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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잉~. 바람이 불자 한치 앞도 안 보일 만큼 두껍게 덮여 있던 새하얀 구름이 커튼처럼 열린다. 해발 약 2708m에 있는 뜨거운 샘에서는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나 구름을 만든다. 중앙아메리카 코스타리카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이 포아스 화산을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한다. 알라후엘라 주에 있는 포아스 화산은 1828년에 처음 분출했으며 지금까지도 크고 작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 9월에도 화산탄 하나를 재채기하듯 뱉어냈다.

지름이 1.6km나 되는 분화구에 고인 샘은 회색 진흙과 노란 유황가스가 뒤섞여 에메랄드 색을 띤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용암을 잔뜩 숨기고 있는 듯이 보글보글 거품을 내고 있다. 거대한 화산 분화구를 보면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숲에 살고 있는 동식물의 숨소리가 한 데 모인 것 같다. 뜨거운 생명력을 가진 산신이 지키는 덕분일까. 코스타리카는 단위면적당 생물다양성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 평균적으로 1000km2 안에 동물이 약 17개 종, 식물이 약 235종 살고 있다. 지구에 있는 생물 중 5%가 코스타리카에 살고 있는 셈이다.



단위면적당 생물다양성이 세계 2위

우리나라 남한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국가 코스타리카는 다양한 동식물의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타고났다. 동서남북에 있는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북아메리카, 남쪽으로는 남아메리카,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카리브 해(대서양)와 맞닿아있다. 수많은 육지생물이 남북으로 오르고 내리는 길목이자 바다생물이 산란하러 모여드는 곳이다. 위도 10°로 열대기후인 이곳은 어딜 보아도 하늘을 찌를 듯이 길쭉길쭉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우거진 열대 우림은 다양한 생물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다양한 동식물을 지키기 위해 산과 숲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전체 국토의 60%가 숲이며, 25%는 국립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중에는 땅속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묻혀 있는 곳도 있지만 국가적으로 개발을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국립공원에서는 물론, 운이 좋으면 숲속에서도 꿈에서나 볼 것 같이 아름다운 동물을 만날 수 있다. 몸만큼 커다란 부리를 자랑하는 새 투칸과 색소 없이도 새파란 빛을 내는 몰포나비, 무지개처럼 화려한 홍금강앵무, 아주 적은 양으로도 목숨을 빼앗는 독을 가진 독화살개구리 등이 있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조류만 850종이 넘는다.

코스타리카에 살고 있는 식물은 1만 2000종이 훌쩍 넘는다. 한국에 살고 있는 식물이 약 3500종인 것과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숫자다. 동서남북 색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식물이 퍼져왔고, 화산이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토양 안에 철이나 마그네슘처럼 일반 땅에는 적게 들어 있는 미네랄이 풍부한 덕분이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코스타리카의 다양한 식물에 주목하고 있다. 이 중에는 우리나라 인삼이나 감초처럼 약으로 쓸 수 있는 종이 많다. 우리나라도 한국생명공학연구원(KRIBB, 이하 생명연)이 지난 2008년 2월 외교통상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협력해 코스타리카의 에레디아에 한국-코스타리카 생물소재연구센터(KCBRC)를 세웠다.















원주민도 사용한 열대우림 약용식물

남미 인디언(원주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가끔 짐승을 잡기 위해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살짝 개구리 등을 훑은 뒤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나는 위험하다’라고 경고라도 하는 듯이 얼룩덜룩 진한 무늬가 있는 독화살개구리(Dendrobates 속)의 독을 이용하는 것이다. 또는 다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독특한 향이 나는 풀을 으깨 바르거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초콜릿 열매로 만든 음료를 먹는다.

원주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일부 식물에게 특별한 약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코스타리카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약용식물은 700종이 넘는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이미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사용해왔거나 아직까지 효과가 알려지지 않은 약용식물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유럽 정복자들이 가져간 작물이 코스타리카를 대표하게 된 것도 있다. 바로 커피다. 코스타리카 커피가 향긋하고 맛있는 비결은 역시 비옥한 화산 토양에 있다. 화산재가 지나갔던 산자락에는 커피농장이 들어서 있다. 단물을 빼기 위해 물에 담갔던 커피콩을 투박한 망에 거르거나, 땅에 넓게 펼쳐 햇볕으로 말리는 등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거의 수작업으로 커피를 가공하는 것도 비결이다. 특히 피베리(peaberry) 커피는 반으로 쪼개지는 일반적인 커피콩과는 달리 쪼개지지 않으며, 둥근 콩알 상태로 로스팅한다.















식물자원 채집부터 추출까지

한국-코스타리카 생물소재연구센터는 코스타리카의 생물다양성 연구기관인 ‘인비오(INBio)’와 함께 연구하고 있다. 인비오는 1989년 코스타리카의 생물자원을 보존함과 동시에 사람에게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생겼다. 생태공원을 지어 시민과 관광객에게 동식물을 보여 주고, 새로운 생물자원을 찾아 수집해 유전자와 생체물질 같은 정보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한국-코스타리카 생물소재연구센터는 인비오와 함께 코스타리카에 있는 식물을 공동으로 채집하고 있다. 지금까지 센터에서 수집한 식물은 1450종이 넘는다. 한국-코스타리카 생물소재연구센터장인 김수용 박사는 “매년 식물을 300종 채집해 화학물질만 추출한다”고 말했다.

1~3월 사이에 코스타리카 정부로부터 연구 허가를 받으면 연구원들은 커다란 가방을 하나씩 메고 채집하러 떠난다. 채집지는 주로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오지다. 대개 나무를 꽃과 잎, 열매 등으로 분류해 한 식물 당 2kg씩 딴다. 자른 식물을 비닐에 담아 연구실로 옮기는데, 한 사람당 20kg가 넘는 큰 짐을 메고 돌아온다.

4월부터 채집해온 식물을 건조하기 시작한다. 식물체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기를 빼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말린 식물은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든다. 가루에 알코올을 붓고 열을 가해 알코올 성분을 날리면 화학물질만 진액 형태로 남는다. 채집한 식물체 2kg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그램 단위로 적은 양만 남는다. 연구팀은 2g짜리 추출물을 만들어 생명연 해외생물소재허브센터와 코스타리카 인비오의 추출물은행으로 보내 연구를 진행한다.



우수한 한국 기술로 신약 후보 찾는다

한국-코스타리카 생물소재연구센터에서는 수집한 식물들을 분류학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나중에 약리효과가 뛰어난 식물을 발견했을 때, 정확히 어떤 식물의 어떤 부위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샘플이 한국 생명연에 도착하면 연구원들은 이 식물샘플에 약효가 있는지 분석한다. 주로 항암과 항산화, 항염증, 세포독성, 살충효과 등 기본적인 생물학적 활성이 일어나는지 살펴본다. 천연물 신약후보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신약으로 개발할 수 있는 식물은 기능성화장품이나 영양제로도 활용할 수 있다.

연구원들이 채집한 약용식물에는 세포독성 효과가 있는 엘레판토푸스(Elephantopus mollis), 뱀에 물렸을 때 해독작용이 있는 아리스톨로키아(Aristolochia grandiflora), 뿌리째 먹으면 항암효과가 있는 대극과(Euphorbiaceae) 식물 등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코스타리카 생물소재연구센터에서 수집한 식물 중 특허를 출원한 것은 2개 종으로, 항염증과 천식을 낫게 하는 효과가 있는 워클리아(Wercklea)속 식물과 디오스피루스(Diospyrus)속 식물이 있다. 김 박사는 “2016년까지 식물추출물 연구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라며 “코스타리카에서 채집 가능한 식물의 약 절반 정도(약 3000종)의 추출물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라고 밝혔다.

센터는 지난 2012년부터 한국과 코스타리카 정부에서 공동 연구비를 받아 위암, 위궤양을 일으키는 헬리코박터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식물 100여 종을 분석하고 있다.

한국-코스타리카 생물소재연구센터와 인비오는 2012년 한 해 동안 채집한 식물들의 종류와 서식지, 형태학적 특성을 다룬 도감 ‘코스타리카의 식물’을 발간하기도 했다. 또 김수용 박사는 인비오가 코스타리카에서 자라고 있는 식용식물과 약용식물을 정리한 도감 ‘중미의 식용식물’을 영문으로 번역할 예정이다. 전 세계에서 더 많은 과학자들이 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생명연에서는 앞으로 제약회사와 손잡고 약효가 입증된 식물을 활용해 신약을 개발할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고 있다. 신약을 개발하려면 10년 이상 오랜 시간을 연구해야 하고 그만큼 자금이 든다. 또 식물뿐 아니라 곤충과 곰팡이, 미생물까지 범위를 넓혀 신약 후보를 찾아낼 예정이다.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의 전홍조 대사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술과 코스타리카의 풍부한 자원이 만나 미래 신약이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다”며 기대했다.

2013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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