그런 영재들의 장래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 역할은 어디까지나 교육지원 사업이나 연락망 관리 정도에 국한되어 있었다. 아이를 빼돌리는 일 같은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자기 기관 하나만의 대표가 아니라 50여 개의 아동기구를 대표해서 파견된 상태에서는 더 그랬다. 그런 행위 자체가 휴전협정 위반으로 간주될지도 몰랐다.

다른 조사관들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라베아 유수프와 아이의 부모가 통역을 끼고 열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윤희나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똑똑해 보이는 아이였다. 강한 내면의 힘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청력을 잃은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금 어른들이 느끼는 긴박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빛이 있고 눈에는 불이 있었다.’

그런 표현을 떠올렸다. 그 옛날 초원에서 벌어지곤 했던 잔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묘사할 때 쓰던 옛사람들의 표현이었다. 적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반드시 귀하게 길러져서 결국 그 모든 사람을 이끌게 되는 아이들.

어른들의 대화가 길어졌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베아 유수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철수했다가 곧 다시 돌아올게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의 동생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저 평범한 동생보다 형의 일생이 더 가치 있는 게 맞을까.’ 그런데 동생이 이미 그 모호한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윤희나는 그만 당황스러워지고 말았다. 쭈뼛쭈뼛 구석에 서 있던 동생이 윤희나에게 다가와 무슨 말인가를 건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이의 말투와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형을 데려가 주세요. 형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요. 전쟁이 아니었어도 똑같은 부탁을 했을 거예요.’

대화가 격해지면서 어른들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윤희나와 아이들만이 천막 안에 남겨졌다. 말이 통할 리 없었지만 윤희나는 밖에서 하는 말이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또 밖에서 하는 말이 안에서도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어차피 안 통하는 영어보다 모국어가 차라리 익숙하게 들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말을 이어갔다.

잠시 후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동생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윤희나는 남겨진 아이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종이를 꺼내 뭔가를 썼다. 낯선 글자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아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아이가 가진 호기심의 힘이었다. 그저 호기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온 초원을 빛나게 만드는 아이. 현명해 보이는 아이의 부모는,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건 전혀 모르고도 아이의 존재감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벅찬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데.

“타임머신을 만들 거라고 했지?”

윤희나는 입으로 소리를 내 가며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획 하나하나가 그어지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짓으로 이런 말을 했다. “이거 나 가져도 돼요?” 윤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종이에 똑같이 썼다. “좋아, 대신 이 다음에 커서 타임머신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나한테도 알려줘. 어떻게 알려주면 좋을까. 그래, 지금이 오후 1시 12분이니까, 정확히 1시 15분에 게르 문을 똑똑 두드리면 되겠다.”

의미를 생각하고 쓴 말은 아니었다. 단지 아이가 충분히 관찰할 수 있도록 일부러 길게 늘여 쓴 것뿐이었다. 종이를 곱게 찢어서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글씨를 들여다보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지금 말해 봐야 어차피 알아들을 수 없을 테니, 나중에 어른들이 오면 그 종이에 적힌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아이가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허공에 손가락으로 따라 적는 동안, 문 쪽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윤희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네”하고 대답하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어젖혔다.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염소가 두드렸나’ 하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와 무심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시 15분이었다.

윤희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이없는 생각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윤희나는 아이가 손에 든 종이를 넘겨받아 조금 전에 자기가 쓴 글 아래에 이런 글을 덧붙였다.

“방금 너였니? 어떻게 한 거야? 진짜 너 맞아? 그럼 1시 18분에 다시 해 볼래? 이번에는 이렇게. 딴 따단 따 따다다단 따단.”

윤희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1시 18분이 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갑자기 느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잠시 후 별 이변 없이 17분 50초가 오더니, 어김없이 그로부터 10초가 더 흘렀다.

똑 또독 또 또도도독 또독.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희나는 얼른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홱 열어젖혔다. 역시나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물론 가축들이나 새들도 마찬가지였다.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라베아 유수프가 그쪽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윤희나는 게르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글씨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한참 뒤에 어른들이 돌아왔다. 적어도 20분은 더 지난 뒤였다. 라베아 유수프가 그 긴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 예상대로 아이를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요. 단호하게 거절했죠. 잘못했다가는 이 나라 아이들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라고. 설득은 안 된 것 같은데, 방법이 없다고 했어요.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그 말을 전해 듣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의 엄마가 윤희나에게 다가와 팔을 붙들고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라베아 유수프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윤희나가 그렇게 한참이나 붙들려 있는 사이, 유수프 박사가 천막 밖으로 나가 차 쪽으로 갔다 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윤희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하마드 사마니 씨가 연락을 했어요. 휴전협정이 깨졌대요. 12시간 안에 철수해야 된대요. 움직여야 돼요. 지금 당장.”

윤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와 가족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비장한 기운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아이의 엄마가 손을 놓더니 아이 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흐느꼈다. 두 소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어른들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적막이 흘렀다. 시간이 멎은 듯했다.

윤희나가 갑자기 라베아 유수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데려가요.”

유수프 박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아이를 데려가요. 지금 당장. 다음 기회는 없어요. 알잖아요.”

유수프 박사의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큰비가 내리기 전 초원의 하늘 같은 표정이었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아이의 부모가 숨죽이고 그 순간을 함께했다. 윤희나가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설명은 바라지 마세요. 하지만 이게 맞아요. 역할이 바뀐 건 알아요. 오늘은 당신이 이런 말을 하고 제가 그러면 안 된다고 설득하게 돼 있죠. 하지만 제 말이 맞아요. 뒤는 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수습할지. 그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해요. 지금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해요. 우리끼리.”

초원은 넓고 국경은 멀었다. 다음날 오전, 울퉁불퉁한 초원의 비포장 도로 위를 9인승 SUV 한 대가 달려가고 있었다. 멀리서 먹구름이 하늘을 반쯤 덮었다. 해가 뜨자 속도가 약간 빨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국경까지는 한참이었다. 길은 좌우로도 위아래로도 구불구불하기만 했다. 덜컹거리는 차 안으로 급박한 국제정세를 알리는 단어들이 전파에 실려 날아들었다. “유엔 특사 면담도 거절당했대요.” 그렇게 평화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번 마을에서도 연료 구하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통역이 운전기사의 말을 전했다. 급하게 마을을 떠나느라 연료를 충분히 구할 수가 없었다. 모자라는 부분은 가는 길에 다른 도시에 들러 해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은 사정이 더 좋지 않았다. 어차피 폐허이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소식이 느렸는지 판단이 느렸는지 미리 공습에 대비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 휴전이 완전히 파기되면 국경을 차로 가로지르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달리는 데까지 달려 보고 그 다음은 차를 버리고 걸어가는 수밖에.” 조사단장 하마드 사마니의 말이었다. 라베아 유수프가 대꾸했다. “그래도 차가 나을 텐데요. 초원을 헤쳐나간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거예요. 거리도 상상 이상으로 멀 거고.”

다시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윤희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일에 관해 해명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물론 중요했다. 전쟁도 중요하고 국경을 넘는 일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나 중요한 게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 접힌 순간을 목격한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착각이었겠지. 그 소리를 들은 건 나밖에 없잖아. 심지어 애도 못 들었어. 목격자가 아무도 없다고.’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행기가 보였다. 아이와 이 나라 사람들에게 비행기는 무조건 적기였다. 제공권이 완전히 넘어가고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행기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그대로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못 봤을까요?” 윤희나가 묻자 조사단장이 말했다. “봤을 거야. 정찰기겠지. 아직 약속한 시간이 좀 있으니까 공격을 안 한 거야. 아무튼 우리 위치는 알고 있을 거야. 이런 초원에서라면 절대 놓칠 리가 없겠지. 여유 시간이 없어졌어. 정시에 국경을 넘어야 돼.”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차는 그저 차일 뿐, 평화가 깨지고 나면 중립국 깃발 따위 아무 소용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채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제 곧 바닥이에요.” 연료탱크 이야기였다. 차가 곧 멈춰 설 거라는 말이었다.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윤희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차 안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살피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잘 될 리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자연의 섭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데려오지 말걸. 그냥 내버려둘걸. 왜 욕심을 냈을까. 내 일도 아닌데.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저히 다른 판단은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인데. 시간을 접을 아이인데. 아예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아이를 본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을 접은 아이. 그 순간을 떠올렸다. 시간이 접혀 있었다. 먼 미래에 타임머신을 만들 아이. 그래서 자신이 종이 위에 써놓은 그 시간에 두 번이나 초원 위 게르로 찾아와 자기 존재를 알린 아이. 그게 환청이 아니라면, 정말로 일어났
던 일이 맞다면, 아이는 결국 무사할 것이다. 잘 자라서 언젠가 시간을 접는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래, 나는 그걸 믿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윤희나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웃을 수도 있구나.’ 그리고 아이에게 손짓으로, 조금 전에 게르에서 준 종이쪽지를 잠시만 보여 달라고 했다. 아이도 이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가방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럴 줄 알았어. 그 종이는 안 버리고 계속 간직하고 있을 줄 알았어. 당연히 지금도 갖고 있을 거라고. 다시 그 시간에 나타나 노크를 하게 될 때까지 쭉. 그러니 바로 저 종이에 메시지를 남겨야 되는 거야. 꼭 저 종이에.’

윤희나는 볼펜을 꺼내 글씨를 썼다. 절대 흐릿하게 보이거나 지워져서는 안 되는 글자들이었다. “저 앞에 있는 갈림길, 저기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 통역에게 물었다. 통역은 운전기사가 말하는 대로 그 갈림길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윤희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번역해서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전날처럼 소리를 내어 말하며 이런 글을 그 아래에 덧붙였다. “이 위치로 기름을 가져다줄래? 두 시간 정도 달릴 정도면 충분할 거야. 마지막 부탁이야. 시간은 다음날…….”

종이를 접어 아이의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가만히 시간의 결을 느꼈다. 시간의 바람. 대체로 순풍, 그리고 이따금 불어오는 역풍.

비행기 두 대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엔진 소리가 한결 요란했다. 아까보다 훨씬 난폭한 소리였다. 시간이 지나면, 약속한 휴전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나면 이쪽으로 더 가까이, 이빨을 드러내고 저공비행을 하게 될 비행기였다.

늦여름 초원은 풍요로웠고 곳곳에 폭탄구멍이 뚫려 있었다. 에너지를 잃어가는 불쌍한 차가 초원 위에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가상의 선인 국경을 향해 힘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원래는 볼품없는 작은 마을이 서 있던, 지금은 그나마도 폐허가 된 갈림길.

갈림길에 다가섰다. 눈 좋은 현지인 운전기사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유목민의 후예답게 멀리서부터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속도가 느려졌다. 갈림길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갈림길 옆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통으로 다가갔다.

그럴 리 없지만, 하늘에서 전폭기 두 대가 움찔하는 듯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운전기사가 통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 안도의 외침이었다.

눈을 감고 아이의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고마워. 이제 다 잘 될 거야.”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몇 개의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고도 책임질 일이 한참 더 남아 있었다. 아무튼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던 날, 윤희나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노크 소리에 방금 닫은 문을 다시 한 번 열어젖혀야 했다. 문밖에는, 혼자서는 들 수조차 없을 만큼 커다란 꽃바구니가 초원의 향기를 잔뜩 머금은 채 놓여 있었다. 얼른 밖으로 뛰쳐나가기는 했으나, 역시나 집 근처 어디를 살펴봐도 그걸 들고 온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와 꽃바구니를 들여다보니 이런 글귀가 적혀 있는 카드가 꽂혀 있었다.

“딴 따단 따 따다다단 따단. 저는 잘 지내요. 다 잘 될 거예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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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배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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