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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중이온가속기, 중국의 전자양전자가속기, 일본의 선형가속기. 한중일 삼국의 가속기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1월 말 대전컨벤션센터에서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주관으로 열린 ‘2018 아시아 가속기·진단장치 포럼’에는 한중일 삼국의 차세대 입자가속기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입자가속기는 기초과학 연구의 핵심 장비이자 노벨상의 산실로 불린다. 가속기는 원자를 구성하는 여러 입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서로 부딪쳐 보는 입자충돌기와 입자가 가속하면서 생기는 밝은 빛을 뽑아내 각종 실험에 이용하는 방사광가속기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가속기 규모가 클수록 높은 에너지의 입자를 얻을 수 있어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다. 유럽뿐 아니라 일본 등 선진국들이 ‘거대 가속기’를 선호하는 이유다.

 

대전 유성구 신동에 건설 중인 중이온가속기 ‘라온’ 시설의 조감도.

 

 

 RAON 

 

韓 중이온가속기

 

기초부터 응용까지 ‘멀티 플레이어’

 

“중이온가속기 ‘라온’의 장점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산업 분야에서 모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권영관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연구위원(라온활용협력센터장)은 한국이 개발 중인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이온가속기는 말 그대로 무거운 이온(중이온)을 가속시키는 장치다. 원자번호 2번인 헬륨(He)보다 무거운 원자를 이온으로 만든 뒤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한 상태에서 충돌시켜 희귀동위원소를 얻는다.

 

2012년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하며 전 세계를 흥분시켰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는 양성자를 서로 충돌시킨다. LHC가 자연계의 기본 입자 발견 등 기초과학 연구에 주로 활용되는 반면, 라온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에 두루 활용할 수 있다.

 

기초과학에서 라온의 목표는 새로운 원소를 찾아 주기율표에 추가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리타 고스케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그룹장(규슈대 교수)은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해 2012년 9월 113번 원소를 발견했다. 이 원소는 2016년 6월 ‘니호늄(Nh)’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주기율표에 공식적으로 등재됐다.

 

권 연구위원은 “새로운 원소 발견은 물론 빅뱅 이후 우주에서 핵 합성이 일어난 과정이나, 중성자별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모사하는 연구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기초과학 연구에 라온이 활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응용과학 분야에서는 신소재와 반도체 개발, 핵폐기물 처분 관련 연구 등에 활용할 수 있다. 신소재를 개발한 뒤 분자 구조를 분석할 수 있고, 인공위성 등 극한 우주 환경에서 작동해야 하는 반도체에는 중이온을 쏘아 미리 안정성을 테스트할 수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해외 가속기 시설을 빌려 방사선에 대한 반도체의 안정성 평가를 하고 있는데, 라온이 완공되면 해외에 나갈 필요가 없다. 수명이 다한 노후 원자력발전소 해체 시 발생하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기술 개발에도 활용할 수 있다.

 

권 연구위원은 “원전 해체 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오랜 기간 방사선을 방출하는 폐기물”이라며 “폐기물을 재처리해서 인위적으로 수명이 짧은 핵종으로 변환시키는 기술 개발에 필요한 기초 데이터를 라온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라온은 2021년 첫 가동 예정이다. 한중일 가속기 중에서 가장 먼저 완공된다. 지난해 6월 가속기 핵심 장치인 ‘초전도 가속 모듈’을 개발해 성능 시험까지 마쳤다. 초전도 가속 모듈은 올해 양산에 돌입해 22개를 만들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설치에 들어갈 예정이다.

 

권 연구위원은 “2020년이면 우라늄238을 기준으로 4403MeV(메가전자볼트)의 낮은 에너지 영역에서는 일차적으로 가속기를 가동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주의 핵 합성 과정 등에 대한 기초 연구와 라온에서 생성된 희귀동위원소의 크기 및 질량 측정 등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라온에 설치되는 선형가속기 내부의 사중극자 구조. 사진에 보이는 십자 모양의 사중극자에 고주파 전력을 걸어서 중이온 빔을 가운데로 모아 가속시킨다.

 

 

 CEPC 

 

中 원형전자양전자가속기

 

둘레 100km 세계 최대 가속기

 

“중국은 엄청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과학 분야에도 큰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많은 투자를 하고도 리더가 되지 못한다면, 돈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2월 1일 대전컨벤션센터에서 만난 왕이팡(王贻芳) 중국과학원(CAS) 고에너지물리연구소장은 중국이 세계 최대 가속기를 건설하려는 목적을 이같이 설명했다.

 

중국은 현재 과학 분야 세계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2016년 지름 500m의 세계 최대 전파망원경을 완공한 데 이어, 2017년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해 대륙간 양자암호통신 실험에 성공했다. 베이징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7600km에 이르는 거리다. 올해 1월에는 세계 최초로 영장류인 원숭이 복제에 성공하는 등 ‘과학 굴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가속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둘레가 100km에 이르는 ‘원형전자양전자가속기(CEPC·Circular Electron Positron Collider)’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2015년부터 개념설계에 들어간 상태다.

 

왕 소장은 CEPC 프로젝트를 이끄는 수장이다. 그는 가속기와 입자물리 분야 전문가로, ‘유령입자’로 불리는 중성미자 3종류가 서로 자유롭게 형태를 바꾸며 ‘변신’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세 가지 증거 중에서 마지막 한 가지를 2012년 세계 최초로 발견한 ‘다야베이(Daya Bay)’ 실험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CEPC는 2022년 건설을 시작해 2030년 완공 예정이며, 건설비만 수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CEPC가 완공될 경우 LHC의 약 4배 규모로 세계 최대 가속기가 된다.

 

 

왕 소장은 CEPC를 ‘힉스 공장’이라고 표현했다. CEPC는 전자와 양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서로 다른 경로를 돌게 한 뒤 충돌시켜 힉스를 비롯한 여러 입자를 얻는다. 가속기에서 충돌 지점 두 곳에 검출기를 설치해 충돌 시 생성되는 입자들을 분석한다. 그는 “LHC에서보다 정밀하게 힉스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CEPC 검출기 내부의 개념도. 전자와 양전자가 충돌해 나타나는 반응을 측정한다.

 

 

LHC에서는 양성자와 양성자를 충돌시켜 발생하는 입자들을 검출하는데, 너무 많은 종류의 입자들이 나와서 힉스만 깨끗하게 걸러내 분석하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CEPC는 이런 ‘불순물’을 최소화하고 힉스 입자를 생성할 수 있어 힉스 입자의 비밀을 더욱 자세히 밝혀낼 것으로 기대된다. 왕 소장은 “LHC보다 약 10배 정밀하게 힉스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CEPC는 암흑물질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입자물리학 영역을 개척하는 데 활용될 전망이다. 현재 과학계에서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먼저 밝혀내는 연구자가 노벨상 수상 0순위로 꼽히고 있다. 왕 소장은 “CEPC를 완성한 뒤에는 LHC보다 에너지가 훨씬 높은 양성자 가속기를 설치하는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ILC 

 

日 국제선형가속기

 

중국과 정면 승부 ‘힉스 공장’

 

힉스만 놓고 본다면 중국의 CEPC보다 더 정밀하게 연구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일본이 계획 중인 국제선형가속기(ILC·Inter national Linear Collider) 프로젝트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는 김은산 고려대 가속기과학과 교수는 ILC와 중국의 CEPC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ILC는 일본이 2013년부터 추진해 온 세계 최대 규모 선형가속기 건설 프로젝트다. 길이가 약 31km로 중국의 CEPC에 비해 전체 규모는 작지만 직선형 가속기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일본의 계획은 중국의 CEPC처럼 ILC를 ‘힉스 공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자와 양전자를 가속시킨 뒤 충돌시켜 LHC에서보다 정밀하게 힉스를 얻어 특성을 분석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규모에서 CEPC에 밀리는 ILC가 힉스 연구를 더 정밀하게 진행할 수 있는 이유는 선형가속기가 가지는 효율성 덕분이다. 선형가속기는 원형가속기에서처럼 입자가 회전하면서 잃어버리는 에너지가 없어 매우 높은 충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CEPC의 예상 충돌 에너지가 240GeV(기가전자볼트)인데 비해 ILC의 예상 충돌 에너지는 2배 정도인 500GeV다.

 

김 교수는 “전자와 양전자를 충돌시켜 힉스를 얻으려면 에너지가 250GeV는 돼야 한다”며 “에너지를 500GeV까지 높일 수 있는 ILC가 힉스 연구에는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다만 CEPC가 향후 양성자가속기로 업그레이드되면 현재 LHC 에너지의 약 10배 수준인 140TeV(테라전자볼트)까지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

 

ILC 프로젝트는 올해가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건설 여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최종 결정만 남겨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올해 가을 ILC 구축에 대한 승인 여부를 최종 결정할 계획이다. 건설이 승인되면 약 7년 뒤 가속기가 완공된다. 김 교수는 “현재 일본 정부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가속기가 완공되고 2030년경에는 본격적으로 실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계획대로라면 ILC는 CEPC보다 먼저 가동한다. CEPC는 현재 개념설계와 기초 연구를 진행하는 초기 단계인 반면 ILC는 개념설계와 가속기 구축에 대한 연구를 대부분 완료한 상태로 앞서 있다.

 

김 교수팀은 ILC에서 빔 역학 설계와 빔 진단에 필요한 기술 개발을 맡았다. 빔을 안정적으로 전송하기 위한 가속기의 초전도가속관 배치를 설계하고, 빔이 제대로 전송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가속기의 핵심 장비인 초전도가속관 개발에도 참여했다. 한국의 라온 개발에도 참여한 김 교수는 “라온과 일본의 ILC 개발에 적용한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했다.

 

ILC는 CEPC와 목적이 비슷해 일본과 중국은 가속기 연구에서 경쟁자이자 동시에 협력자 관계를 맺을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ILC와 CEPC는 실험 결과 데이터를 공유하고 함께 분석하는 등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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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대전=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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