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양연구원과 과학동아가 주최한 열대해양체험단은 8월 20일부터 29일까지 마이크로네시아의 ‘축’ 주에 있는 한·남태평양해양연구센터를 방문해 열대 해양을 체험했다. 기자도 함께 동행해 마이크로네시아의 자연환경과 문화, 사회 그리고 해양연구센터의 활동을 둘러봤다. 마이크로네시아에서 펼쳐진 한·남태평양해양연구센터의 활약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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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식 소장이 열대해양체험단에게 맹그로브 숲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맹그로브 숲은 우리나라의 갯벌과 같이 습지 생물이 사는 서식지이며, 산호를 지키는 방파제다.]
인천공항을 떠난 체험단은 괌을 거쳐 남태평양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축’ 주의 웨노 섬에 도착했다. 밤 11시 축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린 것은 정전이었다. 한·남 태평양해양연구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환대를 받던 중 갑작스레 어둠이 내렸다. 구름이 많아 별빛조차 없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놀란 체험단과 달리 현지인들과 연구원들은 정전이 일상이라는 듯 태연했다. 비로소 다른 문명으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옆 아무런 불빛도 나오지 않는 건물을 보고 박흥식 해양연구센터 소장에게 “빈 건물인가요?”라고 물었다. 박소장은 웃으며 “축 최고의 호텔입니다”라고 답했다.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느껴져 폐허 같던 건물이 호텔이라니 의아할 뿐이었다.
연구센터까지 가는 길도 상상을 초월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었지만, 포장도로라기보단 큰 웅덩이가 곳곳에 있는 장애물 경주로였다. 박 소장은 “이렇게 된 지 3~4년 됐지만 아무도 고치지 않는다”며 “연구센터가 공항에서 불과 1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만 차로 한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KTX를 이용해 서울에서 대전까지 갈 수 있는 시간 동안 고작 10km 가는 데 그쳤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서일까. 사람들도 느긋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길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태평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선 출근과 등교로 바쁠 시간에도 사람들은 별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몇이 어디론가 가고 있어 연구센터 현지 책임자인 김도헌 과장에게 사람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냥 놀러 가는 거라며, “이곳은 일자리가 없어 출근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이곳 사람들은 게을러도 너무 게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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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의 사라지는 천국
그런데 이곳의 자연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게으를 만하다.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아름다운 빛과 땅, 그리고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축의 자연은 풍부한 먹을거리와 쉴 곳, 따스함을 아낌없이 주었다. 덕분에 이곳 사람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 굶어 죽을 일도, 얼어 죽을 일도 없어 부지런할 이유가 없다. 느긋이 나와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만 하고 길가에 주르륵 앉아 삶을 즐기면 됐다.
이곳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이곳 주민들은 빵나무를 먹는다. 빵나무의 열매는 지름이 13cm 정도 되는데, 탄수화물과 지방이 풍부하다. 이 열매를 찌면 고구마 비슷한 맛이 난다. 나무 한두 그루가 있으면 한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다.
산호 생태계에는 다양한 해양생물이 많아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산호는 바닷물이 맑고 햇빛이 잘 드는 얕은 바다에서 볼 수 있다. 산호는 단세포 조류의 일종인 충조류와 공생한다. 충조류는 광합성을 해 영양분과 산소를 산호에게 주고, 이산화탄소와 영양분, 서식처를 얻는다. 물고기에게 산호는 조류가 많고 나뭇가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먹을거리가 많고 안전한 곳이다. 그래서 각종 해양생물이 산호로 몰려든다. 또 산호는 자연방파제 역할을 한다. 태풍이나 쓰나미로 몰려드는 큰 파도를 막아 육지를 보호하는 것이다.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인도양에 인접한 나라들은 대부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산호초가 잘 보존된 몰디브는 피해가 적었다. 산호초가 쓰나미의 위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럽고 안락한 삶도 새로운 문명의 유입과 기상이변, 환경파괴로 인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전통적인 생활 방법 대신 서구식 생활 방식을 택하면서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빵나무 열매 대신 쌀과 밀을 사서 밥과 빵을 만들어 먹었다. 고기를 미국에서 수입해 먹으며 입맛도 변했다. 손질하기 귀찮고 품이 많이 드는 전통가옥은 양철지붕과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집으로, 느린 전통배는 빠르고 편리한 모터보트로 바뀌었다.
새로운 문명이 들어오면 생활의 질이 높아질 것 같지만 되레 나빠진 측면이 많다. 사방이 트여 시원한 전통집과 달리 양철과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서구식 집은 태양빛에 빨리 달아오른다. 주민들은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과 과시욕으로 오븐 속 같은 집에서 산다. 에너지도 들지 않고, 친환경적인 전통배도 사라져 가고 있다. 바람과 해류, 인력을 적절히 이용하는 전통배는 과거 400km 떨어진 섬까지 전쟁을 하러 다녔을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이젠 간편하고 빠른 현대식 배를 사용한다. 바다에 나가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필요한데, 기름이 없으면 바다로 나갈 수조차 없다. 해상민족의 지혜를 잃은 것이다.
서구 문명처럼 살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하다. 전통 가옥 대신 양철지붕을 얹은 집을 지으려면 나무와 시멘트, 양철이 필요하다. 현대식 배와 차를 굴리기 위해선 배와 차를 수입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기름이 필요하다. 이 모든 걸 수입했다. 이런 소비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해외에서 많은 원조를 받다보니 사람들은 의존적으로 변했다. 천혜의 자연환경도 이곳 사람들의 게으름에 일조했겠지만, 의존적인 경제구조도 큰 몫을 했다.
환경오염도 심각하다. 주민들 집 주변에서 폐차나 폐선박을 흔히 볼 수 있다. 바닷가와 도로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망친다. 주민들이 환경 보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렸기 때문이다. 연구센터 인근 바다에도 좌초돼 쓰지 못하는 포클레인이 있지만 아무도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축 정부가 쓰레기를 치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행정능력이 부족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모든 쓰레기가 땅으로 돌아갔던 과거와 차이가 있다.
주민들의 밥줄이었던 산호 생태계도 붕괴가 우려되고 있다. 많은 현지 주민들이 편히 물고기를 잡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한다. 물고기를 남획한 것도 문제지만,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며 산호를 부순다. 산호가 없어지면 플랑크톤과 해양생물이 살 곳이 사라진다. 북반구의 원양어선도 이곳까지 내려와 물고기를 남획해 생태계 붕괴를 가속화한다. 김도헌 과장은 “물고기의 씨가 말라 축의 주민들이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식량문제를 고민할 지경”이라고 지적했다.
기후변화도 축의 삶을 어렵게 한다. 과거 스콜이 항상 있었다. 수평선을 보면 하늘과 땅이 이어진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스콜이 내리는 곳이다. 스콜은 열대의 더위를 잠시식힌다. 이 스콜이 줄고 있는 대신 우기가 생겨 지난 8월 한국 곳곳에 내린 비처럼 며칠간 계속 내린다. 15년간 이곳에서 지낸 김도헌 과장은 “원래는 없던 현상”이라고 말했다. 우기에 추위를 느낀 주민들이 난방을 하기 시작했다. 비싼 기름으로 난방을 하기 어려우니 해안가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를 잘라 불을 지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산이 헐벗은 것처럼 축의 해변이 헐벗기 시작했다.
맹그로브는 땅에서 흘러나가는 흙을 잡아두어 해안의 산호를 보호한다. 잡아둔 흙에는 작은 유기체가 많이 산다. 마치 우리나라의 갯벌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난방을 위해 맹그로브 나무를 가져다 쓰니 산호가 해안에서 흘러나온 흙에 덮여 죽을 위기에 처한다. 주민들의 삶을 위협해 악순환은 이렇게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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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야자 잎으로 엮어 만든 가방. 무거운 야자 여러 개를 넣어도 끄떡 없을만큼 튼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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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공항과 항구 주변에 있는 번화가의 모습. 축 사람들은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번화가에 나와 한가롭게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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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축의 도로변 곳곳에서 폐차를 흔히 볼 수 있다. 쓰레기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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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축의 전통가옥. 야자수로 엮어 만들어 관리가 힘들지만 안에 들어가면 시원해 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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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➎ 축의 전통배. 나무 속을 깍아 만든 배지만 400km를 항해해 전쟁을 치뤘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나다. 배 뒤로 치우지 않은 포크레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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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➏ 연구센터에서 배양 중인 스피룰리나를 체험단이 보고 있다. 스피룰리나는 건강식품과 바이오에너지를 만드는데 쓰인다.]
남태평양의 아름다움과 전통을 지킨다
연구센터는 남태평양의 환경과 해양생물을 연구해 생태계 파괴를 줄이고 기상이변에 대비하고 있다. 연구센터는 과학 연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환경과 주민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연구센터가 연구 중인 미세조류 스피룰리나는 건강보조식품으로도 각광받고 있지만, 차세대 바이오연료로 가치가 높다(과학동아 2010년 8월호 참조). 따라서 스피룰리나는 이 지역의 좋은 수입원이 될 것이며,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기름을 대체하는 자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대원 연구원은 “이곳은 햇볕이 풍부하고, 온도가 적당해 스피룰리나가 자라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며 “쉬운 배양법을 개발해 현지인들 스스로가 운영하면 축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또 연구센터는 축 지방정부 수산국과 협력해 해양보호구역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원양어선들이 이곳에서 해삼을 싹쓸이해 갔다. 축 수산국은 해양보호구역을 설정하려고 했지만, 경험이 없고 현지 주민들의 이해부족으로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연구센터는 수산국이 해양보호구역을 설정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주민들이 해양보호구역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포스터를 만들어 알리는 캠페인을 벌였다.
연구센터는 점점 사라져가는 축의 전통 문화 기록과 복원에도 힘을 쏟고 있다. 서구 문물에 관심이 많은 젊은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 문화에 관심이 없다. 지식을 갖고 있는 노인들이 죽으면 천 년간 이어져온 유산이 사라질 것이다. 전통가옥과 전통배는 이곳 환경에 잘 맞는 효율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박흥식 소장은 “장차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연구센터 앞에도 만들어 두었으며, 만드는 방법을 기록해 놓았다”고 말했다.
전통의학을 조사하는 일도 했다. 김도헌 과장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우리나라의 창포나 감초 같은 풀과 약초가 있다”고 말했다. 민간의학지식이 기록되지 않은 채 노인들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었다. 현대 의약품이 수입되면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여겨진 지식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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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환초 인근의 샤크 아일랜드에 사는 상어. 별다른 큰 포유동물이 없는 축에선 상어가 가장 무서운 동물이다. 실제로 사람을 무는 일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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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일본군이 만든 전망대에서 만난 도마뱀. 숙소에도 도마뱀이 많이 사는데, 파리와 모기를 모두 잡아 먹어 벌레 걱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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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연구센터는 정기적으로 센터 주변과 주변 섬에서 쓰레기를 모아 처리하고 있다. 체험단도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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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연구센터는 생명다양성과 맹그로브 숲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했다.]
연구센터는 전통의학지식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지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면서 인류에게 이로운 새로운 물질을 찾는 좋은 길잡이라고 본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배 아플 때 먹었던 약초의 성분을 연구한다면 획기적인 신약을 얻을지도 모른다. 무턱대고 찾는 대신 이 지역에서 천 년간 살며 쌓아온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센터는 웨노 섬 주위의 여러 섬을 돌며 전통의학지식을 기록했다. 이런 활동은 우리나라의 생물자원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축에서 이런 활동은 연구센터를 중심으로만 이뤄지고 있지만 정부가 나서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 못지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 박흥식 소장은 “이런 활동이 가까운 시일 안에 많은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미래에 한국이 대양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축을 떠나는 비행기는 28일 오후 2시쯤에 날아올랐다. 깊은 밤에 도착해 아무 것도 볼 수 없던 것과 달리 산호초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일주일간 이곳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떠나는 순간까지 다시금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었다. 이곳이 영원히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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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식 소장이 열대해양체험단에게 맹그로브 숲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맹그로브 숲은 우리나라의 갯벌과 같이 습지 생물이 사는 서식지이며, 산호를 지키는 방파제다.]
인천공항을 떠난 체험단은 괌을 거쳐 남태평양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축’ 주의 웨노 섬에 도착했다. 밤 11시 축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린 것은 정전이었다. 한·남 태평양해양연구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환대를 받던 중 갑작스레 어둠이 내렸다. 구름이 많아 별빛조차 없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놀란 체험단과 달리 현지인들과 연구원들은 정전이 일상이라는 듯 태연했다. 비로소 다른 문명으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옆 아무런 불빛도 나오지 않는 건물을 보고 박흥식 해양연구센터 소장에게 “빈 건물인가요?”라고 물었다. 박소장은 웃으며 “축 최고의 호텔입니다”라고 답했다.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느껴져 폐허 같던 건물이 호텔이라니 의아할 뿐이었다.
연구센터까지 가는 길도 상상을 초월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었지만, 포장도로라기보단 큰 웅덩이가 곳곳에 있는 장애물 경주로였다. 박 소장은 “이렇게 된 지 3~4년 됐지만 아무도 고치지 않는다”며 “연구센터가 공항에서 불과 1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만 차로 한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KTX를 이용해 서울에서 대전까지 갈 수 있는 시간 동안 고작 10km 가는 데 그쳤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서일까. 사람들도 느긋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길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태평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선 출근과 등교로 바쁠 시간에도 사람들은 별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몇이 어디론가 가고 있어 연구센터 현지 책임자인 김도헌 과장에게 사람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냥 놀러 가는 거라며, “이곳은 일자리가 없어 출근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이곳 사람들은 게을러도 너무 게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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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태평양해양연구센터의 전경. 웨노 섬의 ‘사북’이란 곳에 있는데 현지 주민에겐 우리나라의 대기업 못지 않은 좋은 직장이다.]
남태평양의 사라지는 천국
그런데 이곳의 자연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게으를 만하다.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아름다운 빛과 땅, 그리고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축의 자연은 풍부한 먹을거리와 쉴 곳, 따스함을 아낌없이 주었다. 덕분에 이곳 사람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 굶어 죽을 일도, 얼어 죽을 일도 없어 부지런할 이유가 없다. 느긋이 나와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만 하고 길가에 주르륵 앉아 삶을 즐기면 됐다.
이곳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이곳 주민들은 빵나무를 먹는다. 빵나무의 열매는 지름이 13cm 정도 되는데, 탄수화물과 지방이 풍부하다. 이 열매를 찌면 고구마 비슷한 맛이 난다. 나무 한두 그루가 있으면 한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다.
산호 생태계에는 다양한 해양생물이 많아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산호는 바닷물이 맑고 햇빛이 잘 드는 얕은 바다에서 볼 수 있다. 산호는 단세포 조류의 일종인 충조류와 공생한다. 충조류는 광합성을 해 영양분과 산소를 산호에게 주고, 이산화탄소와 영양분, 서식처를 얻는다. 물고기에게 산호는 조류가 많고 나뭇가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먹을거리가 많고 안전한 곳이다. 그래서 각종 해양생물이 산호로 몰려든다. 또 산호는 자연방파제 역할을 한다. 태풍이나 쓰나미로 몰려드는 큰 파도를 막아 육지를 보호하는 것이다.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인도양에 인접한 나라들은 대부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산호초가 잘 보존된 몰디브는 피해가 적었다. 산호초가 쓰나미의 위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럽고 안락한 삶도 새로운 문명의 유입과 기상이변, 환경파괴로 인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전통적인 생활 방법 대신 서구식 생활 방식을 택하면서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빵나무 열매 대신 쌀과 밀을 사서 밥과 빵을 만들어 먹었다. 고기를 미국에서 수입해 먹으며 입맛도 변했다. 손질하기 귀찮고 품이 많이 드는 전통가옥은 양철지붕과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집으로, 느린 전통배는 빠르고 편리한 모터보트로 바뀌었다.
새로운 문명이 들어오면 생활의 질이 높아질 것 같지만 되레 나빠진 측면이 많다. 사방이 트여 시원한 전통집과 달리 양철과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서구식 집은 태양빛에 빨리 달아오른다. 주민들은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과 과시욕으로 오븐 속 같은 집에서 산다. 에너지도 들지 않고, 친환경적인 전통배도 사라져 가고 있다. 바람과 해류, 인력을 적절히 이용하는 전통배는 과거 400km 떨어진 섬까지 전쟁을 하러 다녔을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이젠 간편하고 빠른 현대식 배를 사용한다. 바다에 나가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필요한데, 기름이 없으면 바다로 나갈 수조차 없다. 해상민족의 지혜를 잃은 것이다.
서구 문명처럼 살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하다. 전통 가옥 대신 양철지붕을 얹은 집을 지으려면 나무와 시멘트, 양철이 필요하다. 현대식 배와 차를 굴리기 위해선 배와 차를 수입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기름이 필요하다. 이 모든 걸 수입했다. 이런 소비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해외에서 많은 원조를 받다보니 사람들은 의존적으로 변했다. 천혜의 자연환경도 이곳 사람들의 게으름에 일조했겠지만, 의존적인 경제구조도 큰 몫을 했다.
환경오염도 심각하다. 주민들 집 주변에서 폐차나 폐선박을 흔히 볼 수 있다. 바닷가와 도로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망친다. 주민들이 환경 보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렸기 때문이다. 연구센터 인근 바다에도 좌초돼 쓰지 못하는 포클레인이 있지만 아무도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축 정부가 쓰레기를 치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행정능력이 부족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모든 쓰레기가 땅으로 돌아갔던 과거와 차이가 있다.
주민들의 밥줄이었던 산호 생태계도 붕괴가 우려되고 있다. 많은 현지 주민들이 편히 물고기를 잡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한다. 물고기를 남획한 것도 문제지만,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며 산호를 부순다. 산호가 없어지면 플랑크톤과 해양생물이 살 곳이 사라진다. 북반구의 원양어선도 이곳까지 내려와 물고기를 남획해 생태계 붕괴를 가속화한다. 김도헌 과장은 “물고기의 씨가 말라 축의 주민들이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식량문제를 고민할 지경”이라고 지적했다.
기후변화도 축의 삶을 어렵게 한다. 과거 스콜이 항상 있었다. 수평선을 보면 하늘과 땅이 이어진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스콜이 내리는 곳이다. 스콜은 열대의 더위를 잠시식힌다. 이 스콜이 줄고 있는 대신 우기가 생겨 지난 8월 한국 곳곳에 내린 비처럼 며칠간 계속 내린다. 15년간 이곳에서 지낸 김도헌 과장은 “원래는 없던 현상”이라고 말했다. 우기에 추위를 느낀 주민들이 난방을 하기 시작했다. 비싼 기름으로 난방을 하기 어려우니 해안가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를 잘라 불을 지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산이 헐벗은 것처럼 축의 해변이 헐벗기 시작했다.
맹그로브는 땅에서 흘러나가는 흙을 잡아두어 해안의 산호를 보호한다. 잡아둔 흙에는 작은 유기체가 많이 산다. 마치 우리나라의 갯벌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난방을 위해 맹그로브 나무를 가져다 쓰니 산호가 해안에서 흘러나온 흙에 덮여 죽을 위기에 처한다. 주민들의 삶을 위협해 악순환은 이렇게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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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야자 잎으로 엮어 만든 가방. 무거운 야자 여러 개를 넣어도 끄떡 없을만큼 튼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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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공항과 항구 주변에 있는 번화가의 모습. 축 사람들은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번화가에 나와 한가롭게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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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축의 도로변 곳곳에서 폐차를 흔히 볼 수 있다. 쓰레기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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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축의 전통가옥. 야자수로 엮어 만들어 관리가 힘들지만 안에 들어가면 시원해 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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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➎ 축의 전통배. 나무 속을 깍아 만든 배지만 400km를 항해해 전쟁을 치뤘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나다. 배 뒤로 치우지 않은 포크레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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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➏ 연구센터에서 배양 중인 스피룰리나를 체험단이 보고 있다. 스피룰리나는 건강식품과 바이오에너지를 만드는데 쓰인다.]
남태평양의 아름다움과 전통을 지킨다
연구센터는 남태평양의 환경과 해양생물을 연구해 생태계 파괴를 줄이고 기상이변에 대비하고 있다. 연구센터는 과학 연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환경과 주민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연구센터가 연구 중인 미세조류 스피룰리나는 건강보조식품으로도 각광받고 있지만, 차세대 바이오연료로 가치가 높다(과학동아 2010년 8월호 참조). 따라서 스피룰리나는 이 지역의 좋은 수입원이 될 것이며,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기름을 대체하는 자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대원 연구원은 “이곳은 햇볕이 풍부하고, 온도가 적당해 스피룰리나가 자라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며 “쉬운 배양법을 개발해 현지인들 스스로가 운영하면 축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또 연구센터는 축 지방정부 수산국과 협력해 해양보호구역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원양어선들이 이곳에서 해삼을 싹쓸이해 갔다. 축 수산국은 해양보호구역을 설정하려고 했지만, 경험이 없고 현지 주민들의 이해부족으로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연구센터는 수산국이 해양보호구역을 설정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주민들이 해양보호구역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포스터를 만들어 알리는 캠페인을 벌였다.
연구센터는 점점 사라져가는 축의 전통 문화 기록과 복원에도 힘을 쏟고 있다. 서구 문물에 관심이 많은 젊은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 문화에 관심이 없다. 지식을 갖고 있는 노인들이 죽으면 천 년간 이어져온 유산이 사라질 것이다. 전통가옥과 전통배는 이곳 환경에 잘 맞는 효율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박흥식 소장은 “장차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연구센터 앞에도 만들어 두었으며, 만드는 방법을 기록해 놓았다”고 말했다.
전통의학을 조사하는 일도 했다. 김도헌 과장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우리나라의 창포나 감초 같은 풀과 약초가 있다”고 말했다. 민간의학지식이 기록되지 않은 채 노인들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었다. 현대 의약품이 수입되면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여겨진 지식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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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환초 인근의 샤크 아일랜드에 사는 상어. 별다른 큰 포유동물이 없는 축에선 상어가 가장 무서운 동물이다. 실제로 사람을 무는 일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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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일본군이 만든 전망대에서 만난 도마뱀. 숙소에도 도마뱀이 많이 사는데, 파리와 모기를 모두 잡아 먹어 벌레 걱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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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연구센터는 정기적으로 센터 주변과 주변 섬에서 쓰레기를 모아 처리하고 있다. 체험단도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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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연구센터는 생명다양성과 맹그로브 숲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했다.]
연구센터는 전통의학지식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지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면서 인류에게 이로운 새로운 물질을 찾는 좋은 길잡이라고 본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배 아플 때 먹었던 약초의 성분을 연구한다면 획기적인 신약을 얻을지도 모른다. 무턱대고 찾는 대신 이 지역에서 천 년간 살며 쌓아온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센터는 웨노 섬 주위의 여러 섬을 돌며 전통의학지식을 기록했다. 이런 활동은 우리나라의 생물자원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축에서 이런 활동은 연구센터를 중심으로만 이뤄지고 있지만 정부가 나서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 못지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 박흥식 소장은 “이런 활동이 가까운 시일 안에 많은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미래에 한국이 대양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축을 떠나는 비행기는 28일 오후 2시쯤에 날아올랐다. 깊은 밤에 도착해 아무 것도 볼 수 없던 것과 달리 산호초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일주일간 이곳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떠나는 순간까지 다시금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었다. 이곳이 영원히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좋겠다.