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고려 말의 정치가 정몽주가 이방원(조선 태종)에게 읊은 ‘단심가’ 속 유골은 무덤 안에서 흙이 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오래된 무덤의 주인공은 유골은 물론 걸린 병까지 후세에 고스란히 기록을 남겼다. DNA 덕분이다.
요하네스 크라우스 독일 튀빙겐대 교수팀이 한국의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700년 전 중세 유럽의 무덤에서 채취한 유골 DNA를 이용해 당시에 유행하던 세균의 게놈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세균의 종류는 물론, 지역에 따른 변이와 변화 과정까지 밝혀냈다.
이들은 중세시대인 1300년대에 영국, 스웨덴, 덴마크 등지에서 죽은 시신 5구의 유골에서 DNA를 분리했다. 고유전자라고 불리는 유골 속 DNA는 짧게 끊어지거나 분해돼 있어 사라진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들을 많이 모아 빠진 부분을 서로 보충하면 전체 게놈을 분석할 수 있다. 연구팀은 채취한 DNA에서 유골 주인의 유전자를 제외하고, 감염된 세균의 유전자를 가려내 종을 파악했다.
그 결과 이 세균은 한센병을 일으키는 마이코박테리아 균주로 밝혀졌다.
이 균주의 현대 후손은 게놈이 330만 개의 염기서열로 이뤄져 있는데, 연구팀은 이 염기서열을 게놈 100벌 분량 모은 뒤 차세대 게놈해독기술로 분석했다.
보통 게놈 분석 때 사용하는 염기서열은 게놈 20벌 분량이므로, 연구팀의 자료는 훨씬 신뢰도가 높았다. 그 뒤 이렇게 해독한 게놈을 오늘날 지역별로 곳곳에 퍼져 있는 후손 11종의 게놈과 비교했다.
그 결과 마이코박테리아는 지난 1000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유전자의 변이를 바탕으로 종 사이의 친척 관계를 따져본 결과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간 세균과 중세 유럽에 유행한 세균은 근원이 중동지역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균의 ‘족보’가 밝혀진 셈이다.
연구팀은 이 기술로 폐렴, 흑사병(그림속 병), 콜레라, 에이즈 등 역사가 오래된 질병의 정체와 진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연구 결과는 6월 14일 ‘사이언스’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