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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게임 좋아하면 범죄자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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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었다. 최근에 벌어졌던 몇몇 참극과 폭력적인 게임 사이의 연관성이 제기되면서 이런 주장은 더 힘을 받고 있는 추세다. 특히 1999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컬럼비아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2007년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 등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흔히 쓰이곤 한다.

이 사건의 용의자들은 공통적으로 ‘DOOM’, ‘카운터 스트라이크’ 같은 인기 FPS(1인칭슈팅)게임을 즐겼다. 이는 게임이 폭력성을 유발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는 용의자들의 모습과 그들이 실제로 총기를 난사하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이러한 언론 보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한 청소년이 부모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친인척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를 보자. 살해 동기는 친인척이 평소 자신의 부모를 무시했기 때문이었지만, 기사에서는 범인이 평소 폭력 게임을 즐겼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 둘 사이의 인과적 관계가 확실한지는 기사에 언급되지 않는다. 관련 학문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근거 없는 낭설이 세상에 널리 퍼진 뒤에는 나중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수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면 따라할까?
어떤 두 가지 현상 사이에 상관관계 이상의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이기는 결코 쉽지 않다. 특히 폭력성과 같이 연구자가 잘 통제된 실험을 통해 인과성을 입증하기 곤란한 대상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한계가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게임이 폭력을 유발한다는 데는 근거가 있어 보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게임이 공격적인 행동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많이 발표됐다. 그 기원은 20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도 동물이나 인간이 다른 이들의 행동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학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관찰학습’이라 부른다.

이것을 설명하는 ‘사회인지이론’을 내놓아 유명해진 캐나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관찰학습이 공격적 행동을 학습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했던 유명한 실험이 ‘보보인형 실험’이다. 보보인형은 오뚝이처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인형으로 푹신한 재질로 돼 있다. 연구팀은 3~5세의 아이들을 그룹으로 나눠 어른이 보보인형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 보보인형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 뒤 아이들이 공격적 행동을 얼마나 따라하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인형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한 어른의 행동을 관찰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보다 인형에게 더 공격적이었다.

반두라는 공격적 행동을 단지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을 학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이유로 그는 지속적으로 폭력적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이는 “TV 덕분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안방에 편안히 앉아서도 흉악한 행동의 전모를 학습할 기회를 무제한적으로 갖게 됐다”라는 그의 발언에 잘 반영돼 있다.






반두라의 사회인지이론은 후대의 관련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연구자가 미국의 심리학자 크레이그 앤더슨이다. 앤더슨과 그의 동료들은 공격행동을 설명하는 모형인 ‘일반적 정서-공격성 모형(General Affection Aggressive Model)’을 제안했다. 이 모형은 공격적인 행동이 어떠 한 심리적 기제를 통해 생기는지 설명한다. 특히 미디어가 공격적 행동을 어떻게 유발하는지 설명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2001년 앤더슨과 동료 심리학자들이 그동안 나온 게임과 폭력 관련 연구를 종합해 정리한 논문은 구글 학술검색 기준으로 이미 1000회 이상 인용됐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이 연구가 발표된 이후 수년 동안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관련 연구가 계속 출간되면서, 게임이 공격성을 높인다는 주장은 한층 지지를 받는 듯했다.





미국 법원, 게임의 손을 들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이 극적으로 뒤집어졌다. 2005년에 있었던 미국 법원의 판결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게임 비판론자들이 폭력적인 게임의 판매를 금지하기 위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법원은 원고가 제출한, 게임이 폭력을 유발한다는 증거의 효력이 불충 분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러한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다른 심리학자 들이 기여했다는 점이다. 심리학자인 골드스타인과 윌리암스는 법원에서 게임 비판론자들이 제출한 증거를 학문적으로 검토했다. 이들은 앤더슨의 연구가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법원이 게임 비판론자들의 주장을 기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모든 심리학자가 게임 비판론자들의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최근에 있었던 폭력적 게임의 판매 제한에 대한 다른 소송 또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긴 법정 싸움 끝에 2011년, 대법원 판결을 끝으로 게임 비판론자의 패배로 마무리된 것이다. 이는 게임이 폭력을 유발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인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00년대 중반에는 과거 이뤄진 게임과 폭력성 연구에 반대하는 연구들 이 속속 논문으로 나왔다. 이들은 앤더슨의 연구에 사용된 방법론을 주로 비판했다. 앞서 언급한 두 명의 심리학자 외에 임상심리학자인 크리스토퍼 퍼거슨도 앤더슨의 선행 연구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퍼거슨은 앤더슨의 연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앤더슨은 그동안의 연구를 종합하기 위해 메타분석(관련 연구를 엮어서 종합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때 쓰는 방법) 방법론을 사용했는데, 퍼거슨은 여기서 문제점을 짚어냈다. ‘서랍 문제’와 ‘출간 편향’이다.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연구들만 학술지에 주로 실리고, 그렇지 않은 연구들은 실리지 않은 채 연구자의 서랍 속에 처박혀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문제를 뜻한다.

퍼거슨의 주장에 따르면, 게임이 폭력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리는 연구가 학술지에 실리기 더 쉽다. 반대로 게임이 폭력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연구는 둘 사이에 의미 있는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학술지에 실린 관련 연구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쪽으로 편향돼 있고, 이렇게 편향된 연구를 종합하는 메타분석은 역시 편향적인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퍼거슨처럼 앤더슨의 연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선행연구의 결과를 불신하고 있다.




폭력과 공격적 행동도 달라
게임이 폭력을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대개 관련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들만 언급하고, 그런 연구가 대세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지금까지 이뤄진 연구를 살펴보면 심리학자들의 입장이 심하게 엇갈리고 있으며, 아직 합의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게임이 공격적 행동을 유발한다는 과거 연구의 결론을 반박하는 연구가 많다.

설령 게임이 공격적 행동을 유발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연구자들이 쓰는 ‘공격적 행동’이라는 용어와 언론에서 말하는 ‘폭력성’이라는 용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흔히 게임이 폭력을 유발한다고 할 때 말하는 ‘폭력’이란 물리적 폭력을 뜻한다. 언론 보도에서 게임과 흉악 범죄를 결부시킬 때도 아마 이러한 종류의 폭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폭력’이라는 용어보다 ‘공격적 행동’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공격적 행동은 언어적 공격, 이를테면 욕설 같은 다양한 공격적 행동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후자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논문에서 사용한 개념은 대개 전자보다는 후자였으며, 실제 연구도 주로 공격적 행동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즉, 게임이 공격성을 높인다는 연구는 폭력적 게임을 한 사람들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음을 보인 게 아니라, 상대에게 거슬리는 소음을 들려주는 것과 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공격성을 드러냈음을 보인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토대로 폭력적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서도 물리적 폭력을 더 많이 행사 한다고 단정 짓는다면 그건 과도한 결론이 아닐까.


게임은 이로울 수 있다
비판론자들이 말하듯 게임이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게임을 잘 활용하면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연구도 많다. 대표적인 분야가 시각 훈련이다. 최근 들어 게임이 시각 훈련에 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발표됐다. 심리학자 그린과 베이브리어가 수행한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메달 오브 아너’라는 FPS게임을 하게 했더니 시각적 주의력이 향상됐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들의 다른 연구에서는 게임을 즐겨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시각으로 사물을 탐지하는 일을 잘 숙달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게임의 시각 훈련 효과를 시각적 재활 치료에 응용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게임을 통한 재활 치료는 전통적인 방식의 치료보다 더 광범위하고,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게임은 그 자체로 재미있기 때문에, 지루하게 마련인 다른 시각 훈련에 비해 환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 분야에서도 게임의 이로운 효과는 속속 드러나고 있다. 통념과는 달리 최근 연구들은 게임에 교육적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퍼거슨과 그라자는 부모가 게임에 대해 적절히 지도하고 관심을 가져줄수록 자녀의 사회성이 더 좋았다는 연구 결과를 얻기도 했다. 또한, 심리학자 더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 청소년은 적당한 시간 동안 게임을 즐겨 하는 청소년에 비해 평균 성적이 더 낮았다. 특히 청소년 자녀가 게임을 즐기는 데 민감한 학부모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평소에 폭력적인 게임을 즐겼다고 해서 범죄의 원인이 게임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건 아니다. 게임은 그 범죄자가 평소에 하는 수많은 일 중 하나에 불과하다. 범죄자들은 평소에 밥도 먹고, 숨도 쉬고, 걸어 다니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활동들을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지는 않는다.


게임이 폭력의 원인이라는 건 섣부른 판단
사소하고 직관적으로 당연하게 보이는 인과관계라도 그것이 경험적 지지를 얻고, 학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심증을 근거로 게임을 수많은 폭력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단지 범인이 평소에 게임을 즐겼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그것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보도한다면 과연 공정한 것일까.

게임 연구의 역사는 아직 짧다. 아직 게임이 좋거나 나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다양한 게임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는 더욱 어렵다. 이제 지금까지의 사회적 편견과 달리 게임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해 볼 가능성을 타진해 볼 시기가 됐다.



박준석
계량심리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전공하였으나,
심리학 전반에 관심이 많은 심리학도. 과학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 밝혀낸 것들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vergilius85@gmail.com

2013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고호관 | 글 박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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