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K씨는 하루 종일 바닥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계속 뒤돌아보게 된다. 동전은 물론 없다. 환청에 수십 년 째 시달리고 있지만 딱히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뇌수술을 받고 이 증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뇌에 가느다란 전극을 심어서 약한 전기 자극으로 환청을 보내는 신경회로를 마비시키는 수술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김연아 머릿속엔 ‘연아스핀’ 신경회로가 있다
사람은 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면 뇌에서 그 일을 하는 신경회로가 발달한다. 뇌에 그 일을 잘하게 해주는 큰 길이 하나 생기는 셈이다. 예를 들어 김연아 선수는 일명 ‘연아스핀’을 수만 시간 연습한 결과, 이 동작을 눈을 감고도 할 수 있게 됐다. 이 동작을 하는 신경회로가 발달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병이 된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잘못된 신경회로가 강해져서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 K씨가 그렇다. 뇌에 엉뚱한 신경회로가 생겨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 같은 신호를 계속 보낸 것이다. 이런 환자는 잘못된 신경회로를 끊어주면 치료할 수 있다. 뇌에 전극을 심어 전기 자극을 주는 뇌심부자극술로 동전 소리를 내는 신경회로를 마비시키면 증상이 약해진다. 뇌과학자들은 이런 신경회로를 찾아 우울증이나 강박증 같은 병을 치료하고 싶어 한다.
뇌, ‘정밀타격’ 보다는 ‘길목 차단’으로
그렇다면 잘못된 신경회로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우선 이제까지 뇌수술을 어떻게 해왔는지 살펴보자.
그 동안은 특정한 역할을 하는 뇌 부위를 직접 공략했다. 뇌에는 기능별 구역이 있다. 서울 지도를 펼쳐 명동은 쇼핑, 광화문은 관광 등으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뇌에서 문제가 생긴 부분을 직접 자극하거나 절개해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단점이 있다. 실패하면 그 기능을 아예 못 쓰게 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예를들어, 난치성 뇌전증(간질)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해마를 자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다른 부위까지 잘못 건드릴 위험부담까지 있다.
그래서 안전하게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뇌의 특정 부위가 아니라 그 부분과 연결된 ‘신경다발’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테러범을 잡기 위해 그들이 있는 건물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건물로 가는 진입로를 막는 식이다.
이 방법이 가능하려면 뇌 속의 신경다발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신경다발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알아야 치료할 수 있는데, 최근에야 가능해졌다. MRI(자기공명영상)로 뇌를 촬영하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가공하면 뇌 속 신경다발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자세하게 뇌신경을 볼 수 있는 기술을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에서 새로 개발했다. 이전의 신경다발 사진들이 굵은 붓으로 물감을 칠한 것처럼 흐릿했다면, 뇌과학 연구소의 사진은 색연필로 그린 정밀화처럼 섬세하다. 조장희 뇌과학연구소 석학교수는 이 기술을 토대로 한국인 30대 남성의 뇌를 2mm 간격으로 촬영해 뇌신경 지도를 완성했다. 조 교수는 “이 지도가 의사들이 뇌질환 치료를 위해 가장 필요로 하던 정보”라고 말했다.
나를 울고 웃게 하는 신경다발
뇌신경 지도는 왜 중요할까. 몰랐던 신경회로를 찾을 수 있고 치료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뇌신경 지도를 연구하던 중 그 동안 몰랐던 신경 다발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다발 4가지로, 이름은 ATR, slMFB1, slMFB2, imMFB다.
이 연구를 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2009년 독일에서 한 의사가 파킨슨병 환자에게 뇌심부자극술을 했는데 실수로 전극이 MFB라는 부분에 닿았다. 환자가 끝없이 웃으면서 흥분하더니 정신이 이상해졌는데, 다행히 자극을 멈추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조 교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MFB 부분을 더 자세히 보아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과정에서 감정조절 신경다발을 발견했다.
정말로 이 신경다발들이 감정을 조절할까.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4개의 신경다발은 시상하부에서 시작해 희노애락을 조절하는 전두엽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을 시상-대뇌변연계 연결다발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사람답게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화를 잘 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툭하면 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고차원적인 감정 조절의 차이는 여기에서 일어난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가 감정과 관련된 정신질환 치료에 도움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끝없이 슬퍼하는 우울증, 이유 없이 불안해하는 강박증 등은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병이다. 치료를 통해 감정을 제어하는 부분이 회복되면 이러한 증상이 없어질 것이다.
600만 개 신경다발 볼 수 있는 뇌 백질 지도
가천의대 뇌과학 연구소는 해상도가 매우 높은 7.0T MRI를 이용해 뇌를 2mm 간격으로 촬영한 뒤 고유의 방법으로 데이터를 분석해 뇌지도를 만들었다.
뇌지도를 만들 때 일반적으로는 DTI(물 분자의 확산성 강조 사진)를 촬영해서 3단계에 걸쳐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처리한다.
뇌과학연구소는 처리 과정에서 2단계를더 추가해 훨씬 세밀하게 볼 수 있게 했다.
이전까지 신경섬유를 5만 개 정도 볼 수 있었는데, 뇌과학연구소는 무려 600만 개를확인했다. 이렇게 자세히 보면 이전에 몰랐던 신경다발을 찾을 수 있다.
뇌 사진 한 세트를 촬영하는 데 약 3시간이걸리는데, 그 사이에 머리를 움직이면 사진이 흐려진다. 뇌의 주인공은 선명한 사진을 얻기 위해서 여러 차례 찍는 수고를 해주었다고 한다(2012년 11월 출판).
신경다발 자극해 우울증 치료
4월 3일 토마스 슈렙퍼 독일 본대학병원 정신의학과 교수가 뇌심부자극술로 난치성 우울증을 치료할 때 MFB 신경다발을 자극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생물학정신의학’ 저널에 발표했다. 당시는 조 교수팀이 아직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슈렙퍼 교수는 “자세한 원리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극심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뇌의 영역을 밝히는 데 한걸음 다가섰다”고 말했다. 이유도 모른 채 치료 결과만 관찰했는데, 조 교수의 연구 결과가 이유를 밝히는 데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뇌심부자극술은 뇌수술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김영보 가천의대 신경외과 교수는 “앞으로 뇌 전체의 신경 연결망이 확인되면 심부가 아닌 외곽 가까운 곳에서 더 안전하게 뇌자극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제 한 사람의 신경다발지도를 고해상도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볼 수 있어야 치료도 쉬워진다. 마치 뼈가 부러졌을 때와 비슷하다. X선으로 부러진 자신의 팔을 자세히 찍고 정확하게 치료를 해야지, 다른 사람의 팔이나 흐릿한 사진은 쓸 수 없다. 뇌도 마찬가지다.
단백질만 남은 투명한 뇌 만들다
뇌를 ‘보겠다’는 욕망은 또 다른 기발한 연구를 탄생시켰다. 뇌의 신경망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없애버리는 과격한 방식이다. 이 방법을 쓰면 뇌가 투명해져서 속을 훤히 볼 수 있다. 영화 아이언맨3에서 악당과 여주인공이 뇌 속을 들여다보는 장면과 비슷하다(동영상 참조).
정광훈 미국 스탠퍼드대 생명공학과 박사는 쥐의 뇌를 통째로 유리처럼 투명하게 만들어서 신경섬유를 확인하는 데 성공해 ‘네이처’ 5월 16일자 표지를 장식했다. 두피에 가까운 대뇌피질부터 안쪽에 깊이 숨어 있는 시상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다.
방법은 이렇다. 보고 싶은 신경 세포의 단백질은 남기고, 불투명한 지방만 빼내는 원리다.
먼저 저온(4℃)에서 투명한 하이드로겔을 뇌에 주입해 단백질과 결합시킨다. 3일 후 체온(37℃) 정도로 온도를 올리면 하이드로겔이 굳어서 단단해진다. 며칠 더 지난 후 전류를 흘려 지방질을 녹여 낸다. 남아있는 하이드로겔이 단백질, 즉 신경섬유의 모양을 92%이상 유지한다.
이 방법은 죽은 뇌에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치료에 직접적으로 응용하기는 쉽지 않지만 연구 자료로는 매우 획기적이다. 이 연구를 지도한 칼 다이스로스 교수에 따르면 이 방법을 써서 투명하게 만든 조직은 원상태보다 단단하고 화학적으로 안정적이어서 오랫동안 여러 가지 연구를 할 수 있다. 정광훈 박사는 “앞으로 정상적인 뇌뿐만 아니라 다양한 질환에 걸린 뇌의 지도를 완성해, 뇌질환을 이해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