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특허전쟁이 발생한 원인은 뭘까. 애플에 견줄 만큼 경쟁력 있는 소프트웨어 기술을 휴대전화 제조사들이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조사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구글의 소프트웨어에 의존하게 됐다. 이 소프트웨어는 OS라고 불리는 운영체제(Operating System)를 말한다. 애플은 구글이 제조사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안드로이드 OS가 자신의 iOS를 모방한 것이라며 분개했다. 애플은 소송을 준비했다. 제조사가 구글의 OS를 이용해 스마트폰을 제조한다면 애플과의 소송을 피할 수 없었다. 아이폰은 스마트폰 혁신에서 대세로 자리잡았고 경쟁하지 못한다면 파국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전쟁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신출내기 애플, 특허제도 패러다임 뒤흔들다
2009년 10월 세계 1위의 휴대전화 제조사인 노키아가 특허를 꺼내 들며 애플을 상대로 포문을 열었다. 업계 최고의 강자와 이제 막 휴대폰 시장에 진입한 지 3년도 안된 후발주자의 충돌이었다. 6개월 후인 2010년 4월 애플은 최초의 안드로이드폰을 제조한 대만의 HTC와, 6개월이 지난 후에는 모토로라와 특허소송으로 맞붙었다. 또 다시 6개월이 지난 2011년 4월에 애플과 삼성전자와의 특허전쟁이 비로소 일어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글로벌 특허전쟁이 기술에 대한 통념과 특허 제도를 뒤흔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신출내기보다 터줏대감 기업이 더 많은 특허를 갖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애플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달랐다.
제조사들은 애플이 스마트폰을 아예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무선통신기술의 ‘표준특허’를 공격무기로 삼았다. 애플은 상대방이 쉽게 피할 수 있어서 별로 아플 것 같지 않은 무기(소프트웨어 특허와 디자인)를 사용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원천기술’ ‘핵심기술’ 등 하드웨어 기술은 특허전쟁에서 소프트웨어 기술을 윽박지르지 못했다. 오히려 사용자의 즐거움과 경험을 강조하는 애플의 소프트웨어와 디자인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직 논란은 있지만 이런 판단에는 이른바 ‘프랜드’ 조항이 작용했다. 프랜드(FRAND, 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으로’ 모든 사업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표준특허를 말한다. 삼성과 애플의 특허소송에 대한 미국 판결은 프랜드
조항에 따라 하드웨어와 통신 기술이 집약된 특허는 모든 사업자에게 차별없이 제공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거칠게 풀어보자면 통신 기술에 관한 특허는 독점 효력이 없다는 얘기다. 프랜드는 그동안 과학기술자들의 관심밖에 있었던 조항이다. 이전에는 핵심기술, 원천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받는다면 일정 기간 동안 해당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기능을 구현하더라도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더욱 경제적이고 쉽고 훨씬 뛰어난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애플과 구글이 입증했다. 소프트웨어는 소비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과거의 모든 휴대전화 기술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기술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글로벌 특허전쟁은 단지 이런 시대적 변화를 드러내는 파열음에 불과하다. 기술은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의 시대’가 열렸다.
[일본 오사카시에 있는 애플 매장]
[서울 강남에 있는 삼성전자 홍보관]
생각지도 못한 예술의 역습
우수한 산업기술이 훌륭한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시절은 끝났다. 나라와 나라 사이, 기업과 기업 사이의 기술격차는 점점 줄고 있다. IT 강자였던 일본기업들은 글로벌 특허전쟁의 시대에서 잊혀졌다.
기술지상주의에 대한 반성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제기됐다. 바로 ‘예술’이다. 오늘날 기술은 ‘과학지식을 이용해 자연의 사물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으로 정의된다. 예술은 좀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기술은 ‘도구’의 의미가 강조되고, 예술은 ‘심미적’으로 이해된다(그러나 영어 ‘art’의 경우 여전히 ‘기술’로 번역해야만 할 때가 많다. 예컨대 특허서류에서 ‘prior art’는 ‘선행기술’로 번역해야만 뜻이 통한다).
옛날에는 그렇게 구분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기술과 예술의 어원은 모두 ‘테크네(techne: 기예)’였다.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점차 분리되다가 산업사회에 들어서서 기술과 예술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기술은 산업과 상업에 초점을 맞춰 발전했다. 예술은 인간의 탐미적인 행위로 발전했다. 둘은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기술과 예술이 다시 만날 때 얼마나 큰 시너지가 생기는지 모바일 산업이 입증했다. 애플 제품을 두고 예술품이라고 하긴 어렵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술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술적인 관성에서 벗어난 것은 틀림이 없다. ‘기술’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애플의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냈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은 틀렸다. 애플은 사용자 인터페이스(UI)와 사용자 경험(UX)처럼 기술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어쩌면 인간을 이해하는 탐미적 또는 예술적 영역을 자기 기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어떤 쾌락(편안함)을 느낄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녹아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미국 판결에서는 어떤 점이 예술의 영역일까. 미국 법원은 바운스백(화면을 스크롤할 때 끝부분에서 반동처럼 화면이 튀어올라 페이지의 마지막임을 알리는 것), 멀티터치 확대(두 손가락으로 동시에 화면을 터치해서 확대하는 것), 두드려 확대(두 번 화면을 두드리면 화면이 일정 비율로 커지는 것)기능 등에 대해 삼성이 애플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어찌 보면 장난감 만지는 듯한 기능들이다. 그러나 이같은 UI와 UX는 인간을 이해하는 애플의 철학이 반영된 융합기술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과학기술 중심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글로벌 특허전쟁을 계기로 미래에는 기술이 좀 더 예술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자기 기술의 우수함만으로 남을 설득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과학기술자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산업사회에서 예술이 기술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기술과 예술의 융합은 가능하다. 이 융합은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분야에서 더욱 왕성할 것이다.
“디자인은 영혼이다”… 미래 특허의 향방은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소송을 바라보면서 기술과 디자인을 둘러싼 가치 논쟁이 벌어졌다. 애플이 보유한 특허들은 제품 디자인이 핵심이다. 과학기술자들은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것이 특허가 되는지 회의를 품었다. 너무 간단해서 권리 자체가 우스워 보였다. 반면 삼성전자의 무선통신 특허야말로 진정한 특허라고 생각했다. 중간 결과는 애플의 승리였다. 둥근 모서리와 아이콘 모양이 특허로 인정받는 동안 통신에 관한 표준특허는 무시
당했다. 기술에 대한 디자인의 승리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씩 따져보자. 소송 관점에서 보자면 삼성전자의 표준특허 주장은 해당 기술이 구현된 칩을 애플이 시장에서 정당하게 구매함으로써 특허권의 효력이 사라진다거나(특허소진론), 혹은 표준특허 주장이 갖는 지나친 독점권의 남용(경쟁자는 표준특허를 피해 나갈 수가 없다는 우려)이 지적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그렇다면 디자인이 왜 그토록 중요해진 것일까. 우선 디자인과 기술의 의미를 보자. 현대 산업사회에서 디자인과 기술이 갖는 의미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허제도도 마찬가지다. 외관이라고 해서 모두 기술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원리라고 해서 디자인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사용자 화면으로 표시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원리’이기는 하지만 외관 디자인과 직결된다. 디자인이 설정한 기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기술이 해결해줘야 한다. 이렇듯 오늘날 디자인과 기술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외관은 무조건 디자인특허로 보호하고, 원리는 모두 기술특허로 보호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외관도 기술특허로 보호받을 수 있으며 원리도 때때로 디자인특허로 보호받을 수 있고, 혹은 기술특허와 디자인특허로 중층 보호받는 것도 가능하다. 지적재산으로서 디자인특허와 기술특허는 융합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디자인은 ‘겉모습’을 뜻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디자인의 의미와 정반대입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작물의 근간을 이루는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결국 여러 겹의 표면들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디자인 사고를 언급한 흥미로운 진술이다.
디자인 사고가 중요한 까닭은 그 어떤 경영이론과 테크놀로지보다도 훨씬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급류처럼 빠르게 변한다. 혁신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이유다. 그러나 혁신은 어렵다. 혁신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사람에 대한 관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디자인 사고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기술과 디자인이 서로 융합될 때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 미래의 특허세상에서는 디자인이 기술보다 더 많은 자리를 요구할 것이다. 디자인은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방향을 잃고 헤매는 기술의 상당수는 디자인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이같은 추세는 정보기술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전공학이나 고분자기술, 중화학 분야에서도 디자인은 기술에 대해 방향성을 제공할 수 있다. 기술을 이용해 어떤 희망을 만들 것인지는 디자인의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인성 질병에 고생하는 아프리카 지역의 문제를 어떻게 값싸고 쉽게 해결하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은 디자인이며, 나노필터 기술이나 정수기술을 이용해 해결하는 것은 기술이다.
사람의 얼굴을 한 기술
이번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애플이 보유하고 있는 다른 특허는 무엇이 있을까. 톰슨로이터라는 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특허가 앞으로 주목을 받을 것이다. 2010년 1월에 출원한 이 특허는 화면의 단어를 터치하면 자동으로 관련 그림이나 다른 설명이 나타나는 기술이다. 기술 자체가 아니라 정확히 사람을 향해 있는 기술이다. 미래의 특허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보여준다.
인간이 기술을 알아야 하는 시대가 가고 있다. 지식과 경험은 널리 퍼져 있다. 인간은 이미 생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다. 습득할 건지 말 건지만 결정하면 된다. 이제는 기술이 인간을 알아야 하는 시대다. 기술과 분리됐던 철학, 문학, 심리학, 사회학, 윤리학과 같은 인문학이 다시 기술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이런 학문들은 사람에 대한 시선을 제공한다. 기술은 스스로를 점검하고 인문학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글로벌 특허전쟁의 향후 시나리오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기술과 인문학이 서로 어울리는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이 더 궁금한 시대다. 특허제도 또한 그런 시대적 변화에 수긍하며 발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2012년 현재 처절하게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