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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를 삭제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의 근원



공포와 스트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가장 근본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우리가 항상 보고 겪지만 우리에게는 닥치지 않을 것 같은 죽음에 닿는다. 죽음은 단순히 신체의 수명이 다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일도 ‘심리적 죽음’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수험생이나 취업 준비생, 각종 자격시험을 앞둔 학생은 시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이들은 시험 실패, 즉 존재 가치가 부정될 위험과 늘 맞서고 있다.


[9·11테러와 같이 큰 고통과 충격을 동반한 사건은 공포 감정이 함께 기억된다. 만약 공포 감정만 골라 지울 수 있다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고통 받는 환자를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죽음의 공포에 주목하는가

그럼 본격적으로 공포와 그 대뇌 메커니즘에 대해 살펴보자. 공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선천적 공포’와 태어난 후에 여러 가지 경험으로 배우게 되는 ‘후천적 공포’로 나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선천적 공포의 대표적인 예다. 이 공포는 우리 대뇌 신경회로에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 있다. 워낙 강력해서 어떤 이성적 결단도 죽음의 신경회로 앞에 굴복하게 된다.

반면 후천적 공포는 공포를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됐을 때 그 상황이나 그때의 감정(극심한 공포)을 기억하는 것이다. 미국의 9·11 테러사건을 예로 들자. 비행기가 충돌하며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때 느꼈던 공포가 또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사건 이후 다른 건물이 폭파돼 무너지는 것만 봐도 9·11 테러상황을 떠올리게 되고, 그때 느꼈던 공포도 같이 되살아나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공포의 발현과 기억에는 양쪽 귀의 안쪽 대뇌 부위에 위치한 아몬드 모양의 소기관 ‘편도체’가 중추적 역할을 한다. 실제로 사고로 편도체를 잃은 환자는 감정, 그 중에서도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 수술을 위해 편도체 부위를 약하게 전기로 자극하면 환자는 공포를 느낀다.

편도체가 망가진 쥐는 고양이 앞에서 잡혀 먹힐 때까지 장난을 친다. 이것을 보면 선천적 공포인 죽음의 공포 역시 편도체가 관여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편도체에 죽음의 공포가 각인된 것인지, 아니면 대뇌의 다른 소기관에 각인된 죽음의 ‘메시지’가 편도체를 활성화시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를 알려면 죽음의 공포를 재현하고 측정할 수 있는 동물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재현하는 동물 모델은 만들기 어렵고, 동물을 대상으로 죽음을 실험한다는 윤리적 문제도 나온다.

공포 기억을 측정할 수 있는 동물 모델은 많이 개발돼 있다. 조셉 르두 미국 뉴욕대 교수, 마이크 데이비스 에모리대 교수가 이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이들의 가장 핵심적인 발견은 편도체 중에서도 기억 저장소라고 알려진 시냅스에 선천적 공포가 각인되고, 평생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포 관련 질환이 선천적 공포와 관련이 깊다(공포증, 공황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

그렇다면 어떻게 공포와 관련된 기억을 치료할 수 있을까. 공포가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연결된 경우, 공포에 대한 기억을 약하게 하거나 지우는 방법이 있다. 한가지 오해를 피하자. 공포를 일으킨 상황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 감정에 대한 기억만 삭제한다. 9·11 테러상황을 다시 보면,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때 느꼈던 공포 기억만 지우는 것이다.

현재 동물 모델 수준에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공포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공포 기억을 담당하는 세포를 선택적으로 제거해 특정 공포 기억만 삭제할 수 있다. 최근에는 삭제하고자 하는 공포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뒤 그 기억만 표적으로 골라 삭제할 수 있는 약물이 보고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 삭제는 윤리적인 문제가 많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아직 실험적 증거는 없지만, 이런 후천적 공포도 결국 죽음의 공포를 담당하고 있는 신경회로와 관련이 많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두려움도 문제가 되지 못한다. 신경회로 측면에서 반사적인 반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공포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원인인 죽음에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후천적인 공포 연구에 매달려 있다. 혹시 근원적인 원인이 아니라, 근원적인 원인이 비친 거울상에만 매달려 있는 게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된다.






신경세포에 새겨진 끔찍한 기억

공포에 대한 세포와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 연구는 다른 모든 기억 연구를 앞서가고 있다. 과학자들은 공포 기억이 만들어지고 오래 지속되는 과정(‘경화’)과, 그 기억이 재생되는 과정에 대해 활발히 연구했다.

우선 공포 기억이 만들어지는 부위는 앞서 말했던 편도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편도체로 들어가는 신경세포의 축색돌기와 편도체 안에 있는 신경세포 사이, 즉 ‘편도체 시냅스’에 공포 기억이 저장된다. 신경신호가 전달될 때 시냅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먼저 앞에 있는 신경세포의 축색돌기 끝에 신경 전기신호가 전달되고, 축색돌기 끝에서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가 나온다. 글루타메이트가 두번째 신경세포 막에 있는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에 결합한다. 그러면 수용체가 세포 밖에 있는 양이온을 세포 안으로 가져오고 이때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있다. 이 과정이 항상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냅스로 전달되는 신경전기신호는 일정하지만, 시냅스에서 그 신호가 크게 증폭되거나 감소할 수 있다.

조건화 반응을 통해 공포를 학습시켜 보자(예를 들면,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쥐에게 전기 충격을 준다).

공포 기억이 뇌에 만들어질 때 편도체 시냅스의 효율이 늘어나며, 그 결과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의 숫자가 증가한다. 즉 같은 세기의 신경신호를 받아 비슷한 양의 글루타메이트를 방출하더라도, 수용체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두번째 신경세포에서 생기는 신경 전기 신호는 훨씬 커질 수 있다. 안테나가 많아져 수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일단 수용체 숫자가 증가해 기억이 만들어지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 경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시냅스의 전반적인 기능이 향상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쥐의 머리 속에는 ‘종소리=전기 충격’이라는 공식이 깊이 새겨진다.

이것이 공포 기억이 경화되는 과정이다. 이렇게 경화된 공포 기억은 평생 유지되며 삭제하기 매우 어렵다. 결국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포비아공황장애등으로 이어진다.

고통스런 기억, ‘시냅스 가소성’으로 지운다

그렇다면 고통스런 공포 기억을 영원히 지니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최근 경화되고 오래된 공포 기억이라도, 다시 회상하면 경화되기 전 상태로 돌아갔다 다시 경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치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열을 가하면 다시 녹았다 굳는 것과 비슷하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공포 기억을 삭제할수 있다.

방법은 이렇다. 경화된 공포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뒤 기억의 경화를 막아주는 ‘경화차단제’를 투여한다. 그러면 공포 기억만 삭제할 수 있다. 일명 ‘기억삭제기술’이다. 실제로 최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환자들에게 실시하고 있는 방법이다. 트라우마를 생각나게 할 수 있는 영상을 보여준 뒤 바로 베타차단제(안정제로도 널리 쓰이는 약물로, 불안증 환자에게서 잠시나마 불안이 사라진다)를 투여한 결과, 일부 환자들에서 공포 기억이 줄어들었다.

또 하나 전통적으로 많이 쓰는 방법은 인지치료의 일종인 노출치료다. 트라우마를 겪었던 장소나 상황에 자꾸 노출시켜 환자에게 그 장소나 상황이 더 이상 트라우마를 주는 것이 아님을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쓰면 대부분의 환자들이 상태가 좋아진다. 다만 부작용이 있는데, 치료 후에 줄어든 공포 기억이 갑자기 재발할 수 있으며, 그 이후 상태가 더 나빠진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동물 모델로 실험해 봤다. 조건 반사를 유도하는 자극과 트라우마 자극을 동시에 준 쥐가 있다(아까 예로 든 종소리와 전기 충격을 떠올리면 된다). 이 쥐에게 조건화 자극(종소리)만 계속 주면, 쥐는 종소리가 더 이상 전기 자극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트라우마가 사라진다. 이를 ‘공포소멸훈련(fear extinction)’이라고 한다.

공포소멸훈련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포를 일으키던 자극이 왔을 때, 그게 트라우마 자극이 아니라 안전하다는 신호로 기억되는 것이다. 이를 ‘안전 기억(safety signal)’이라고 하는데, 안전 기억이 편도체 활성을 억제한다는 학설이다. 두 번째 가설은 강화되고 크기가 커진 편도체 시냅스가 다시 약해지고 작아져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가설이다. 현재로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의견이 많다.

공포소멸훈련 이후 나타나는 공포기억재발 현상도 동물에게서 인간과 비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공포소멸훈련 이후 나타나는 재발 과정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차단약 개발도 가능해질 것이다.




뇌는 ‘함께 하는 삶’을 원한다

다시 공포와 스트레스의 관계로 돌아와 보자. 공포는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공포의 중추인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스트레스 중추인 시상하부가 강하게 활성화된다. 이 말은 공포를 느끼면 시상하부가 활성화되며 스트레스 회로가 작동하고, 온몸에 스트레스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스트레스 반응에 대해서는 과학동아 10월호 기획 ‘피로사회’ 참조). 스트레스 반응은 긴박한 상황을 극복하기에 적절하지만 지속될 경우 폐해가 심각하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속적으로 나오면 뇌 세포를 죽여 대뇌 조직을 수축시킨다. 스트레스가 치매나 다른 신경질환의 원인이라는 가설도 있다. 암이나 류머티스, 당뇨 등 다른 많은 질병도 스트레스가 주범일 가능성이 있다.

죽음, 공포, 그리고 스트레스는 모두 연관돼 있다. 죽음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정말 많지만, 신경생물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우리는 죽음을 표면적으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대뇌 소기관, 즉 편도체와 시상하부, 교감신경과 부신피질(스트레스 호르몬을 방출하는 소기관)은 늘 죽음의 공포에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늘 살고자 발버둥친다. 이것은 본능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발버둥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더해 준다는 사실 역시 명심해야 한다. 신경생물학적으로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결국 죽음을 더 인지하게 할 뿐이다.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이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건강 문제가 아니더라도 허탈감과 허무감,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대처 방법, 특히 성공을 지향하는 방법은 그리 효율적이지도 않고 옳은 방법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숙명인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평소에 차근차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나 더. 죽음의 공포는 나 자신이 대상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는 또다른 방법은 주위 사람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일이다. 최근 자신만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 사는 풍조가 만연하다. 하지만 나나 내 가족만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죽음의 공포로 이끌고, 더 큰 스트레스로 자신과 가족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 뇌는 우리에게 나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1. Neuroscience: Exploring the brain. 3rd ed. Bear et al.
2. Principles of neural sciences. 4th ed. Kandel et al.
3. Johansen JP, Cain CK, Ostroff LE, LeDoux JE. Molecular mechanisms of fear learning and memory.Cell. 2011 Oct 28;147(3):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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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Nader K, Schafe GE, Le Doux JE.Nature. Fear memories require protein synthesis in the amygdala for reconsolidation after retrieval. 2000 Aug 17;406(6797):722-6.
7. Kindt M, Soeter M, Vervliet B. Beyond extinction: erasing human fear responses and preventing the return of fear. Nat Neurosci. 2009 Mar;12(3):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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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윤신영 | 글 최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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