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슨(N. R. Hanson)의‘발견의 유형 : 과학의 개념적 기초에 대한 탐구’(Patterns of Discovery: AnInquiry into the Conceptual Foundation of Science)은 1958년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됐다. 우리나라에서는‘과학적 발견의 패턴’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돼 1994년 민음사(송진웅∙조숙경 공역)에서 대우학술총서의 일부로 출판된 바 있다.
저자가 책 곳곳에서 티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데카르트 등의 원전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논의를 전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핸슨은 그 누구보다도 과학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한 과학철학자였다. 그는 1920-30년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를 극복하고 현대 과학철학으로 흐름을 이끌어가는데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
관찰의 객관성에 대한 고전적 견해 비판
이 책은 관찰, 사실, 인과성, 이론, 고전 입자물리학, 소립자 물리학 등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양자물리학에 대한 부록과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주가 첨가돼 있다. 핸슨은 현대 입자물리학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관찰이 무엇이고, 이론은 어떻게 생겨나며, 인과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케플러가 언덕 위에서 새벽 해돋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티코 브라헤가 함께 서있다고 하자. 케플러는 태양은 고정돼 있고 대신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톨레미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티코 브라헤는 지구는 고정돼 있고 나머지 모든 천체가 이 지구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케플러와 티코는 새벽녘에 동쪽 하늘로부터 동일한 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는 지각 경험이 이론이나 개념 또는 배경지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관찰이 이론과 상관없이 객관적이라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예컨대 나무 뒤쪽을 기어올라가는 곰을 그린 그림으로부터 사람들은 곰의 반대편까지 머리 속으로 그릴 수 있다거나, 동일한 그림이 그림 배경에 따라 오리로도 사슴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관찰로부터 이론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 오히려 이론에 의존적임을 강조했다. “본다는 것은 안구 운동 이상의 행위다”라는 그의 유명한 문구가 이를 잘 표현한다.
서문에서 핸슨은 당시의 과학철학자들에게 현대물리학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이유를 밝히려고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는 철학자들이 현대물리학을 역동적이고 가변적인 상태에 있는 연구 분야로 보지 않고, 완성되고 안정된 학문 체계로 잘못 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구체적으로 현대물리학의 본질적인 특성인 소립자 묘사 불가능과 개별성,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불확정 원리, 상보성 원리 등의 기본적 개념들이 얻어지는 과정들이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단순한 귀납이나 가설·연역에 의한 것이 아닌,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한 과정임을 주장한다.
현대물리학을 통한 새로운 과학철학 등장
핸슨이 책에서 주장하는 과학적 방법은 귀추(abduction 또는 retroduction)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실험자는 실험 결과들을 기존의 지식 안에 유형화하거나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실험 대상이 가져야 하는 성질들을 알게 된다. 그 대상이 이미 인식한 성질을 가진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또 다른 실험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얻어진 실험 결과들로부터 사실을 수집하고, 대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제시돼 실험 대상이 최종적으로 이해된다. 즉 어떤 실험이나 사실과 이론이 실험자의 주관적 생각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실험 데이터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패턴(유형)에 짜 맞출 수 있기를 열망한다. 따라서 귀추의 과정을 통해 이것을 성취하고, 그렇게 되면 비로소 원자 또는 소립자들이 어떤 성질을 가져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물리학자들은 소립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귀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 물리학 지식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도 없고, 묘사가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지식만이 실험 데이터를 유형화해 이해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핸슨은 이해가능성이 바로 물리학(과학)의 목표이며, 이것은 새로운 관찰들을 설명의 유형과 틀에 맞아들어가게 하는 계속적인 개념적 투쟁의 지적인 대가로 얻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유형이 관찰이나 발견 등의 현상 인식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현대 과학철학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저자 핸슨은 관찰의 객관성이 과학 지식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귀납주의와 20세기 초반 초기 반증주의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20세기 전반의 뒤엠과 콰인의 철학적 입장을 이어받고 동시에 쿤, 라카토스, 파이어아벤트, 과학 사회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과학관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 과학철학 관점을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는 과학철학의 핵심 문제에 대해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평가되는 이 책은 관찰, 과학적 사실, 인과성 등의 문제가 모두 이론 의존적이며, 개념적 조직화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과학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문제 자체가 과학 지식의 발견과 성장인 만큼, 일반 독자들도 본질을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특히 소위 심리학 입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반전 그림을 여러개 보여줘, 독자들이 흥미를 갖고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 지식의 본성에 관심을 지닌 과학학 관련 분야의 독자들은 물론, 지식론에 관심이 있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과학교육 등 교육학 분야의 독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핸슨이 말하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은 멀리는 독일의 형태심리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좀더 가깝게는 피아제의 인지발달론과 그 기본 입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켈리와 오스벨 등으로 대표되는 구성주의적 인지심리학으로 이어진다. 이런 경향은 구성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인식론으로도 연결된다.
역사와 철학의 통합을 강조한 과학철학자
영국 켄터베리 대학 출신인 노우드 러셀 핸슨(norwood Russell Hanson, 1924-1967)은 시카고, 콜럼비아, 예일, 옥스퍼드, 캠브리지 등 미국과 영국의 명문 대학들을 두루 거쳤다. 인디애나 대학의 과학사-과학철학과를 창설하고, 교수로 근무하면서‘발견의 유형’을 저술했다. 그리고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예일 대학의 실리만 렉쳐(Silliman Lecture)를 담당했다. 특히“과학철학이 없는 과학사는 맹목적인 것이고, 과학사 없는 과학철학은 공허한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중요하게 강조했다.
그는 학문적 연구와 발전을 위해 다수의 과학철학 관련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에‘양전자의 개념’(Concept of Positron),‘지각과 발견’(Perception and Discovery), ‘관찰과 설명’(Observation and Explanation), ‘에세이 모음’(What I do Not Believe and Other Essays)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